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34
134
아주 대놓고 혁권이 뻔뻔하게 나오자 샌더슨은 순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어려운 무기를 구해 줬더니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원유를 받아 올 유조선까지 내놓으라고 요구를 하니까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샌더슨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하하하. 알겠소. 그런데 설마 용선비까지 우리보고 내라는 건 아니겠지요?”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소.”
“이거 마음에 드는구먼. 하긴 이런 일을 하려면 그만한 배짱은 있어야지. 앞으로 잘해 봅시다.”
샌더슨이 내미는 손을 혁권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맞잡으면서 악수를 나눴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기다렸다는 듯이 원유를 구매하겠다는 최필성의 연락이 왔고 그는 바로 CIA가 만들어 준 가짜 원유 매입 확인서를 복사해 한국으로 보내 줬다.
사전에 이야기를 한 대로 배럴당 30달러로 해서 총매입금액은 1,500만 달러였다.
원유를 무사히 한국에 있는 정유소까지 가져다줘야 들어오는 돈이었지만 이걸로 혁권은 단숨에 750만 달러를 벌었다.
그사이 이집트 건설 현장에 보낼 자재를 무사히 운송한 화물선이 돌아오며 미스라타로 갈 준비가 다 끝났다.
사실 어려운 일은 CIA에서 다 처리를 해 줘서 그는 준비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화물을 배에 싣고 가기만 하면 됐다.
선적 작업이 모두 끝나자 샌더슨이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지중해에 있는 나토NATO 해군에 손을 써 놨으니 배를 검문하는 일은 없을 거요. 그래도 항적 정보가 남으면 곤란할 테니까 공해로 나가면 바로 GPS 장치를 끄고 움직이도록 하시오.”
“염려 마시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샌더슨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상황이 조금 급하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화물을 미스라타로 가져가시오.”
“무슨 일이오?”
미간을 좁히면서 혁권이 물었다.
“이슬람형제단을 비롯한 리비아 내 IS 추종 세력들이 미스라타 근처에 대거 집결 중이라는 정보요.”
“그럼?”
“아마 조만간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 같소. 상대의 전력이 만만치 않아서 무기가 제때 전달되지 않으면 미스라타가 함락될 가능성이 클 거요.”
“으음.”
갑자기 돌발 변수에 그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자칫 잘못하면 전쟁터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못 한다고 그만두기에는 너무 많이 와 버렸다.
아마도 그걸 알기에 상대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걸 터였다.
얼굴을 구기는 그를 보며 샌더슨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살짝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아직 전투가 벌어진 건 아니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마시오. 화물을 내려 주고 원유를 받아 바로 떠나면 아무 문제없을 거요.”
자기가 직접 가도 그렇게 담담할 수 있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걸 꾹 참으며 그는 심호흡을 하곤 대답했다.
“알았소.”
“미스터 김.”
샌더슨은 정색을 한 채 그를 봤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알할부시한테 무기를 넘겨줘야 하오.”
“여태까지 한 번도 거래를 어겨 본 적이 없소.”
짧게 말한 혁권은 이내 몸을 돌려 경호원인 하킴과 함께 배에 올랐다.
뿌우웅.
긴 뱃고동 소리와 함께 화물선이 선착장을 떠나 넓은 바다로 나가자 외항에 정박해 있던 커다란 유조선 한 척이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알할부시가 넘겨줄 원유를 받아 가기 위해 CIA에서 구해 준 유조선이었다.
뱃머리에 록스3호라고 적힌 유조선은 LR2(Long Range 2)로 한 번에 100만 배럴이 넘는 원유를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합류한 두 선박은 거친 물살을 가르면서 점점 속력을 높여 남서쪽으로 나아갔다.
미스라타 부근 황량한 암석 지대 한쪽 우뚝 솟아 있는 바위 계곡 안에 일단의 무리가 은신해 있었다.
하나같이 허름한 군복에 구트라를 머리에 감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무기를 든 채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내들은 미스라타를 공격하기 위해서 은밀히 집결한 IS 추종 세력들이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숫자를 다 합치면 족히 1천에서 2천 명은 넘어 보였다.
거기다 어디서 구했는지 구식 T-62전차와 BMP-2 장갑차 그리고 2차 대전 때 구소련에서 대량으로 제작됐던 M1942 ZiS-3 76mm 야포가 회색 위장막을 뒤집어쓴 채 숨겨져 있었다.
계속 깊숙한 곳에 위장막으로 입구를 가린 동굴 안에서는 지휘관들이 모여 공격 계획을 논의 중이었다.
“여기 공항과 사령부가 위치한 시내 중심가 그리고 항구에 민병대 주력이 배치되어 있고 나머지는 검문소 몇 개뿐입니다.”
얼굴이 길쭉한 말상인 사내가 때가 잔뜩 낀 손가락으로 탁자에 펼쳐 놓은 지도를 짚어 가며 설명하자 이번 공격의 지휘를 맡은 알 무하마드가 눈을 매섭게 뜬 채 머리를 끄덕였다.
“적이 가진 중화기는 얼마나 되지?”
“전차나 장갑차 같은 기갑 차량은 없지만 중기관총을 설치한 픽업트럭이 서른 대가량 있고, 박격포도 다수 가지고 있습니다.”
“병력은?”
“1천 명이 조금 넘습니다.”
앞서 파악한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까짓 픽업트럭쯤이야 우리가 가진 기갑 차량들로 밀어 버리면 되니 머뭇거릴 것 없이 바로 공격합시다.”
다른 IS 계열 무장 세력인 무자헤딘 동맹 지휘관 자심이 눈을 번들거리면서 말하자 무하마드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무턱대고 시가지 안으로 기갑 차량을 밀어 넣었다가는 상대가 가진 RPG7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되오.”
“그거야 우리 용감한 전사들이 옆을 지켜 주면 되는 것 아니오.”
“기갑 차량들은 트리폴리 진격을 위해 아껴 둬야 하오. 아부카 여단이 끌고 온 전차 때문에 다 잡은 승리를 놓친 걸 잊지 마시오.”
지난번 트리폴리 기습에서 아깝게 패배를 당한 걸 떠올린 무하마드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자심이 퉁명스럽게 묻자 무하마드는 손을 뻗어 지도에서 민병대 사령부 표식이 되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지휘부를 박살 내 상대를 혼란에 빠뜨린 다음 중심가로 곧장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 진격해 들어간다면 적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오.”
그럴듯한 작전에 자심이 살짝 언성을 죽이면서 이야기했다.
“도시에 잠입해 지휘부를 타격하는 건 누가 할 거요?”
“이미 우리 쪽 인원들이 준비 중이오.”
다 결정을 내려놓고 통보하는 식으로 말하자 자존심이 상한 자심은 인상을 찡그렸다.
“우리가 옆에서 들러리나 서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눈을 부라리며 자심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자 몇몇 참석자들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동조했다.
대부분 자심처럼 최근 급격하게 세력을 키운 이슬람형제단이 이번 일을 주도하는 데 불만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 달라는 거요?”
희미한 어둠 속에서 무하마드의 칼날 같은 시선이 새파란 빛을 발했다.
랜턴의 흔들리는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아지랑이처럼 비추고, 울퉁불퉁하게 굴곡진 광대뼈와 굳은 턱 선이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에 다른 이들은 조금 흠칫하여 눈을 마주치길 피했으나, 이미 제 스스로에 취한 자심은 어느덧 침체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호기롭게 선언했다.
“이번 일은 우리가 하겠소.”
깊은 내 천川 자가 무하마다의 미간에 새겨졌다.
“정 원하면 그렇게 하시오. 다만…….”
목구멍 안쪽에서 짐승의 으르렁거림과도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일이 잘못됐을 경우에는 책임도 당신이 함께 지는 거요.”
“하! 물론이지.”
당연히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듯 자신감이 충만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자 심복인 우스만이 옆으로 다가와서는 무하마드의 눈치를 살피며 나직이 말했다.
“정말 이대로 작전을 진행해도 괜찮겠습니까?”
상대가 민병대 지휘부를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면 미스라타를 함락시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이 되기에 자칫 주도권이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걸 알기에 어렵고 많은 희생이 예상되는 데도 불구하고 자심이 지휘부 공격을 자임하고 나선 거였다.
우쭐한 얼굴로 따르는 이들과 동굴 바깥으로 나가는 자말을 지그시 쳐다본 무하마드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의 목표는 고작 미스라타 따위가 아니니까 마음껏 웃으라고 그래. 하지만 만약 헛발질을 해서 내 발목을 잡는다면 그때는 오늘 건방지게 덤빈 것까지 합쳐서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어.”
날카로운 살기를 피워 올리면서 무하마드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한편 피레에프스 항구를 출발한 두 척의 배는 다음 날 오후, 멀리 미스라타가 보이는 해역에 도착했다.
덩치가 큰 유조선을 항구 바깥에 세워 두고 예인선의 도움을 받아 배를 선착장에 대자 기다렸다는 듯 스와이단이 갑판 위로 올라왔다.
“어서 오시오. 언제 오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그러면서 마치 오래된 지기를 만난 것처럼 혁권을 얼싸 안았다.
졸지에 그와 포옹을 하게 된 혁권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얼른 떨어졌다.
“인사는 그쯤하고, 가져온 물건부터 먼저 보시겠소.”
“그게 좋겠군!”
스와이단은 방금 혁권을 맞이했을 때보다 훨씬 더 밝은 표정으로 손을 비비며 찬성했다.
혁권은 스와이단을 갑판 아래에 있는 선창으로 데려갔다.
넓은 선창에 무기가 들어 있는 나무 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는 걸 본 스와이단의 얼굴이 환해졌다.
끼릭. 탁.
하킴이 노루발못뽑이를 써서 나무 상자들을 열어 주자 안에 든 무기들을 하나씩 꺼내 살펴본 스와이단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 다 신품들로만 가져왔구먼. 이것들만 있으면 적들이 아무리 쳐들어와도 두렵지 않을 거요.”
AK47소총을 한쪽 손에 든 채 스와이단은 까무잡잡한 피부색 때문에 더 하얗게 보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랜 내전에 카다피 군한테서 빼앗은 군수품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던 미스라타 민병대한테 이번 거래는 가뭄 속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RPG-7 탄두와 박격포탄을 대거 확보하게 되면서 부족한 화력을 상당부분 보충할 수 있게 됐다.
“확인을 했으면 슬슬 원유 선적 작업을 시작했으면 하오만…….”
혁권의 말에 스와이단은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소.”
스와이단은 몸을 조금 돌려 뒤에 서 있던 부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봐.”
“옛.”
“원유 선적을 시작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부관이 무전기로 지시를 전달하자 스와이단은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보면서 말했다.
“무기를 하역하는 동안 작업이 다 끝나 있을 거요.”
머리를 끄덕인 혁권이 턱짓을 하자 옆에 있던 자말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화물을 내려!”
그러자 선창 지붕이 열리며 선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는 하역 작업을 시작했다.
지개차로 무거운 나무 상자를 단단한 그물 위에다가 몇 단씩 쌓아서 옮겨 놓자 대형 크레인이 그걸 들어 올려서는 선착장에 내려놨다.
흡족한 얼굴로 그걸 지켜보던 스와이단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아 참, 사령관님께서 도착하면 한번 보자고 하셨소.”
“날 말이오?”
“무기를 다 내리려면 한참 걸릴 테니 함께 사령부에 갖다 옵시다.”
“흠.”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잠시 고심을 하던 혁권은 이내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령관님한테 드릴 것도 있었으니 그렇게 합시다.”
“그거 잘됐구먼.”
자말한테 작업을 맡긴 혁권은 하킴만 데리고 스와이단과 함께 배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대기 중인 사륜구동차를 탔다.
일행이 탄 차량은 뜻밖에도 한국산 자동차였는데 슬쩍 살펴보니 그가 가져와서 판 물건 같았다.
자신의 손을 거친 자동차가 이렇게 리비아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사이 시내를 가로지른 사륜구동차는 민병대 사령부가 자리한 호텔 안으로 진입했다.
차에서 내린 혁권이 주위를 둘러보자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사령부 안팎으로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 민병대 병사 몇몇이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1층 유리창들을 막고 있는 걸 발견하곤 살짝 표정을 굳혔다.
곧 공격이 있을 거라는 걸 민병대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리비아에서 IS가 세력을 확장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무기 밀수까지 도와주고 있는데, 자칫 중요 거점 중 하나인 미스라타가 함락될지도 모르는 중요한 정보를 그냥 움켜쥐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혁권은 하킴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스와이단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령관님.”
스와이단의 말에 팔짱을 낀 채 심각한 얼굴로 한쪽 벽에 걸어 둔 지도를 보고 있던 알할부시가 몸을 돌렸다.
“아. 왔군.”
그를 보고 반색을 한 알할부시는 앞으로 다가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구먼.”
악수를 나눈 알할부시는 잔뜩 기대하는 시선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부탁한 무기들은 다 가져왔겠지?”
“네. 지금 선착장에서 하역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