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0
20
6층과 함께 호텔 투숙객들을 위한 편의 시설이 들어선 곳으로 라운지를 가운데 두고 헬스장과 사우나 등이 있었다.
하지만 내전이 터지면서 일반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기는 바람에 7층 이용객도 줄어들어 지금은 시설들이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 때문인지 천장에 설치된 전등이 모두 꺼져 있어 왼편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아니면 사물을 잘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거기다 이런저런 비품과 공사 자재 들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된 채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움직이기 불편했지만 테러범들의 눈을 피해 숨어야 되는 입장에서는 최고의 은신처였다.
“저쪽으로 가면 쉴 수 있는 장소가 있어요.”
싸미라의 말에 혁권은 자말과 함께 AK 소총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는 어둠 속을 조금씩 전진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테러범들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 나올지 몰랐기에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라운지를 가로질러 영어로 사우나라고 적힌 곳에 들어가자 싸미라는 왼편에 위치한 방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양쪽 벽에 철제 캐비닛들이 들어차 있는 것이 탈의실로 보였다.
가운데 커다란 원형 탁자가 2개 있었고 의자도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예전 사우나 탈의실인데 지금은 호텔 여직원들이 가끔씩 와서 쉬는 용도로 쓰고 있어요.”
“호텔에 이런 곳이 있었군.”
총구를 아래로 내린 혁권은 신기한 시선으로 탈의실 안을 둘러봤다.
어느새 안정을 많이 찾았는지 싸미라가 한쪽 벽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기가 들어오는데 불을 켤까요?”
그러자 옆에 있던 자말이 정색을 하며 그녀를 제지했다.
“테러범들이 불빛을 보고 올 수도 있으니 그대로 놔두시오.”
“……예.”
번들거리는 눈빛에 찔끔한 싸미라는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혁권이 일부러 밝은 어투로 자말을 보면서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당분간 숨어 있기에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나쁘지 않군요.”
“좋아. 그럼 여기서 쉬자고.”
가볍게 자말의 어깨를 두드려 준 혁권은 몸을 돌려 지친 얼굴로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들을 봤다.
“다들 편하게 앉아서 쉬어요. 대신 절대 시끄럽게 떠들거나 소란을 피우면 안 됩니다.”
바보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혁권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각자 편한 자리를 찾아 앉거나 왼편 구석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벽에 등을 기대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혁권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가 이내 다시 집어넣었다.
“이대로 조금만 버티면 정부군이 놈들을 소탕하겠지.”
“그렇겠지요.”
떨떠름한 대답에 혁권은 살짝 미간을 모으면서 자말을 봤다.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정부군이 즉각 움직일 거라는 걸 알고서도 놈들이 이렇게 태평한 것이 수상합니다.”
“그거야 호텔에 있는 외국인과 정부 관리 들을 인질로 삼으면 함부로 못 건드린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혁권과 달리 자말은 좀처럼 굳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럼 다행이지만 제가 테러범들의 우두머리라면 다른 방법을 쓸 겁니다.”
“어떻게 말이야?”
“인질들을 몽땅 다 로비에 모아 놓고 있다가 정부군이 진압에 나서는 순간 자폭을 해 버리는 거지요.”
“폭탄을 터트리면 자신들도 함께 죽는 건데.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자살 폭탄 테러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놈들인데 이것도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못할 이유가 없지요. 거기다 CNN 같은 외국 언론사들이 현장을 실시간으로 방송하고 있을 테니 효과가 더 크지 않겠습니까?”
“……!”
혁권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말의 이야기대로 테러범들이 폭탄을 터트린다면 이렇게 숨어 있는다고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그럴지도 모른다는 짐작일 뿐이지,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놈들이 로비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당장 호텔을 빠져나가기도 어렵지 않습니까?”
“끄으응.”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그가 얼굴을 구기자 자말이 품속에서 테러범들이 쓰던 무전기를 꺼내 들고는 말을 이었다.
“한숨 돌리면서 놈들이 뭘 꾸미고 있는지 알아본 다음에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겁니다.”
“좋아.”
무전기를 쳐다보던 혁권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한편 순식간에 호텔을 장악한 테러범들은 출입구를 완전히 틀어막은 채 인질들을 붙잡아 로비 한쪽에 모아 두고 있었다.
“흑흑.”
“조용히 안 해!”
여자들이 훌쩍대는 소리에 짜증이 난 테러범 중 하나가 총구를 들이대며 소리쳤다.
“히익. 끄읍.”
깜짝 놀라 딸꾹질까지 터져 나오자 손으로 입을 막고 겨우겨우 눌러 참는 꼴을 보고 테러범은 그제야 겨눴던 총구를 치웠다.
그러던 중에 한쪽에선 다른 동료들이 호텔 곳곳을 들쑤셔 숨어 있던 사람들을 찾아내 끌고 오는 광경이 이어졌다.
“자, 잠깐만!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 나 좀 풀어 주시오.”
이미 한 방 얻어맞은 모양인지 얼굴에 말라붙은 코피 자국이 역력한 백인 사내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테러범은 쯧, 하고 혀를 차고선 개머리판으로 사내의 관자놀이를 퍽 내리쳤다.
축 늘어진 사내의 옷깃을 붙잡고 짐짝 다루듯이 인질들 틈바구니 사이에 내던지자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끄러워!”
“죄, 죄송해요. 흑.”
잔뜩 겁을 먹어 덜덜 떠는 여자의 모습에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들 법하건만, 테러범들은 아무런 감정도 못 느끼는 사람처럼 무감동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광경을 줄곧 지켜보던 한 쌍의 눈동자가 있었으니, 바로 테러범들의 수장인 알 무하마드였다.
아랍 전통 복장을 입고 흔들림 없는 암석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그는 마치 잘 벼려진 하나의 검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마치 한 번도 더럽혀진 적이 없는 것 같은 순백의 천으로 몸을 감싸고, 구릿빛으로 탄 피부는 거친 바람과 사막의 뜨거운 태양의 축복 아래 있는 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한편 이마 위로 살짝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지나 시선을 밑으로 내리면 얼음처럼 냉정하면서도 형형한 눈동자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하마드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스만 폭탄 설치는 어떻게 되고 있나?”
그러자 피부색이 유달리 검은빛을 띠는 사내가 옆에 서 있다가 얼른 대답했다.
“30분이면 다 끝날 겁니다.”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돼.”
“폭탄을 충분히 준비해 왔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함께 사라지겠지만 우리는 알라의 품에서 영생을 얻게 될 것이야.”
“예.”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는 우스만의 눈은 광기로 가득 젖어 있었다.
투숙객과 직원들을 찾아내 로비 한쪽에 몰아넣고 감시하는 가운데 테러범들은 타고 온 차량에서 큼지막한 박스들을 여러 개 호텔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나무 박스를 뜯자 안에는 놀랍게도 곡사포탄이 들어 있었다.
1개만 터져도 사방 수십 미터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기였는데 이런 걸 20개가 넘게 테러범들의 손에 있었다.
“빨리 움직여!”
테러범들은 포탄을 들고 가서 호텔 곳곳에 설치했다.
포탄의 양도 엄청났지만 설치한 위치가 아주 절묘해서 한 번에 폭발시킨다면 그대로 건물 전체가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이것만 봐도 테러범들의 목적이 자말이 우려한 대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인질을 붙잡고 정부와 협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폭사를 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폭탄을 터트리면 테러범들도 살아남기 어려웠지만 이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었다.
테러범들이 호텔을 지옥으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 채 급히 출동한 정부군은 주위를 포위하고 진압에 나설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사우나 탈의실에 몸을 숨긴 혁권은 외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위성 전화기를 꺼냈다.
전원 스위치를 누르자 짧은 전자음과 함께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잠시 기다리자 아까와 달리 안테나 신호가 끝까지 떴다.
혁권은 재빨리 비밀번호를 눌러 보안장치를 해제하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서울 본사에 연락을 취했다.
전화가 연결되고 신호음이 울렸다.
초조한 시간이 흐르고 얼마 있지 않아 반가운 한국말이 들렸다.
-네. 태일물산 영업 1부입니다.
“고복수 씨, 나야.”
-어? 설마 김 대리님이십니까?
“그래.”
-괜찮으십니까? 연락이 안 돼서 엄청 걱정했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어.”
-뉴스를 봤습니다. 머무시는 호텔에 테러가 발생했다면서요?
“그래. 거기 박 과장님 계셔?”
-잠시만요.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박철종 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자네 지금 어딘가?
다짜고짜 묻는 말에 혁권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호텔 안입니다.”
-호텔이라니…… 설마 코린시아 호텔은 아니겠지?
“맞습니다.”
-아니, 어떻게? 거긴 테러범들이 장악했다고 하던데?
박철종 과장이 화들짝 놀라하는 가운데 혁권이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습격이 벌어졌을 때 운 좋게 몸을 피해 숨었지만 호텔에 갇힌 상태입니다.”
-이런.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박철종 과장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혁권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자 참다못한 그가 먼저 이야기를 했다.
“리비아 정부군에 절 포함해 몇몇이 테러범들한테 잡히지 않고 숨어 있다는 걸 알려 주십시오.”
-그, 그러지.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끝내자 아까부터 유심히 그를 보고 있던 모함메드가 영어로 물었다.
“잠시 전화를 빌려 쓸 수 있겠소?”
힐끔 상대를 쳐다본 혁권은 이내 위성 전화기를 내밀었다.
“배터리가 얼마 없으니 짧게 하십시오.”
“알겠소.”
위성 전화기를 건네받은 모함메드는 능숙한 동작으로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들리고 얼마 있지 않아 시끄러운 아랍어가 들렸다.
“나야. 그래. 당장 진압을 하라고 해!”
그동안 아랍어 공부를 했지만 그래도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많았던 혁권은 턱짓으로 모함메드를 가리키면서 작게 물었다.
“진압 어쩌고 하는 게 정부 쪽 고위 인사인가 봐?”
그러자 자말이 바깥을 경계하면서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모르셨습니까? 석유부 장관입니다.”
“그래?”
뜻밖의 거물에 놀란 표정을 짓던 혁권은 이내 그럴 수도 있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안전지대로 트리폴리를 방문한 거의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머물며 이런저런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는 곳이었기에 거물급 정부 인사 한둘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인맥을 만들 기회라고 좋아했겠지만 테러범들을 피해 도망 다녀야 되는 입장이었기에 모함메드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다행히 통화를 길게 끌지 않고 빨리 끝낸 모함메드는 위성 전화기를 돌려주면서 아까와 달리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소이다. 난 이스라 모함메드라고 하오.”
상대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혁권도 자기 이름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