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74
174
# 당한 만큼 돌려준다
함단과 부하들의 호위 속에 그가 향한 곳은 도시에서 떨어진 외딴 해안가에 위치한 2층 저택이었다.
포세이돈 함을 이용해서 트리폴리로 물자를 정기적으로 밀수하게 되자 리비아와 가장 가까운 몰타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매입한 곳이었다.
유럽식 넓은 정원이 딸려 있고 뒤로는 개인 해변까지 있어 꽤 많은 돈을 줘야 했지만 그만큼 외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드러내 놓기 어려운 사업을 하는 혁권한테 프라이버시Privacy가 보장된다는 건 아주 큰 장점이었다.
밀수품을 노린 무장 세력의 습격에 뜻하지 않게 포세이돈 함이 크게 손상을 입으면서 한동안 비워 뒀다가, 미스라타에 물자를 공급하게 되면서 최근에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인 저택은 환하게 불이 다 켜져 있었고 자동화기로 무장한 부하들이 곳곳에 배치돼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혁권은 격전을 치르면서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노와 살기를 애써 참고 있는 모습이 흡사 상처 입은 한 마리 맹수처럼 느껴졌다.
똑똑.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온 함단은 진득한 방 안 공기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보스.”
그러자 혁권이 약간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됐어?”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고 갈비뼈에 살짝 금이 간 정도라서 수술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렇군.”
작게 머리를 끄덕이는 혁권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일단 현장에 있던 차량을 모두 불태우고 증거가 될 만한 걸 다 수거했지만 당분간 시끄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한적한 외곽 지역이라고 해도 자동소총까지 난사하며 소동을 피웠으니 조용히 넘어가긴 어려울 터였다.
“일이 커져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최대한 무마시키도록 하고 만약을 대비해서 하킴은 급한 치료가 끝나는 대로 아테네로 돌려보내.”
“알겠습니다.”
“습격을 해 온 놈들의 정체는 알아냈나?”
“그게 샅샅이 뒤져 봤지만 소지품에서는 신분을 알아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함단의 말에 그는 이미 그럴 줄 예상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습격을 하러 가는데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그래서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놈들의 지문을 떠서 경찰 쪽에 만들어 둔 끈을 통해 은밀히 신분을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그럴 필요 없어.”
“예?”
뜻밖의 말에 함단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면서 혁권이 씹어뱉듯 말했다.
“보나 마나 이슬람형제단 놈들이 저지른 일일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파에서 허리를 떼며 혁권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다.
“이슬람형제단에서 나를 죽이라는 척살령을 내렸다는군.”
“정말이십니까!”
“그래. 비록 바로 일이 터지는 바람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CIA에서 경고를 해 주더군.”
“그런 일이…….”
잔인 무도하고 집요한 이슬람형제단이 계획적으로 노린 거라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기에 함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맞아. 미스라타에 물자를 공급해 자신들의 계획을 망쳐 놓은 것에 앙심을 품은 거지.”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지 않습니까?”
척살령이 떨어진 이상 언제 또다시 습격을 해 올지 몰랐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함단과 달리 당사자인 혁권은 오히려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칼날 위에서 사는 인생이잖아. 이 정도 위험에 겁먹을 거였다면 애초에 이쪽 세계로 발을 들여놓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항구에 화물선이 도착해 있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함단은 무심코 머리를 끄덕였다.
“네. 밤늦게 도착해서 내일 아침 일찍 하역 작업을 시작해 아테네에서 가져온 화물을 내려놓을 겁니다.”
“잘됐군. 그럴 필요 없이 이번에는 화물선을 직접 미스라타로 끌고 갈 테니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해 놔.”
“화물을 그대로 배에 싣고 미스라타로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화들짝 놀란 함담이 되묻자 그는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위험합니다.”
민병대가 치안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가운데 수시로 가해지는 무장 세력의 테러에 미스라타는 상당히 불안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통상적인 화물선과 비교해 적재량이 훨씬 적고 운송 비용이 비쌌지만 그걸 감수하고 공기부양정인 포세이돈 함을 이용해서 물자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격에 너무나도 취약한 화물선을 끌고 미스라타로 가겠다고 하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렇겠지.”
“그걸 아시면서 왜?”
이해가 안 된다는 함담의 시선에 그는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보란 듯이 미스라타 항구에 화물선을 정박시켜서 이딴 위협 따위에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는 걸 똑똑히 확인시켜 줄 테야.”
“무슨 생각이신지는 알겠습니다만 그러다가 자칫 무장 세력의 공격에 화물선이 피격당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함단이 우려를 나타냈으나 혁권은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바로 사방에서 달려들어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마는 거야. 놈들이 내 목숨을 노리고 습격을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그건 스스로 나약함을 드러내는 꼴이 될 거야.”
말을 하는 혁권의 두 눈에서 서늘한 살기가 일렁거렸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당한 걸 그대로 되갚아 줘야 돼!”
“그럼 차라리 다른 방법을 쓰시는 것이…….”
정색을 하며 혁권이 함단을 봤다.
“똑같이 척살 명령을 내린 놈에게 킬러라도 보낼까?”
“그건…….”
CIA도 못하고 있는 일을 그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놈들한테 가장 큰 타격을 주는 것이 바로 이거야. 내 말 뜻을 알겠어.”
“…….”
결심이 확고한 데다 보복을 해 줘야 된다는 건 같은 생각이었기에 함단도 더 이상 만류를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작업을 취소하고 미스라타로 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끝마치도록 해.”
“예.”
혁권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단호한 눈빛으로 가만히 대답을 듣곤 다시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혁권은 시내에 위치한 병원으로 하킴을 보러 갔다.
또다시 습격이 있을 것을 우려한 함담은, 직접 부하 네 명과 함께 혁권을 따라다니면서 밀착 경호를 했다.
평상시라면 우르르 부하들을 데리고 다니는 걸 싫어했겠지만 상황이 안 좋은 만큼 함단이 하는 대로 그냥 놔뒀다.
“몸은 좀 어때?”
금이 간 갈비뼈가 빨리 아물게 몸통에 보조 장치를 찬 하킴이 병실 침대에 앉은 채 갑갑한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은데 이딴 걸 채우고 꼼짝 못하게 하니 너무 답답합니다.”
걱정과 달리 멀쩡해 보이는 모습에 그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의사 말 못 들었어. 갈비뼈가 세 개나 금이 갔다는 거?”
“그 정도는 붕대만 좀 감아 놓으면 금방 낮습니다.”
“네가 의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치료나 받아.”
그가 정색을 하며 말하자 하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면서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필요하실 때 옆에 못 있어서 죄송합니다.”
“이미 제 몫을 다 했으니까 그런 이야기 하지 마.”
“그래도…….”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하킴이 말끝을 흐리자 혁권은 고개를 저으면서 단호하게 이야기를 했다.
“잊었어? 어젯밤 네가 마지막 순간에 적을 처치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 여기 서 있지 못했을 거야. 내 목숨을 살렸단 말이야.”
“보스…….”
“아무 생각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푹 쉬고, 몸을 다 회복하면 다시 날 지켜 줘야지. 안 그래?”
웃으며 혁권이 쳐다보자 하킴은 감격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때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간호사와 함께 병실로 들어왔다.
간단히 혈압과 체온을 확인한 의사는 하킴을 보며 영어로 물었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는 건 없지요?”
“네.”
대답을 들은 의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서 있는 혁권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더 악화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 치료를 잘 받는다면 한 달 정도 후에는 정상적인 활동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우려했던 것과 달리 의사가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자 그는 반색을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진통제 주사를 한 대 처방해 드릴 테니까…… 맞도록 하십시오.”
“예.”
“그런데 꼭 이렇게 급히 환자를 옮겨야 되겠습니까? 차로 가는 것도 아니고 비행기를 타는 건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습니다.”
당장 급한 치료가 끝나자 만약을 대비해서 하킴을 아테네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해 가기로 했다.
의사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환자한테 안 좋다는 걸 알았지만 잘못하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기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경찰 쪽에 손을 써서 어젯밤 있었던 일을 무마시키는 중이더라도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야 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이것 참.”
난감한 표정을 짓던 의사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신 이송 중에 다친 부위가 악화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셔야 될 겁니다.”
“염려 마십시오.”
하킴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그는 따로 돈을 주고 병원 간호사 한 명을 아테네까지 동행하도록 했다.
혁권이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간호사가 준비해 온 진통제 주사를 하킴의 팔에 놔 줬다.
그 외에도 혹시나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을까 몇 가지 약을 더 처방했다.
“조금 있다가 구급차를 타러 내려갈 테니 준비를 하고 있으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의사가 나가자 그는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하나 꺼내 하킴한테 내밀었다.
“받아.”
“이게 뭡니까?”
“휴가비야.”
“예?”
의아한 얼굴로 눈을 껌뻑이는 하킴의 손에 봉투를 쥐어 주면서 그가 말했다.
“이걸로 그동안 함께해 주지 못했던 가족들한테 맛있는 것도 사 주고 푹 쉬도록 해.”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성의니까, 그냥 받아.”
“하지만…….”
“이런 걸로 피곤하게 할 거야.”
그가 정색을 하자 하킴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봉투를 받았다.
“잘 쓰겠습니다.”
“그래.”
그가 준 봉투에는 2만 유로가 들어 있었는데 한화로 2천만 원이 훌쩍 넘는 액수였다.
목숨을 구해 준 것에 비하면 더 많은 돈을 줘도 전혀 아깝지 않았으나, 그러면 하킴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적당한 금액을 넣은 거였다.
혁권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병실에 있다가 하킴이 공항으로 가기 위해 구급차를 타는 것까지 지켜보다가 병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