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03
203
몸을 일으킨 심정열은 득의만만한 얼굴로 앞으로 걸어왔다.
“거머리처럼 달라붙더니 이제 끝이야.”
진득한 살기가 담긴 목소리에 혁권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미 총알을 다 써 버린 상황에서 남은 건 몸으로 부딪치는 것뿐이었다.
총을 가진 적을 상대로 과연 이길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지만 지금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혁권은 이를 악물고 허리에서 삼단봉을 꺼내 들었다.
비록 총을 든 상대와 정면으로 맞붙어서 이길 순 없겠지만 적이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기습을 가한다면 그래도 아직 역전할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아니, 그렇게라도 생각을 하고 싶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혁권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점점 이쪽을 향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긴장된 두 다리를 억지로 붙잡고 혁권은 단 한순간일 최적의 타이밍을 노렸다.
삼단봉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는 앞으로 달려 나가려고 할 때 갑자기 뒤에서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타탕! 탕!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병원 건물 안에서 누군가 총을 쏘며 달려 나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병실에 있어야 될 알아바디와 백성균이었다.
환자복을 입은 채 뛰어오는 알아바디의 모습에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강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런 썅!”
빨리 혁권 등을 없애 버리고 여길 빠져나갈 생각을 하고 있던 심정열은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렸다.
근처 차량 뒤에 몸을 숨긴 채 응사를 하고 있자 뒤에서 성무태의 고함이 들렸다.
“뭐 하고 있어? 포기하고 어서 와!”
마음 같아서는 어떻게든 끝장을 내고 싶었지만 성무태의 재촉에 심정열은 어쩔 수 없이 이정철과 함께 권총을 쏘며 승합차로 물러섰다.
피슝. 슝.
선뜩한 소리를 내면서 총탄이 마구 날아드는 가운데 북한 공작원들이 달아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던 혁권은 이내 더 이상 상대를 쫓는 걸 포기했다.
총알도 없는 데다 무엇보다 이미 할 만큼 했기에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솔직히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한참 무리를 한 거였다.
그런 혁권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알아바디와 백성균도 적당한 엄폐물 뒤에 몸을 숨긴 채 견제 사격만 했다.
화단 뒤에 있는 국정원 요원만이 도망치는 북한 공작원들을 보면서 안절부절못했지만 그는 그냥 무시해 버렸다.
그사이 북한 공작원들을 태운 승합차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면서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완전히 멀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혁권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휴우.”
그리고 작게나마 한숨 돌리고 있을 때, 멀리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참 빨리도 오는군.”
혁권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이 나라의 치안 상태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국정원 팀장인 심인성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위를 둘러보곤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건이 벌어진 시립 병원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현관 유리문은 산산조각이 나서 휑하니 깨져 있었고 기둥과 주차되어 있던 차량 여기저기에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로비와 바깥 주차장엔 병실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과 간병인, 그리고 문병을 온 가족들까지 한데 뒤섞여서 그야말로 발 하나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
때아닌 난리에 다들 불안해하는 데다 이게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말해 주는 이가 없어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덕분에 불쌍하게 된 것은 간호사와 접수 쪽에 앉아 있는 일반 직원들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큰 소리를 쳐야 이득을 본다는 생각을 하는 몇몇 사내들이 애꿎은 직원을 붙잡고 언제까지 바깥에 이렇게 내버려 둘 거냐며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멀리 그가 있는 곳까지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이걸 어떻게 수습할지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때 병원에 남겨 뒀던 부하가 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고 심인성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팀장님.”
“왜 너 혼자야?”
“그게…….”
요원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심인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른 놈들은 다 어디 가고 혼자밖에 없냐고!”
그러자 요원이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 당했습니다. 적들의 습격에 5층 병실을 지키고 있던 경찰관 두 명과 함께 총상을 입고 모두 사망했습니다.”
“바보 같은 놈들!”
심인성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방심으로 인해 부하들을 잃었다는 생각에 큰 자책감을 느꼈다.
동시에 북한 공작원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때마침 다가오는 최기혁을 보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놈들 찾았어!”
벌겋게 얼굴이 달아올라 있는 것이 당장이라도 달려가 권총을 쏴 댈 것만 같았다.
“도주에 이용한 승합차를 발견하긴 했는데…….”
“그런데!”
“이미 버려져서 텅 비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거기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불까지 질러 놔서…….”
“그래서 놈들이 그냥 이대로 도망치게 놔두겠다는 거야!”
“아, 아닙니다.”
“벌써 두 번이나 대낮에 총질을 해 대고 사람들을 죽인 놈들이야. 절대 놓쳐서는 안 되니까 경찰은 물론이고 군에도 협조를 얻어서 주요 길목을 차단하고 검문검색을 실시하도록 해!”
“위에서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최기혁이 화들짝 놀라 말하자 바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이미 그러기엔 다 틀렸어. 어물쩍거리다간 놈들을 다 놓치고 말 거야!”
맞는 말이었다.
현장에 있던 환자와 병원 관계자 들은 물론이고 몰려든 구경꾼들까지 다들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거나 SNS에 글을 올리고 있어 더 이상 정보를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럴 바에는 그냥 다 공개해 버리고 전력을 기울여서 도주한 북한 공작원들을 쫓는 것이 훨씬 나았다.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서 움직여!”
“알겠습니다.”
최기혁의 대답을 들으면서 옆으로 시선을 돌린 심인성은 풀죽은 얼굴로 서 있는 요원을 보며 말했다.
“넌 가서 치료부터 받아.”
그러고 보니 격전 중에 다쳤는지 한쪽 팔에 꽤 큰 상처가 나 있었다.
“괜찮습니다.”
“누가 너보고 한가하게 병원 침대에 누워 있으래! 대충 상처를 꿰매고 팀에 합류해.”
자신을 빼 놓고 움직일 줄 알았던 요원은 심인성의 말에 생기를 되찾고는 힘차게 대답했다.
“옛.”
“빨리 가 봐.”
몸을 돌려 응급치료가 이루어지고 있는 쪽으로 달려가는 요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 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심인성은 눈썹을 찡그렸다.
“끄으응.”
벌써부터 윗선에서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초대형 사고가 터졌는데 조용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한숨을 한번 크게 내뱉은 심인성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한편 혁권은 무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꿰맨 상처가 터져 다시 봉합 치료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알아바디를 나무랐다.
“병실에 가만히 있지. 이 몸을 해 가지고 왜 나왔어?”
“보스가 위험할지 모르는데 혼자 안전한 곳에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거참.”
그를 돕기 위해서 나섰다는데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사실 그때 알아바디와 백성균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부분 마취를 했지만 그래도 의료용 바늘로 피부를 찌르자 아픈지 알아바디가 눈가를 찡그렸다.
“윽.”
“다행히 상처가 크게 벌어지지 않아서 서너 바늘만 꿰매면 된다고 하니까 조금만 참아.”
“……예.”
머리를 든 혁권은 뒤편에 장승처럼 서 있는 백성균을 보며 말했다.
“자넨 다친 데 없어?”
“전 멀쩡합니다.”
“다행이군.”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단이 있고 듬직한 모습에 그는 백성균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면서 말을 이었다.
“덕분에 살았어.”
“아닙니다.”
“그런데 권총 쏘는 건 어디서 배웠어?”
“군대에 있을 때 배웠습니다.”
“사병은 권총을 안 쓰잖아?”
그가 머리를 갸웃거리자 백성균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기갑병 출신입니다. 거기서는 소총 대신 권총을 휴대해서 그걸로 사격을 했습니다.”
“그렇군.”
꽤나 능숙하게 권총을 다루는 걸 보고 의아했었는데 이제 이해가 됐다.
백성균과 이야기를 나누던 혁권은 심인성이 국정원 요원들과 함께 다가오는 걸 보고 표정을 살짝 굳혔다.
“며칠 사이에 자주 보는 것 같소이다.”
“별로 반갑지는 않군요.”
퉁명스러운 말투에 심인성은 쓰게 웃었다.
“아까 전화를 해 준 건 정말 고마웠소.”
“그런데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은 것 같군요.”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심인성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소.”
의외로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자 혁권은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심인성이 이런 상황을 일부러 만든 것도 아니고 어쩌면 가장 난처한 처지이기도 했기에 괜히 화풀이를 하기가 뭐했다.
“뒷수습을 하기도 정신이 없을 텐데 저한테 무슨 볼일입니까?”
“한국에 있는 동안 우리 직원들이 경호를 할 겁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인 통보에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아니더라도 하는 사업의 특성상 누군가 외부인이 옆에 붙어 있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싫다면 어쩔 겁니까?”
그러자 심인성이 얼굴에 멍이 든 채 한쪽에 서 있는 경찰관 두 명을 힐끗 쳐다보곤 입을 열었다.
“공무수행 중인 경찰관에게 위해를 가하고 총기를 빼앗아 사용한 것은 아주 심각한 범법행위입니다.”
부하들이 병실을 지키던 경찰관을 때려눕히고 권총을 가져와 쓴 것을 걸고넘어지자 혁권이 정색을 하며 앞에 있는 심인성을 노려봤다.
“그거야 그쪽에서 할 일을 제대로 못하니까 나선 것 아닙니까.”
“내가 알기로는 6층에는 놈들이 올라가지도 않았다고 하던데 그러면 정당방위가 성립되지 않지요.”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혁권이 바짝 날을 세우자 심인성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도 놈들을 쫓는 데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다른 데 직원들을 배치하는 것이 달갑지 않소.”
“그럼 안 하면 되겠군요.”
“그렇게 쉬우면 좋겠지만 위에서 시키는 걸 난들 어쩌겠소. 그러니까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이쯤에서 타협을 합시다.”
“쯧.”
상대가 솔직하게 탁 터놓고 나오자 혁권도 짧게 혀를 차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대신 경찰 총기를 빌려 쓴 일은 확실히 없던 걸로 만들어 줘야 됩니다.”
“물론이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싫다고 해도 몰래 꼬리를 붙일 것이 뻔했기에 그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인원도 최소한으로 해 주십시오.”
“알겠소.”
뭔가 급한 연락이 왔는지 옆에 있던 차기혁이 귓속말을 하자 심인성이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그를 봤다.
“나중에 또 봅시다.”
던지듯 말한 심인성이 급히 몸을 돌리자 잠시 찌푸린 얼굴로 뒷모습을 바라보던 혁권은 마침 치료가 모두 끝난 알아바디를 데리고 다시 병실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