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98
198
상체를 바로 한 혁권은 최오철 사장을 마주 바라보며 생각해 둔 액수를 이야기했다.
“4억 8천만 달러 정도면 적당할 것 같군요.”
그러자 KAI 측 인사들이 크게 술렁였다.
단번에 TA-50 한 대 값을 깎으려고 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최오철 사장 역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는 가운데 주동민 전무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2천만 달러나 낮춰 달라니 너무 무리한 말씀입니다.”
“그 정도 네고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고가의 정밀 전자 장비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가격 조정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꼭 그 가격에 하셔야 되겠다면 일부 장비를 제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기체 성능이 크게 떨어지지 않습니까?”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방식이 아니라면 말씀하신 액수를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혁군이 짐짓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최오철 사장이 다시금 중재에 나섰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기체는 그대로 두고 예비 부품 수량을 줄이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거지요?”
“엔진 같은 경우에 고장이 날 확률이 낮고 16대 기준으로 정비 소요를 고려한다고 해도, 4기 정도면 충분하니 3기를 빼는 겁니다. 그것만 해도 1천만 달러가 조금 넘는 돈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흐음.”
괜찮은 생각이었다.
어차피 엔진이 하나만 달린 단발 항공기니까 4기만 있어도 문제 될 것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걸리는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바로 이집트 공군이 요구한 조건에 예비 엔진 개수가 7기로 못 박혀 있는 거였다.
여기서 당장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였기에 잠시 고심을 하던 혁권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대신 이것 하나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경쟁 기종에 비해 T-50 기종이 조금 비쌀지는 몰라도 성능 하나만은 저희 KAI 모든 임직원들의 이름을 걸고 최고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최오철 사장이 T-50 계열 항공기에 대해 얼마나 큰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참고하겠습니다.”
앞에 놓인 서류를 몇 장 넘기면서 혁권은 가격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을 이야기했다.
“만약 주문을 한다면 기체 납품은 언제까지 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주동민 전무가 대답했다.
“계약 내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한국 공군에 공급되는 기본형 TA-50 기체를 기준으로 했을 때, 24개월 뒤에 첫 기체를 인도받을 수 있을 겁니다.”
“2년이라…… 상당히 오래 걸리는군요.”
“부품을 주문하고 조립한 뒤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테스트하는 과정까지 생각한다면 그리 긴 것도 아닙니다.”
항공기는 공장에서 마구 찍어 내는 대량 생산품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문에 의해 만들어지고 아주 정밀한 기술이 필요했기에 제작하는 데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집트 사정이 그리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이해는 합니다만 저희는 빠른 배치를 원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비행기를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동민 전무가 난색을 표시하자 혁권이 슬쩍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물론 그렇겠지요. 해서 하는 이야기인데 저희 쪽 주문 사양과 한국 공군에 공급되는 TA-50 기종이 거의 동일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한국 공군에 납품될 물량 가운데 일부를 먼저 저희 쪽으로 돌려주시면 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그건…….”
혁권의 제안에 주동민 전무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최오철 사장을 돌아봤다.
그러자 최오철 사장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정부와 계약이 되어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저희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러나 T-50 판매는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일인 만큼 정부에 양해를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혁권의 말대로 항공 사업은 정부에서 집중 육성하는 부분인 데다 T-50의 개발에 상당한 지분까지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조율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국방부와 이야기를 해 봐야 됩니다.”
“16대 전부는 힘들더라도 4대 정도는 12개월 안에 인도를 받았으면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해 주신다면 이번 계약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무조건 상대를 쪼아 대는 것이 아니라 이쯤에서 슬쩍 당근을 하나 던지자 한참 고심을 하던 최오철 사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한번 협의를 해 보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혁권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이런 큰 계약을 한 번에 체결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 큰 틀에서 원하는 걸 확인하는 선에서 첫날 만남을 끝마쳤다.
이튿날 사천 시내에 위치한 호메로스 호텔 현관 앞에 멈춰 선 밴에서 혁권과 알아바디가 내렸다.
오늘은 원래 TA-50 고등 훈련기를 직접 타 보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침부터 날씨가 흐려 다음으로 미루고 일찍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괜히 헛걸음을 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연신 사과를 하는 임태우 부장의 말에 그는 괜찮다는 듯 한쪽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날씨가 이런 걸 어떡하겠습니까. 그것보다 내일은 이집트 공군 관계자들이 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차질이 없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계약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위임했지만 TA-50이 도입되면 실제로 사용할 이집트 공군이 기체를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시찰단이 파견됐다.
“이미 숙소는 물론이고 세부 일정을 다 짜 놨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슬람교에서 금하는 것들이 있으니 음식에 특히 신경을 써야 될 겁니다.”
“안 그래도 따로 이슬람 음식을 할 줄 아는 요리사를 구해 놨습니다.”
“그럼 걱정을 안 해도 되겠군요.”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피곤하다는 말로 식사라도 대접하겠다는 임태우 부장을 떼어 내고는 알아바디와 객실이 있는 4층으로 올라갔다.
띵.
벨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붉은색 카펫이 깔린 복도로 나왔다.
제일 안쪽에 묵고 있는 객실이 있었기에 천천히 걸음을 옮긴 혁권은, 문 앞에 도착해 열쇠를 꺼내려는 알아바디를 제지했다.
“왜 그러십…….”
그를 돌아보던 알아바디는 혁권이 얼굴을 굳힌 채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있자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혁권이 턱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자 나올 때 몰래 문에 붙여 둔 스카치테이프가 살짝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청소는 안 해도 된다고 프런트에 말해 뒀으니 누군가 몰래 객실에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단번에 상황을 눈치챈 알아바디가 어떻게 할지 눈빛으로 묻자 그는 주머니에서 너클을 꺼내 오른쪽 주먹에 끼웠다.
그러자 알아바디도 발목에 차고 있던 군용 대검을 빼 들었다.
권총이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한국은 총기 소지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국가였기에 다른 무기를 가지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군용 대검이나 너클이 위력적이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너클 같은 경우에는 단단한 쇠파이프로 힘껏 상대를 후려치는 것과 동일한 충격을 줄 수 있고, 군용 대검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무기였다.
짧게 심호흡을 한 혁권은 손잡이를 잡아 돌리면서 문을 확 밀었다.
역시 예상대로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혁권이 그대로 객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알아바디가 뒤를 따랐다.
순간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서랍을 뒤지고 있다가 막 문 쪽을 돌아보는 사내가 보였는데 바로 북한 공작원인 차정태였다.
“이런 썅!”
욕설을 내뱉으며 차정태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 들었는데 바로 권총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혁권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몸을 날리면서 손에 낀 너클을 꽉 움켜쥐곤 있는 힘껏 휘둘렀다.
퍼억!
“크윽.”
강한 충격에 차정태는 억눌린 신음을 토해 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혁권은 벽에 몸이 부딪친 상대의 한쪽 팔목을 붙잡고는 무릎에 세게 내려쳤다.
그러자 고통을 이기지 못한 차정태가 손에 쥔 권총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상대도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 간나 새끼!”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뒤로 젖힌 머리를 그대로 혁권의 얼굴에 들이받았다.
빠각.
별이 번쩍이며 혁권이 몸을 휘청거리자 차정태가 어깨로 그를 들이받았다.
와장창.
탁자와 함께 바닥에 넘어지자 차정태가 위에 올라탄 채 체중을 실어 팔뚝으로 그의 목을 눌렀다.
“끄으으.”
양쪽 무릎에 두 팔이 제압당한 혁권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때 무의식적으로 바닥을 더듬던 그의 손에 아까 탁자 넘어지면서 깨진 도자기 파편이 만져졌다.
그걸 움켜진 혁권은 필사적으로 팔을 누르고 있는 차정태의 허벅지에 쑤셔 박았다.
푹.
“아악!”
날카로운 도자기 파편이 살을 파고 들어가자 차정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힘을 짜내 상대를 밀쳐 낸 혁권은 한쪽에 놓인 스탠드 등을 집어 상대의 머리에 내려쳤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탠드 등이 박살 나자 그는 재차 너클을 낀 주먹을 휘둘렀다.
고개가 옆으로 휘청 돌라간 차정태는 정신을 잃고 무너지듯 앞으로 털썩 고꾸라졌다.
“헉헉.”
어렵게 상대를 제압한 혁권이 거칠게 호흡을 내뱉으며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날카로운 총성이 방 안을 가득 울렸다.
타탕!
움찔하며 황급히 몸을 돌리자 침실로 들어갔던 알아바디가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알아바디!”
눈을 부릅뜨며 소리치자 알아바디를 쏜 심정열이 총구를 돌려 혁권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얼른 몸을 숙이자 벽에 걸려 있던 거울이 산산조각 났다.
탕탕!
바닥에 몸을 굴리며 소파 뒤로 피한 혁권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국에서 그것도 대낮에 권총을 쏘다니 이건 전혀 계산 밖이었다.
제아무리 날고뛰어도 총 앞에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머리를 굴릴 때 아까 차정태가 떨어뜨린 권총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는 순간 혁권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총탄이 날아와 섬뜩한 소리를 내며 혁권이 지나간 자리에 박혔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권총을 집어 든 혁권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 방아쇠를 당겼다.
2개의 총성이 연달아 울리면서 혁권은 뭔가 뜨거운 것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통증을 느꼈다.
당장 비명을 내지르며 상처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끝이라는 걸 알았기에 이를 악문 채 탄창이 모두 빌 때까지 권총을 쏴 댔다.
그러자 언제 맞았는지 어깨에 피가 흥건히 묻은 심정열이 뒤편에 있는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유리가 박살이 나면서 심정열이 밖으로 뛰어내리자 그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뛰어갔다.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자 주차되어 있던 승용차 지붕으로 떨어져 충격을 완화시킨 심정열이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달아나고 있었다.
이대로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던 혁권은 놈을 향해 권총을 쐈다.
하지만 총성 대신 빈 쇳소리만 났다.
철컥. 철컥.
방금 전 서로 총질을 해 댈 때 탄창이 다 비어 버린 거였다.
“젠장!”
주먹으로 창틀을 세게 내려친 혁권은 도망치는 심정열을 노려보면서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