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
2
“오늘 고마웠다.”
“됐어.”
그러면서도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눈 유기백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몸조심하고.”
미소로 마지막 말을 대신한 혁권은 몸을 돌려 출국 심사대로 걸어갔다.
트리폴리Tripoli는 아프리카의 석유 부국인 리비아의 수도로 한국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석유를 통해 쌓아올린 부富를 기반으로 화려한 쇼핑센터와 호텔 등 현대적인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고 에너지를 비롯한 여러 사업 분야에 진출하는 외국 기업들로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몇 년 전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그 모든 것들이 다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지난 수십 년간 독재를 펼친 카다피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내면서 혁명이 성공하는 것 같았으나 이내 내전 과정에서 생겨난 수십 개의 무장 단체들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자기들만의 세력을 구축하고 싸움을 벌이면서 다시 끝없는 분쟁의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런지 시내 중심가에서 34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트리폴리 국제공항은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 항공 여객기에서 내린 혁권의 눈에 제일 처음 들어온 것은 포격에 반쯤 무너져 내린 터미널 건물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혁권은 자신이 내전 중인 나라 한가운데 도착했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바짝 긴장한 얼굴로 짐을 챙겨 들고 트랩Trap을 내려간 그는 다른 승객들과 섞여 24인승 미니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는 활주로를 벗어났다.
그나마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공항 청사로 들어가자 권총과 AK 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곳곳에 서서 살벌한 분위기를 풍겼다.
방금 전까지 문명 세계에 있다가 한순간 황량한 무법 지대 한가운데 내던져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종일은 사람들을 따라 입국 심사대 앞에 줄을 섰다.
위험한 리비아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금방 그의 차례가 됐다.
심사대 앞으로 간 혁권은 군복을 입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사내에게 여권을 내밀었다.
여권을 받아 들고는 건성으로 내용을 살핀 사내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투박한 영어로 질문을 던졌다.
“방문 목적이 뭐요?”
“사업차 왔습니다.”
비즈니스라는 단어에 사내는 관심을 보이며 그를 자세히 쳐다봤다.
“무슨 사업을 하고 있소?”
혁권은 지갑에서 영어로 된 명함을 꺼내 건네줬다.
그러자 카다피 시절부터 한국 기업들이 진출해 활약한 나라답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상사원이었구먼. 전쟁으로 부족한 것이 많으니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트리폴리에 온 걸 환영하오.”
누런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은 사내는 그의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었다.
쿵.
2개나 되는 여행용 가방을 끌고 밖으로 나오자 노타이 차림에 동양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 서울에서 온 김혁권 씨 아니오?”
“맞습니다.”
“반갑소. 한상주 과장이오.”
“아, 지사장님.”
혁권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앞에 선 한상주 과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혼자뿐인 지사에 지사장은 무슨…… 짐은 그거뿐인가?”
“예.”
힐끔 그가 가지고 있는 짐들을 쳐다본 한상주 과장은 바퀴가 달린 여행용 가방을 하나 집어 들며 말했다.
“어두워지면 더 위험해지니까 남은 이야기는 숙소에 들어가서 하지.”
“네.”
앞선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혁권은 벌써 저만치 걸어간 한상주 과장을 허겁지겁 쫓아갔다.
공항 청사를 나서자 뜨겁게 내려쬐는 햇볕 아래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로 후끈한 공기가 그를 사정없이 덮쳐 왔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흘러내린 땀으로 옷이 축축하게 젖은 가운데 주차장 한쪽에 서 있는 사륜구동 차량 앞에 멈춰 섰다.
“인사해. 이쪽은 경호원인 자말이야.”
옆을 보자 건장한 덩치에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은 사내가 그를 보고 먼저 약간 어색한 영어로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자말입니다.”
“김혁권이라고 합니다.”
“짐은 저한테 주시죠.”
“아. 네.”
짐을 받아 트렁크에 실는 자말의 허리에 달린 진짜 권총을 보고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걸 본 한상주 과장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진지하게 말했다.
“얼마나 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
“여긴 하루에도 몇 번씩 테러가 발생하고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살벌한 곳이야. 그러니까 살아서 돌아가고 싶으면 절대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어딜 가든 경호원을 대동하도록 해. 알겠어?”
“예.”
“좋아. 그럼 가자고.”
잔뜩 겁을 준 한상주 과장은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땀에 젖은 목을 닦아 내며 차 문을 열었다.
“오늘따라 더 더운 것 같군.”
“미스터 김도 타십시오.”
어정쩡하게 서 있던 혁권은 트렁크를 닫은 자심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차에 탔다.
부우우웅.
세 사람이 탄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와 이내 시내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열기를 식혀 주자 혁권은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조금 생겼다.
도로 양옆으로 보이는 트리폴리 시가지는 너무나도 상반된 모습을 그에게 보여 줬다.
전투 중에 파괴돼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채 그대로 방치된 건물들 옆에 태연하게 상인들이 좌판을 펼치고는 지나가는 행인과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AK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지나가는 장면에 혁권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복잡한 도로를 달려 차가 도착한 곳은 시내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한 코린시아 호텔이었다.
최고급 오성호텔로 아름다운 지중해를 옆에 끼고 야외 수영장과 식당, 카페 등 각종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삭막한 시가지를 보다가 갑자기 별천지에 도착한 혁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화려한 호텔 건물을 쳐다봤다.
“뭐 해? 어서 내려.”
“네.”
혁권이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어느새 트렁크에서 짐 가방을 꺼낸 자말이 차를 몰고 사라졌다.
“따라와.”
가방을 끌고 로비로 들어가자 각양각색의 피부색을 가진 외국인들이 북적였는데 간간이 그와 같은 동양인들도 섞여 있었다.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두 사람은 10층에서 내려 1051호라고 적혀진 객실로 들어갔다.
“자, 여기가 앞으로 자네가 머물 숙소이자 사무실이야.”
문 앞에 서서 방을 둘러보던 혁권은 마지막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니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하나 꺼내 손에 든 한상주 과장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말 그대로야. 따로 아침마다 귀찮게 출근할 필요 없이 여기서 업무를 다 보면 되니 좋잖아.”
“그럼 따로 지사 사무실이 없는 겁니까?”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혁권과 달리 한상주 과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캔 맥주 뚜껑을 따고는 한 모금 마셨다.
“지사 직원이라고 해 봤자. 달랑 혼자뿐인데 사무실은 무슨…… 그리고 여기서 제일 싼 방이지만 한 달 숙박료가 3천 달러나 되거든.”
“그러면 다른 곳에 숙소를 잡으면 되지 않습니까?”
“다른 곳 어디?”
“잘은 모르지만 찾아보면 여기보다 저렴한 곳이…….”
시선을 든 한상수 과장이 앞에 선 혁권은 쳐다보며 짜증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
“누군 여기가 좋아서 있는 줄 알아. 대낮에 폭탄이 터지고 무장 단체들끼리 총질을 해 대는 건 물론이고 외국인이라고 하면 납치해 몸값을 챙기려고 눈에 불을 켠 놈들이 수두룩한데 밖에 나가서 지낸다고? 자살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그 정도로 상황이 안 좋습니까?”
혁권이 얼굴을 굳히며 묻자 작게 한숨을 내쉰 한상수 과장이 턱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일단 앉아.”
“네.”
“맥주 한잔 줄까.”
“제가 꺼내 오겠습니다.”
소파에 앉자 담배를 꺼내 입에 문 한상수 과장이 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윗대가리 실수를 혼자 덤터기 쓰고 왔다면서?”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색을 하며 혁권이 쳐다보자 한상수 과장은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채 피식 웃었다.
“비록 유배지에 처박혀 있는 신세지만 눈과 귀까지 다 잃은 건 아니라고.”
“그렇군요.”
하긴 과장이라는 직급을 그냥 달지는 않았을 테니 본사에 어느 정도 인맥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기에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내 수긍했다.
그런 모습에 한상수 과장은 살짝 의외라는 눈빛으로 혁권을 봤다.
“기분 나쁘지 않나?”
“좋은 건 아니지만 사실이니까요.”
“호오. 좋은 징조군.”
“뭐가 말입니까?”
“미련을 못 버리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으면 여기서 오래 못 버티거든.”
무슨 말인지 대충 이해가 된 혁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까 로비에 외국인들이 북적이는 걸 봤지?”
“네.”
“왜 그런지 아나?”
“그거야. 호텔이니까…….”
“틀렸어.”
“……?”
“여기가 트리폴리에서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라서야. 오면서 봤는지 모르겠지만 중무장한 사설 경비원들은 물론이고 리비아 현지 경찰이 경비 초소를 세워 놓고 호텔을 24시간 지키고 있거든. 그 덕분에 아직 무장 세력의 테러 공격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지.”
“그럼!”
“맞아. 안전이 보장된 곳이니까 더럽게 비싼 방값에도 불구하고 다들 여기서 지내는 거지. 나중에 살펴보면 유엔 직원들은 물론이고 각국에서 온 구호 단체들까지 호텔에 아예 사무실을 차려 놓고 머무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그렇군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한상수 과장은 얼굴이 굳어진 혁권을 힐끔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주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야. 최고급 호텔인 만큼 웬만한 편의 시설은 다 있는 데다 무엇보다 공공기관과 구매력 있는 인사들이 같이 있으니 이 안에서 비즈니스가 이루어지기도 하거든.”
한상수 과장은 어느새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아무튼 밖에서 아무리 지지고 볶으며 싸워도 여기에 있으면 최소한 안전하니까 다른 곳에 나갈 생각을 하지 마.”
“그러면 영업은 어떻게 합니까?”
“어차피 위에서도 실적 같은 건 안 바라. 진즉에 철수해야 됐지만 너나 나 같은 골칫덩어리들을 처리하는 용도로 놔둔 거라고. 한마디로 여긴 유배지란 말이야. 알아들어.”
가슴을 쿡쿡 찌르는 말에 혁권은 순간 울컥하면서도 그게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2년만 버텨. 아님 일찍 짐을 싸서 돌아가든가.”
냉소적인 한상수 과장의 말에 혁권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직 시차가 적응이 안 된다가 맥주를 다섯 캔이나 먹고 잔 혁권은 다음 날 정오가 가까워져서야 눈을 떴다.
“이런!”
머리맡에 놔둔 손목시계를 확인한 혁권이 낭패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을 때 반팔 셔츠 차림의 한상수 과장이 욕실에서 나왔다.
“일어났어?”
“죄송합니다.”
“뭐가?”
“늦잠을 자서…….”
피식 웃은 한상수 과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됐고. 씻고 옷이나 갈아입어. 허울뿐인 지사지만 그래도 인수인계는 해야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