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59
159
# 탐욕의 끝
혼자 쓰기에는 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넓은 태일그룹의 회장실.
유럽 장인이 만들어서 하나에 수백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값비싼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은 백발의 김종원 회장이 신문 경제란을 보고 있었다.
신문에는 요즘 주식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기업인 TC인터내셔널에 대한 특집 기사가 한 면을 다 차지한 채 쓰여 있었다.
시에라리온에서 획득한 다이아몬드 광산의 엄청난 잠재 가치와 다국적 광물 기업인 앵글로아메리칸과의 협력으로 TC인터내셔널이 크게 성장할 거라는 장밋빛 미래의 기사가 도배되어 있었다.
책상에 신문을 내려놓고 잠시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뭔가를 생각하던 김종원 회장은 손을 뻗어 한쪽에 놓인 인터폰을 눌렀다.
삑.
-예, 회장님.
스피커에서 여비서의 목소리가 들리자 김종원 회장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 실장 있나?”
-네.
“잠깐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얼마 안 있어 심복인 박상빈 실장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꾸벅 허리를 숙였다가 바로 하는 박상빈 실장을 보며 그가 입을 뗐다.
“스위스에 넣어 뒀던 비자금을 훔쳐 간 놈들을 잡는 건 어떻게 되고 있어?”
그러자 책상 앞에 선 박상빈 실장이 긴장으로 살짝 몸을 굳히면서 대답했다.
“셋째 아드님 주변 인물과 당시 일을 처리하던 이들을 중심으로 조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아직 별다른 소득이 없다는 뜻이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김종원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그 많은 돈을 뻔히 두 눈을 뜨고 도둑맞았는데 여태 실마리 하나 못 찾고 있다니, 정말 실망이야!”
“면목이 없습니다.”
“돈이 몽땅 다 허공에서 사라져 버린 것도 아닐 테고 뭔가 흔적이 있을 거 아냐?”
손바닥으로 연신 책상을 두드리면서 다그치자 박상빈 실장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그게 워낙 소액으로 쪼개져 이채를 반복하며 손으로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금융기관들을 거쳐 분산시키는 바람에 추적이 쉽지가 않습니다.”
“누가 변명이나 듣자고 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범인을 찾아내야 될 거 아니야.”
박상빈 실장도 범인을 빨리 잡고 싶었다.
그러나 혁권이 추적을 막기 위해 각종 방법을 써 놓은 데다 무엇보다 돈을 도둑맞은 사실을 외부에 드러낼 수가 없었기에 경찰이나 인터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채 계좌를 확인하고 뒤지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특히 외국 금융기관들은 국내 은행들과 달리 개인정보 관리가 철저했기에 계좌를 뒤지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솔직히 이런 식이라면 몇 년이 지나도 비자금이 최종적으로 옮겨진 곳을 알아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수사기관에 의뢰를 했다가 비자금의 존재가 드러나면 문제가 더 골치 아파지기에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은 김종원 회장의 안중에 없었다.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빨리 해결하도록 해.”
“예.”
짧게 혀를 찬 김종원 회장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살짝 기대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김종원 회장은 손가락 끝으로 책상에 놓인 신문을 툭툭 두드렸다.
“이거 인철이 짓이 맞지?”
힐끗 신문 기사를 확인한 박상빈 실장은 이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근신을 하라고 했더니 이런 짓이나 벌이고.”
몰래 진행한다고 했지만 태일그룹 비서실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규모가 작고 그리 중요하지 않은 손자회사인 데다 이제는 그룹에서 완전히 분리돼 별개의 회사라고 해도,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다 파악하고 있는 만큼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잘 알았다.
만약 기사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룹에서 계열 분리를 시키지 않았을 거고 담당자들 모두 문책을 받아야 마땅했다.
이맛살을 찡그리는 김종원 회장의 눈치를 보며 박상빈 실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만두도록 할까요?”
“주가가 얼마나 올랐다고?”
“주당 300원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4만 원 근처까지 갔습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5만 원을 넘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허어. 5만 원이라…… 바보 멍청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쪽으로는 제법 재주가 있군.”
아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것치고는 꽤나 조소하는 말투였다.
그러곤 잠시 고심을 하다 고개를 들었다.
“작업을 하면서 우리 그룹 이름을 들먹인 적이 있나?”
“없습니다.”
“흥. 그래도 앞뒤 분간은 할 줄 아는군.”
만약 주가를 띄우는 데 태일그룹의 이름이나 오너 일가라는 걸 이용했다면 나중에 폭탄이 터졌을 때 상당한 이미지 타격이 있을 수 있었다.
재수가 없으면 주가조작 혐의로 수사까지 받을 수 있었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당연했다.
“그냥 놔둬.”
“예?”
조금 뜻밖이었는지 박상빈 실장이 눈을 크게 떴다.
윗도리 단추를 풀며 김종원 회장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름 혼자서 재기를 해 보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게 가상하잖아.”
“그렇지만 주가가 너무 크게 오른 상태라 잘못하면 불똥이 그룹으로 튈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걸 막으라고 자네와 비서실이 있는 거잖아.”
정색을 하며 말하자 박상빈 실장이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 봐.”
“예.”
박상빈 실장이 나가자 김종원 회장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TC인터내셔널에 관련된 기사가 실린 신문을 바닥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여기야?”
“네.”
조수석에 앉은 혁권이 하킴의 대답을 들으면서 고개를 돌리자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4층짜리 빌라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짙게 선팅이 된 차창 너머로 보이는 빌라 3층에는 주가 조작을 위해서 김인철이 은밀하게 차려 놓은 트레이딩 룸Trading Room이 있었다.
“오피스 빌딩도 아니고 이런 외진 주택가에 트레이딩 룸을 만들어 놓다니 제법 머리를 굴렸군.”
“이동철의 뒤를 미행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찾아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시선을 바로하며 말했다.
“안에 몇 명이나 있어?”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배달 음식 그릇이 나오는 걸 보면 네다섯 명이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넉넉잡아 다섯 명이라고 생각하면 둘은 차트를 보고 나머지는 감시를 하는 놈들이겠군.”
“아마 그럴 겁니다.”
“인터넷 선은?”
“얼마 전 302호에서 비용을 비싸게 지불하고 제일 속도가 빠른 초고속 전용 회선을 연결시켰더군요.”
“그럼 확실하군.”
0.1초 차이로 거래가 성립되는 주식 시장에서 빠르고 안전한 인터넷 회선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남들보다 빠른 주문은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는데, 특히 김인철 일당이 현재 벌이고 있는 통정거래에서는 그 중요성이 더욱 컸다.
통정거래는 같은 편끼리 미리 짜고 정해진 시간에 서로 주식을 거래하는 거였다.
이렇게 하면 보유한 지분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 다른 이들의 착각을 유도하고 자연스럽게 주가를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지난 한 달간 TC인터내셔널의 거래 내역을 분석한 결과 상대가 이런 트레이딩 룸을 세 개 정도 운영하면서 통정거래를 하고 있는 걸 알아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호재가 연이어서 나오고 전문가들과 증권 방송에서 매수를 부추겼다고 해도 상한가를 계속 기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부분 직장에 나가 일을 하거나 아직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은 시간이라 빌라가 있는 골목은 인적 하나 없이 조용했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혁권이 입을 열었다.
“이제 10분 남았군. 정확히 2시에 놈들이 거래를 시도할 거니까 그때 손을 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돼.”
“염려 마십시오.”
자신 있게 대답한 하킴은 야구 모자를 꺼내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깊이 눌러쓰고는 차문을 열고 내렸다.
두 사람이 타고 온 차량은 서울에 와서 쭉 렌트해서 쓰던 고급 세단이 아니라 허름한 봉고차였다.
얼굴을 가리고 작업복에 양쪽으로 철제 사다리와 공구 가방을 든 하킴은 영락없이 수리를 하러 온 AS 기사처럼 보였다.
골목길 안으로 걸어가는 하킴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혁권은 이내 발밑에 놔둔 노트북을 꺼냈다.
모니터를 열고 전원 버튼을 누르자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들리면서 노트북이 켜졌다.
익숙한 윈도우 로고가 사라지고 뜬 파란색 바탕 화면에는 HTS(Home Trading System) 프로그램 아이콘만 하나 떠 있었다.
쓸데없이 메모리를 잡아먹거나 HTS 프로그램을 쓰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다 지워 버린 것이다.
비어 있는 USB 소켓에 기가 와이파이를 쓸 수 있는 스마트폰을 연결했다.
띠릭.
낮은 전자음이 울리고 얼마쯤 기다리자 인터넷이 연결됐다는 신호가 떴다.
상태 창을 열어 인터넷 속도를 확인한 혁권은 정상적으로 수치가 나오자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마우스를 움직여 아이콘을 클릭하자 딸칵 소리와 함께 HTS 프로그램이 실행됐다.
곧장 매매 화면은 띄우고 TC인터내셔널의 현재 주가와 거래 상태를 확인한 그는 긴장을 풀기 위해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깜짝 놀라게 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모니터를 주시하는 혁권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골목길 안쪽도 역시 인적이 거의 없었다.
아줌마 두 명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와 수다를 떨고 있었지만, 봉고에 눈길을 한번 주곤 이내 신경도 쓰지 않았다.
탁.
그러자 하킴은 공구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고는 왼편 전봇대에 사다리를 세웠다.
락을 풀어서 높이를 맞추고는 거침없이 사다리를 밟고 위로 올라갔다.
전봇대에 주렁주렁 널려 있는 각종 케이블들과 여러 장치들 가운데 인터넷 전용회선 단자함을 찾아낸 하킴은 잠금장치를 풀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잘 정리된 광케이블들이 옆으로 길게 만들어진 터미널 단자 대에 꽂혀 있고 한쪽 구석에 빨간색 LED 전구가 켜진 전원 장치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광케이블 중 하나가 빌라 옥상을 거쳐 302호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하킴은 옷깃에 꽂아 놓은 핀 마이크를 빼서 입으로 가져가며 송신 버튼을 눌렀다.
치칙.
“단자함 확보했습니다.”
-수고했어. 내가 신호를 주면 바로 끊도록 해.
“예.”
혁권과 교신을 끝낸 하킴은 소매를 살짝 걷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1시 55분.
예정된 거래 시간까지 5분이 남아 있었다.
일단 매수나 매도 주문을 넣으면 상대가 누구냐에 상관없이 조건에 맞는 곳과 자동으로 거래가 체결되기 때문에 통정거래에서는 주식을 주고받는 주체 간의 정확한 타이밍이 중요했다.
자칫 약간의 실수라도 있다면 엉뚱한 상대한테 주식이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통정거래 타이밍은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비밀을 엄수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이번 거래 타이밍을 알아낸 것도 운이 따라 준 덕분이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주로 대포폰을 이용해서 대화를 주고받던 김인철이 순조롭게 작전이 진행되자 긴장이 풀렸는지 평소 쓰던 번호로 이동철한테 메시지를 보낸 거였다.
진작부터 이동철의 스마트폰을 해킹해 놓은 혁권이 그걸 중간에서 훔쳐보곤 오늘 오후에 통정거래가 있다는 걸 알아낸 것이다.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혁권은 김인철이 보낸 메시지 내용대로 매도 금액과 수량을 채워 넣고 가만히 시계를 주시했다.
조금만 늦거나 빨라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거였기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시간이 가는 것이 왜 이렇게 느린지 1분이 하루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시계가 1시 59분을 가리키자 지체 없이 무전기 송신 버튼을 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