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91
191
태일그룹 입장에서는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여론 악화로 계획했던 것이 틀어지기는 했지만 검찰도 이쪽 사정을 봐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검찰이 강경한 태도로 나오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허둥거리는 사이에 법원에서 영장 신청을 받아들여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던 김인철이 그대로 구속되어 구치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구속이 결정되고 얼마 있지 않아 호출을 받은 이근홍 변호사는 본사 회장실로 들어섰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박상빈 비서실장과 소파에 앉아 있던 김종원 회장은 그를 보자마자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자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이근홍 변호사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머리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지금 그딴 말로 해결될 상황이야! 앙!”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이만저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회장님, 일단 앉으라 하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으시지요.”
옆에 있던 박상빈 실장의 말에 김종원 회장이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앉아.”
박상빈 실장이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는 사이에 이근홍 변호사는 조심스럽게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가며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뱉자 김종원 회장은 흥분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여태까지 이야기한 것과 다르잖아! 검찰이 왜 이러는 거야?”
“아무래도 여론 때문에…….”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김종원 회장이 소파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리쳤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설사 그렇다고 해도 대충 면피식으로 수사를 하는 분위기가 아니잖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근홍 변호사를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며 김종원 회장이 말을 이었다.
“오 지검장과 연락을 해 봤나?”
“그게 구속영장이 신청된 이후부터 전화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대번에 김종원 회장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아주 작정을 했구먼.”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는 건 태일그룹하고 등을 돌리기로 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주는 대로 넙죽넙죽 다 받아 놓고 이제 와서 뒤통수를 때리다니…….”
분통을 터트리는 김종원 회장의 모습에 이근홍 변호사가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저, 미처 말씀을 드리지 못했는데…… 지난번에 줬던 돈 가방을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왜 그걸 이제야 이야기를 해!”
“갑자기 상황이 급변하는 통에 경황이 없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이근홍 변호사를 보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찬 김종원 회장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박 실장.”
“말씀하십시오.”
“왕 수석과 약속을 잡도록 해.”
“청와대의 도움을 받으시려는 겁니까?”
뒤로 몸을 기대면서 김종원 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검찰이 저렇게 미쳐 날뛰는데 정리할 수 있는 곳은 청와대뿐이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왕 수석을 만날 걸 그랬어.”
상대가 가진 힘이 클수록 그만큼 요구하는 것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검찰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주머니에 넣어 뒀던 패를 꺼내들어야만 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실 직원 한 명이 사색이 된 채 안으로 들어왔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야?”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김종원 회장이 콧잔등을 찡그리자, 눈치를 보며 박상빈 실장이 얼른 질책하듯 물었다.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해 봐.”
“미국 세무 당국이 태일물산의 미주 지사에 특별 감사를 나왔다고 합니다.”
화들짝 놀란 김종원 회장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정말이야!”
“예. 방금 태일물산에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한국도 그렇지만 기업 입장에서 세무조사만큼 두려운 것이 없었다.
특히나 미국은 한국처럼 뇌물을 주고 적당히 일을 무마시키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잘못이 발각되면 추징금 또한 어마어마하게 나오기 때문에 타격이 상상 이상이었다.
“갑자기 왜!”
“그게…….”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비서실 직원이 머뭇거리자 김종원 회장이 짜증을 내며 다그쳤다.
“뭘 우물쭈물하는 거야!”
“아, 아닙니다.”
“세무조사를 나온 이유가 뭐야?”
“탈세와 비정상적인 물품 거래를 확인하는 거라고 합니다.”
“이런 젠장!”
김종원 회장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그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박상빈 실장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태일물산 미주 지사는 그룹 간에 이루어지는 내부 거래에서 물품 가격을 의도적으로 부풀리거나 불필요한 중간 단계를 끼워 넣어서 차액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하는 중요 창구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런 사실이 세무조사 과정에서 드러난다면 추징금이 문제가 아니라 그룹 비자금 문제로 상황이 번질 수도 있었다.
가뜩이나 오너 일가인 김인철이 연루된 사건으로 여론이 안 좋은 상황에서 비자금 문제까지 불거진다면 치명타였다.
“미치겠군. 일을 뭐 이따위로 하는 거야!”
“자칫 국제 무역 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데도 불구하고 미국 세무 당국이 움직였다는 건 뭔가 확실한 증거를 포착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박상빈 실장의 이야기에 김종원 회장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쩌다가 비밀이 새어 나간 거야!”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선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서둘러 문제를 수습해야 됩니다.”
“누가 그걸 몰라!”
버럭 짜증을 낸 김종원 회장은 한쪽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크리스털 재떨이에 거칠게 비벼 끄곤 말했다.
“세무조사를 무마시킬 수 있겠나?”
“좀 더 확실히 상황을 파악해 봐야겠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멍하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잖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
“예.”
대답은 했지만 박상빈 실장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그리고 당장 최 사장 들어오라고 해.”
그러자 빠져나갈 기회만 보고 있던 비서실 직원이 재빨리 대답하곤 밖으로 나갔다.
잠시 동안 찾아든 정적에 다들 숨을 죽이고 있을 무렵, 박상빈 실장이 침묵을 깨고 회장에게 말을 걸었다.
“저, 회장님.”
“왜?”
그는 대꾸하는 것도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건성으로 답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서 하나라도 일을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고개를 돌린 김종원 회장이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묻자 박상빈 실장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막내 도련님 일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솔직히 비자금 사건이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데 다른 문제까지 떠안고 가기에는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시겠지만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마음으로 막내 도련님 일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으음.”
세무조사 이야기를 듣기 전이었다면 버럭 화를 냈을 테지만, 김종원 회장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기에 낮게 침음성만 삼켰다.
“압류가 걸린 태일리조트 주식은 어떻게 하고?”
아들인 김인철의 안위보다 그룹 지배 구조의 핵심 연결 고리인 태일리조트 주식의 향방이 더 중요했다.
“어차피 저들이 원하는 건 횡령과 배임으로 발생한 피해를 보상받는 거니까, 그걸 갚아 주기만 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입니다.”
“요구하는 액수가 얼마라고 했지?”
“510억 원입니다.”
김종원 회장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뭐가 그렇게 많아!”
“막내 도련님이 욕심을 좀 부리신 것 같습니다.”
“그 돈은 다 어디다 써 버린 거야!”
“막판에 주가가 엉망이 되면서 그걸 만회하려다가 다 잃고 만 것 같습니다.”
“멍청한 놈.”
미련을 못 버리고 덤벼들다가 자신이 판 함정에 스스로 걸려들다니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민사 재판으로 가면 승산이 얼마나 있을 것 같나?”
시선을 받은 이근홍 변호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부정적인 대답을 내놨다.
“워낙 결정적인 증거들이 많은 데다 형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나와 버린다면 이기기 어려울 겁니다.”
“정말 실망스럽군. 1년에 수억씩 연봉을 받아 가면서 법무 팀의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나!”
“죄송합니다.”
“자넨 그 말밖에 못 해!”
팔걸이를 크게 내리치는 소리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어깨도 덩달아 움찔거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근홍 변호사가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 나름 엘리트라 자부하는 그였기에 이렇게 대놓고 질책을 당하는 것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사실 이근홍 변호사도 할 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사고를 쳐도 어느 정도여야지, 이건 아예 손을 쓰기 어려울 정도로 증거를 여기저기 남겨 놓는 통에 사건을 무마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무능력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니 억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차마 불만을 드러내지 못하고 안으로 꾹 삼켰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김종원 회장은 전혀 관심 없는 얼굴로 인상을 쓰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합의를 한다고 해도 형사 처분은 피할 수 없겠지?”
“다른 혐의들이 남아 있기에 실형을 각오하셔야 될 겁니다. 특히 외화 밀반출은 10억이 훌쩍 넘어 가중처벌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끄으응.”
작게 앓는 소리를 내뱉은 김종원 회장은 이내 냉정한 목소리로 결정을 내렸다.
“그놈 하나 때문에 그룹 전체를 위태롭게 만들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상대편하고 만나서 합의를 하도록 해.”
“예.”
“그리고 박 실장.”
“네.”
“일이 다 마무리되면 막내 놈 명의로 되어 있는 태일리조트 주식을 전부 다 거둬들이도록 해.”
“회장님.”
박상빈 실장이 놀란 시선으로 쳐다봤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룹 지배 구조의 핵심 고리인 태일리조트 주식을 회수한다는 건 후계 구도에서 김인철을 배제시킨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김종원 회장은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놈한테 맡겨 두면 또 무슨 사고를 저지를지 어떻게 알아!”
맞는 말이었다.
TC인터내셔널이 제기한 민사소송을 해결한다고 해서 난관이 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주가조작 사건으로 큰 피해를 본 수많은 개미 투자자들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이 똑같이 김인철 명의로 되어 있는 태일리조트 주식에 압류를 건다면 일이 아주 골치 아파질 수밖에 없었다.
그걸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아예 주식을 회수해 버리는 것이 나았다.
물론 김인철이 반발하겠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수긍을 한 박상빈 실장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자 김종원 회장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나중에라도 뒷말이 나오지 않게 확실히 마무리 짓도록 해.”
“예.”
그는 피곤한 듯 이마에 깊은 주름을 새긴 채 뒤의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다들 나가 봐.”
김종원 회장의 축객령이 떨어지자 박상빈 실장과 이근홍 변호사가 동시에 일어나 인사하곤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