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35
135
“제가 살펴봤는데 하자가 하나도 없고 전부 공장에서 금방 가져온 것 같은 신품들이었습니다.”
스와이단이 끼어들며 이야기를 덧붙이자 알할부시는 얼굴을 펴면서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딱 때를 맞춰서 적과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필요한 무기를 가져왔으니 혁권이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자, 서서 이럴 것이 아니라 앉아서 이야기를 계속 나누도록 하지.”
한쪽에 있는 가죽 소파로 가서 앉은 알할부시는 호의적인 시선으로 혁권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됐소.”
“약속을 했으니 지키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담백한 대답에 알할부시는 머리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당장 눈앞의 욕심에 빠져 그런 기본적인 신용조차 지키지 않는 이들이 많지. 그런 걸 보면 역시 내가 사람을 잘 선택했어.”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과정이야 어찌 됐건 중요한 거점인 미스라타를 장악하고 있는 알할부시와 좋은 관계를 맺어서 나쁠 것이 없었기에 그도 상대의 기분을 맞춰줬다.
“이건 약소하지만 선물입니다.”
혁권이 옆자리에 놔둔 나무 상자를 탁자에 올려놨다.
“이게 뭐요?”
“시가를 즐기시는 것 같아서 오는 길에 하나 구해 왔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군요.”
알할부시가 손을 뻗어 묶인 매듭을 풀고 상자를 열자 안에는 최고급 시가인 꼬이바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마침 피우던 것이 다 떨어졌는데, 어찌 알고 이걸 가져왔소?”
“아, 그랬습니까.”
두툼한 시가를 하나 꺼내 든 알할부시는 코에다 가져가 진한 향을 맡아 보곤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 것보다 더 좋은 거 같구먼.”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하하하. 그럼 종종 부탁하리다.”
시가 선물에 기분이 더 좋아진 알할부시는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선물한 시가에 불을 붙여 입에 물며 알할부시가 용건을 꺼냈다.
“이렇게 보자고 한 건 추가로 거래를 더 했으면 해서요.”
“거래라면…….”
혁권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자 알할부시가 하얀 연기를 내뱉으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했다.
“알다시피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족한 것들이 많소. 특히 밀가루와 연료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값이 오르는 판이지. 그리고 병사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품들도 많고 그래서 이런 것들을 그쪽에서 구해 줬으면 좋겠소.”
“물량은 얼마나 생각하십니까?”
“밀가루 100톤과 연료 2만 리터 여기에 병사들이 쓸 군복하고 군화가 필요하오. 해 줄 수 있겠소?”
“대금은 어떻게 지급해 주실 겁니까.”
“이번처럼 원유로 주겠소.”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알할부시가 말을 이었다.
“대신 이번하고 똑같이 배럴당 15달러에 원유를 넘겨주겠소.”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본 혁권은 이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그럼 원유를 지금 바로 가져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원유를 먼저 달라는 거요?”
알할부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며 혁권이 얼른 말을 받았다.
“여기까지 배를 끌고 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유조선처럼 덩치가 큰 배는 더 어렵지요. 거기다가 운항 비용 또한 만만치가 않으니 자칫 잘못하면 배보다 배꼽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마침 이번에 가져온 유조선 적재량에 여유가 있으니까 한꺼번에 옮긴다면 여러 가지로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그럴듯한 이야기에 알할부시는 고심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뒤로 몸을 기댔다.
“그렇게 한다면 줄어드는 경비만큼 물품을 더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흐음.”
마지막 말에 알할부시는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시가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하던 알할부시가 결정을 내렸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혁권은 반색을 했다.
그 자리에서 필요한 물품 목록과 원유를 얼마나 받아 갈 건지 협의하고 있을 때 갑자기 둔탁한 폭음이 울렸다.
꽈아아앙!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 유리창이 깨지고 건물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후두두둑.
천장에서 회색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고 뿌옇게 피어 오른 먼지에 메마른 기침소리가 들렸다.
“콜록. 콜록.”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하킴과 바깥에 있던 경비병들이 뛰어 들어왔다.
“보스!”
본능적으로 몸을 엎드린 혁권은 하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여기야.”
“괜찮으십니까?”
하킴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혁권은 시멘트 가루를 뒤집어써 더러워진 옷을 털어 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인상을 쓰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막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바깥에서 날카로운 총성이 연속해서 울렸다.
타타탕! 타탕! 탕! 탕!
불길한 느낌에 창가로 달려간 혁권은 등을 벽에 붙이고는 살짝 고개만 내밀어 밖을 살펴봤다.
승용차 한 대가 정문 바리케이드에 부딪친 채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있고 정체 불명의 괴한들이 자동소총을 난사하면서 사령부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경비 병력이 사력을 다해 막아 내고 있었지만 상대의 기세가 보통 사나운 것이 아니었다.
불현듯 출항 직전에 샌더슨이 해 준 이야기를 떠올린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그때 역시나 시멘트 가루를 잔뜩 묻힌 알할부시가 창가로 와서 바깥 상황을 확인하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놈들이.”
고개를 돌리던 혁권은 사령부 맞은편 건물 모퉁이에 몸을 숨긴 적 한 명이 총을 들어 이쪽을 겨냥하는 걸 발견하곤 황급히 알할부시를 밀치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위험해!”
그와 동시에 총구에서 섬광이 번득였고 이내 총탄이 날아와 방금까지 알할부시가 서 있던 곳에 쏟아졌다.
퍼퍼퍽!
총알이 바닥에 박히면서 사방으로 타일 파편이 튀었다.
머리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시멘트 조각들을 맞으며 알할부시가 심장이 철렁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혁권의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온몸에 바람구멍이 났을 생각을 하니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알할부시의 한쪽 어깨를 잡아끌며 창가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스와이단이 얼른 다가와 알할부시를 부축하면서 말했다.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몸을 바로 한 알할부시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적들이 도시 안까지 침투하는 동안 도대체 뭘 한 거야!”
잔뜩 성이 난 그가 불같이 닦달하는데도 스와이단은 머리만 숙일 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괜히 나섰다가 더 미운털이 박히고 싶지 않을뿐더러, 알할부시의 말대로 적이 여기까지 잠입해 오는 동안 아무도 그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또다시 둔탁한 폭음이 울리자 스와이단이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단 몸을 피하시지요.”
“사령부를 놔두고 어딜 간다는 거야!”
인상을 쓰며 차갑게 쏘아붙인 알할부시는 눈을 번들거리면서 말했다.
“당장 저것들을 격퇴시켜!”
“예.”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알할부시가 소리를 치고 있을 때 하킴이 맡아 두고 있던 권총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보스, 여기…….”
무기를 건네받은 그는 오늘따라 손에 쥔 권총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철컥.
슬라이드를 당겨 총알을 장전한 혁권은 문득 선착장에서 한창 하역 작업 중일 부하들을 떠올리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령부가 있는 시내와 선착장은 꽤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폭음과 함께 시커멓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작업을 감독하고 있던 자말은 고개를 들어 시내 쪽을 바라보면서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런.”
“시내에서 무슨 일이 난 것 같습니다.”
라미가 화들짝 놀라 옆으로 다가오자 자말은 피어오르는 연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아무래도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 같아.”
“보스께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는데 어쩝니까?”
“아까 민병대 사령부로 간다고 했지?”
“예.”
“내가 다른 사람들하고 시내로 들어가서 보스를 모시고 올 테니까 넌 배를 지키고 있어.”
그러자 라미가 발끈하며 그를 쳐다봤다.
“혼자 남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명령대로 해.”
“대위님!”
예전 군 시절 계급을 부르면서 좀처럼 물러서려고 하지 않자 자말이 정색을 했다.
“이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리고 누가 뒤에 빠져서 놀고 있으래. 상황이 더 안 좋아졌을 때 막상 여기 배가 없으면 빠져나갈 수 없잖아.”
호되게 야단맞은 라미는 입술을 깨물며 억울한 얼굴을 했다.
그럼에도 반박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말의 말이 맞는 것을 스스로도 알기 때문이었다.
이내 라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꼭 보스를 구해서 돌아오셔야 됩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자말은 어깨에 메고 있던 AK자동소총의 노리쇠를 당기며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목숨을 버리더라도 보스를 지킬 거니까 걱정하지 마.”
자말과 부하들한테 있어 혁권은 단순한 고용인이 아니었다.
시궁창에 처박혀 있던 자신들한테 기회를 주고 가족까지 총성이 끊이지 않는 지옥 같은 리비아를 떠나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은인이었다.
비록 여기서 자신이 죽더라도 혁권이 끝까지 가족들을 책임져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이건 다른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명령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한창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시내로 들어갈 픽업트럭에 올라탔다.
픽업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면서 멀어지자 라미는 하역 작업을 중단시키고 남아 있는 조직원 네 명과 방어 태세를 갖췄다.
타타타탕! 타탕!
자살 폭탄 공격을 감행한 승용차는 바리케이드를 들이받은 채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그 주위로 파편에 맞아 처참하게 찢긴 시신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사령부 앞 넓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측이 격렬한 총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큰 피해를 입고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사령부를 지키던 민병대 병사들은 공격에 맞서 완강히 저항했다.
하지만 사령부를 둘러싼 적들의 기세가 워낙 거세 이대로는 그리 오래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지금도 정문과 건물 옥상에 배치해 둔 기관총이 맹렬하게 총탄을 쏟아 내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방어선이 뚫리고 말았을 터였다.
그걸 아는지 1층으로 내려온 알할부시가 얼굴을 굳힌 채 다그치듯 말했다.
“지원 병력은 왜 아직 안 오는 거야!”
그러자 한쪽에서 무전기를 들고 휘하 부대와 교신을 하던 스와이단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다른 곳도 적들이 공격해 오고 있어서 병력을 빼기 어렵다고 합니다.”
“제길!”
알할부시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안팎에서 동시에 치고 들어오는 협공에 허를 제대로 찔리고야 말았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쳤다.
그리고 이것으로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정말로 적이 작정하고 도시를 함락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사령부가 위태로우니 반드시 이를 지켜야만 하는데,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병력을 빼 오면 외곽 방어선이 무너진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인 상황에 몰리고야 만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알할부시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동안, 혁권은 모래주머니를 반쯤 쌓아 올린 창문 옆 벽에 서서 바깥을 살폈다.
시선은 옆으로 돌린 모양이었으나 귀만은 여전히 열어 둔 채였기에 위태로운 분위기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을 때 어디서 구했는지 AK47 자동소총을 한쪽 손에 든 하킴이 다가와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스, 더 안 좋아지기 전에 얼른 여길 빠져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알아.”
뻔히 아는 사실을 두 번 말하지 말라는 듯 혁권이 대꾸했다.
몸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사방이 포위된 상태라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계속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기에 뭔가 타개책을 궁리하던 찰나 시끄러운 자동차 엔진 음이 총성 사이로 들렸다.
“응?”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앞쪽 도로에서 짐칸에 뭔가를 잔뜩 실은 픽업트럭이 사령부를 향해 곧장 달려오고 있었다.
바리케이드를 들이받은 채 불타고 있는 차량과 성난 황소처럼 달려오는 픽업트럭을 번갈아 가면서 본 혁권은 머릿속을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몸을 뒤로 돌리면서 외쳤다.
“자폭 트럭이야, 모두 피해!”
그러나 알할부시와 다른 이들이 그 말뜻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엄청난 굉음과 함께 겨우 입구를 막고 있던 바리케이드를 뚫고 들이닥친 픽업트럭이 폭발했다.
쿠웅!
거인이 거대한 망치로 지면을 내리친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뜨거운 열기를 품은 바람이 모든 것을 싹 쓸어버릴 것처럼 거세게 사방으로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