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1
21
“김혁권입니다.”
“일본분이시오?”
외국에 나오면 흔히 받는 오해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아. 그러시구먼. 아까는 정말 고마웠소. 하마터면 놈들한테 험한 꼴을 당할 뻔했소이다.”
마치 상황이 다 끝난 것만 같은 모함메드의 모습에 그는 살짝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아직 그런 말을 듣기에는 이른 것 같군요.”
“이제 곧 진압을 시작할 테니 밑에 있는 테러범들은 걱정하지 마시오.”
혁권은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소이다. 이미 대통령의 진압 명령이 떨어졌다고 하오.”
“테러범들도 대비를 하고 있을 텐데 쉽게 제압이 될까요?”
“그래서 정부에서도 최정예인 아부카 여단을 동원했다고 했으니 문제없을 거요.”
진압 성공을 자신하는 모함메드와 달리 혁권은 이걸 좋아해야 될지 아니면 걱정해야 될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뒤 탈의실 문 쪽에 서서 바깥을 경계하고 있는 자말한테 간 혁권은 낮은 목소리로 의견을 물었다.
“곧 진압 작전이 시작될 거라는데 어떻게 생각해?”
고개를 돌린 자말은 힐끔 모함메드를 보며 대답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트리폴리 한복판에 그것도 외국인들이 다수 머무는 코린시아 호텔에서 테러가 발생하고 인질극까지 벌어지며 사태가 장기화되는 걸 절대 원하지 않을 테니 진압에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테러범들이 호락호락 당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된다는 거군.”
자말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테러(2)
“즉시 진압작전을 시작하라는 지시입니다.”
아부카 여단 지휘관인 후세인 대령은 부관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정면에 위치한 코린시아 호텔을 바라봤다.
서쪽 하늘로 해가 졌지만 아직 환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은 자꾸만 불길한 느낌을 줬다.
“대령님.”
부관이 재차 말을 하자 후세인 대령은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병력 배치는 다 끝났겠지?”
“옛.”
“좋아. 10분 뒤에 작전을 개시하도록.”
“알겠습니다.”
한쪽 손을 들어 경례를 한 부관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자리를 떴고 후세인 대령은 뒷짐을 진 채 테러범들이 장악한 호텔을 노려봤다.
“발사!”
장교의 명령에 병사들이 방아쇠를 당기자 둔탁한 폭음과 함께 최루탄 수십 발이 허공을 가르면서 날아가 호텔 앞마당에 떨어졌다.
푸시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희뿌연 최루가스가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주변을 뒤덮었다.
그러자 얼굴에 방독면을 쓴 정부군 병사들이 사방에서 호텔로 진입해 들어갔다.
“콜록콜록!”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가 로비 안으로 밀려들어오자 여기저기에서 거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부군 놈들이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목에 두른 천으로 급히 입과 코를 가린 우스만의 외침에 무하마드는 무전기를 들어 올리며 송신 버튼을 눌렀다.
“본때를 보여 줘.”
-예.
총구를 앞으로 향하게 한 채 빠르게 뛰어가던 정부군 병사들은 호텔 마당에 방치된 차량들 뒤에 잠시 멈춰 대열을 재정비했다.
“셋에 일제사격을 하면서 건물 안으로 진입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장교가 말하자 방독면을 쓴 병사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나. 둘.”
막 마지막 숫자를 세려는 순간 병사 한 명이 다급히 소리를 쳤다.
“이, 이것 보십시오!”
방해를 받은 장교는 얼굴을 눈가를 찡그리며 병사가 한쪽 팔을 들어 가리키는 차 안을 쳐다봤다.
최루가스 연기로 시야가 흐린 가운데 집중해서 살펴보자 차량 안에 시커먼 무언가가 있었다.
장교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는데 바로 곡사포용 포탄이었다.
포탄 한쪽에는 전기선으로 연결된 휴대폰이 붙어 있었다.
“……!”
이게 뭔지 알아차린 장교는 기겁을 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폭탄이다. 모두 뒤로 물러서!”
그 순간 포탄에 장착된 휴대폰 벨이 울렸다.
띠리리리.
그리고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호텔 앞마당이 불바다로 변해 버렸다.
꽈아아앙!
“끄악!”
정부군 병사들은 화염에 휩싸여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강한 충격파는 최루가스를 날려 버리고 호텔 건물도 덮쳐 로비와 객실 유리창을 모두 산산이 깨 버렸다.
와장창!
잠시 뒤 흙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난 호텔 앞마당은 지옥 그 자체였는데 시커멓게 그을리거나 불이 붙은 차량들이 엉망으로 뒤집혀 나동그라져 있었고 그 주위로 처참한 몰골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이 보였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로비 바닥이 흔들리고 천장에서는 희부연 시멘트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한쪽 손에 기폭장치를 작동시킨 휴대폰을 든 무하마드는 엉망으로 변한 호텔 앞마당을 바라보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정부군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동시에 현장을 주시하고 있던 외국 언론사에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킬 확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아마 조금 있으면 전 세계에 방금 전 터진 폭발이 속보로 방송되며 사람들이 이곳 상황에 관심을 가지게 될 거였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무하마드는 고개를 돌려 우스만을 보며 말했다.
“성명문은?”
“지금쯤이면 CNN과 알자지라 방송국에 메일로 전달됐을 겁니다.”
“좋아. 1시간 뒤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첫 번째 인질을 처형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폭음이 터지자 황급히 7층 사우나 창문을 통해 바깥 상황을 확인한 혁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역시 덫을 쳐 놓고 있을 거란 예상이 맞았군요.”
마치 남의 일처럼 차갑게 중얼거리는 자말의 말에 혁권은 낮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끄으응.”
이번 폭발로 진압이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과 테러범들이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들어왔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말이 고개를 돌리며 묻자 혁권은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부비트랩에 걸려 투입시킨 병력이 처참하게 박살 나 버렸으니 당분간은 정부군도 섣불리 진압을 시도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카페테리아에서 죽인 테러범들이 언제 발견될지 몰랐기에 언제까지 여기에 숨어 있을 수도 없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혁권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 힘으로 빠져 나가는 수밖에.”
눈을 반짝이던 자말은 이내 턱으로 폭음을 듣고 놀라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사람들은 어쩔 겁니까?”
“데리고 가야지.”
혁권의 말에 자말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호텔을 빠져나가는데 짐이 될 겁니다.”
“나도 알아. 그렇다고 남겨두면 얼마 못 가서 놈들한테 잡혀 죽게 될 거야.”
“그건 저희 알 바가 아니죠.”
냉정한 어투에 혁권은 자말을 바라봤다.
“나도 성인군자는 아냐. 하지만 이대로 가 버리면 한동안 꿈자리가 사나울 거란 건 알지. 그리고 참고로 난 잠을 제대로 못 자면 홱 돌아 버리는 타입이거든.”
“이럴 것 같아서 애초에 사람들을 구하는 걸 반대한 겁니다.”
자말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자 혁권은 시익 웃으며 몸을 돌렸다.
“놈들이 정부군한테 정신이 팔려 있는 틈에 어서 움직이자고.”
“예.”
한 손에 테러범들한테 빼앗은 AK47 자동소총을 든 자말은 혁권을 따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부군을 기다리지 않고 호텔을 탈출하자는 혁권의 말에 사람들은 크게 술렁였다.
“그냥 지금처럼 여기에 숨어 있는 것이 더 낮지 않겠소?”
모함메드의 말에 몇몇이 머리를 끄덕이며 앞에 서 있는 혁권을 봤다.
겁이 나고 불안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됐지만 그런 걸 하나하나 봐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기에 혁권은 단호하게 말했다.
“방금 전 폭발로 정부군이 쉽사리 움직이기 어려울 겁니다. 언제 진압 작전이 재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이러고 있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어떡할 거요?”
“맞아요. 괜히 들키기라도 하면…….”
다들 머뭇거리며 선뜻 움직이려고 하지 않자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자말이 어깨를 으쓱이며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혁권은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이대로 탈출할 생각이니 같이 움직일 생각이 있는 사람은 따라오십시오.”
냉랭한 어투에 사람들은 움찔했다.
자말도 의외라는 시선으로 그를 봤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을 데려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워 놓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혁권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가능하면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억지로 이들을 끌고 다닐 명분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설득을 한다고 쓸데없이 힘을 빼기보다 원하는 사람만 데려가려는 거였다.
이걸로 생사生死가 갈리더라도 그건 자신들의 판단에 의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5분 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겠습니다.”
말을 끝낸 혁권은 그대로 돌아서서 사람들이 편하게 고심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줬다.
탈의실 밖으로 나가 입구 카운터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뒤를 따라온 자말이 옆에 서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
“사람들을 설득하실 줄 알았는데 조금 놀랐습니다.”
그러자 혁권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누이 말하지만 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싫다는 걸 억지로 끌고 가 봐야 나만 피곤하지.”
자말은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맞는 말입니다.”
고개를 돌려 사람들이 있는 탈의실을 힐끔 쳐다본 자말이 말을 이었다.
“어떤 결정을 내릴 것 같습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어차피 책임은 자신이 지는 거니까 심사숙고해서 마음을 정하겠지.”
어깨를 으쓱인 혁권은 아까 객실에서 챙겨 온 초코릿을 반으로 잘라 하나를 입에 넣고는 남은 걸 자말에게 내밀었다.
“호텔을 습격한 놈들의 정체가 뭔 것 같아?”
“트리폴리에 있는 무장 단체만 20여 개가 넘고 리비아 전체로 따지면 그 몇 배는 되는데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도 의심이 가는 곳은 있을 거 아냐.”
“글쎄요. 이렇게 과격한 행동을 할 놈들이라면 IS나 이슬람 형제단 정도인데, 어느 쪽이든 부딪쳐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자말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는 걸 본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상대가 리비아에서 벌어지는 자살 폭탄 테러의 대부분을 자행할 정도로 잔인하고 극단적인 두 단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얼마쯤 지났을까 혁권이 먼저 침묵을 깨며 한쪽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다 됐군.”
몸을 일으킨 혁권은 자말과 함께 탈의실로 향했다.
좁은 공간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던 사람들은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오자 시선을 한데 모았다.
“결정하셨습니까?”
다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찰나, 싸미라가 먼저 손을 들었다.
“전 함께 가겠어요.”
의지로 굳게 빛나는 싸미라의 눈동자를 보면서 혁권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