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22
222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혁권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군대에서 최정예 특수부대원으로 인정받던 이들이 사회에 나와 이렇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한편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목숨을 걸고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국가를 위해 충성했는데,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이렇게 나 몰라라 내팽개치는 것이 너무 가혹하고 서러웠다.
“자, 우울한 이야기는 때려치우고. 그러는 넌 요즘 어떻게 지내냐?”
자칫하다간 분위기가 가라앉을 듯싶었는지 태영준이 갑자기 화살을 혁권에게 돌렸다.
“너 태일그룹에 취직했다고 안 그랬어?”
그래도 제일 오래 연락이 됐던 유승우가 안주로 나온 파전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며 불쑥 말했다.
“태일그룹이라면 엄청 들어가기 어려운 곳 아냐?”
“그렇죠.”
“이야. 김혁권이 대단한데.”
그런 사실을 오늘 처음 알게 된 태영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취직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자신들의 처지와 현격히 차이가 나니 아무리 사내들끼리라도 질투가 나기 마련일 텐데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이들이 고마웠다.
이것이 바로 땀과 눈물을 함께한 군대 전우 사이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끈끈한 우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이번 일을 친구들과 함께해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운이 좋아 태일물산에 들어가서 한동안 일했었는데 지금은 그만뒀습니다.”
“아니, 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깜짝 놀라 다그치듯 말을 쏟아 내는 두 사람과 달리 차분한 성격의 태영준은 그를 힐끗 보더니 다른 이들을 달랬다.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 대기업에 다닌다고 해서 힘든 일이 없을 리가 있겠어.”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그때서야 괜히 호들갑을 떨었다는 듯 머쓱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픈 데를 찔렀나 싶어 자책하는 기미였다.
그걸 본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막걸리가 든 주전자를 들어 빈 잔을 채워줬다.
“태 중사님 말씀대로 저하고 안 맞는 것도 있고 해서 회사를 나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따로 조그마한 사업을 하나 시작했습니다.”
“사업을?”
“예.”
난데없이 사업이라니 세 사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혁권을 봤다.
“실은 오늘 이렇게 만나자고 한 것도 제안을 하나 할 것이 있어서입니다.”
“……?”
자세를 바로 한 혁권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저와 함께 치우 팀을 다시 결성해 볼 생각이 없습니까?”
그의 이야기에 세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대로 몸을 멈추고는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지금 치우 팀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혁권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태영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치우라는 콜사인은 혁권과 이 자리에 모은 동료들이 군대 시절 함께 속해 있던 팀 명칭이었다.
물론 지금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해체되고 말았지만 그들에게는 언제나 그립고 자랑스러운 이름이었다.
들뜬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면서 태영준이 말했다.
“설마 우리보고 다시 군대로 돌아가라는 건 아니겠지. 뭐 간다고 해도 거기서 안 받아 주겠지만 말이야.”
“그럴 리가요.”
“그럼 무슨 뜻이야?”
다른 두 사람도 눈을 껌뻑이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혹시 시에라리온이라고 들어 봤습니까?”
“글쎄?”
태영준이 너네는 아냐면서 고개를 돌아봤지만 역시나 둘 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혁권이 말을 이었다.
“멀리 서아프리카에 있는 국가라 모르실 수도 있을 겁니다. 어쩌다 보니 그곳에 위치한 다이아몬드 광산을 하나 소유하게 됐는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반군들이 광산 주변 지역을 장악하는 바람에 접근이 어렵게 되어 버린 겁니다.”
난데없이 다이아몬드 광산에 반군 이야기를 꺼내자 세 사람은 혁권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광산을 반군 놈들한테서 다시 되찾을 생각인데, 좀 도와주십시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태영준이 길게 숨을 내뱉고는 정색을 한 채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보고 용병 노릇을 해라, 이거야?”
“회사 직원으로 채용하는 겁니다.”
“그게 그거 아냐?”
얼굴이 약간 벌게진 유승우가 불쑥 끼어들며 이야기하자 혁권은 담담한 태도로 머리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단순히 반군 놈들하고 싸워 줄 사람이 없어서 이러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럼 뭐야?”
날 선 물음에 그는 앞에 있던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으면서 대답했다.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서야.”
묵직한 그 목소리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일순 까칠한 태도를 보였던 유승우도 혁권의 말을 듣자 약간 누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묵묵히 들이켰다.
그러자 제일 나이가 어린 김선호가 약간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일을 하면 돈은 많이 벌 수 있는 겁니까?”
“목숨을 걸어야 되는 일인데 당연하지.”
“그럼 전 하겠습니다.”
김선호의 말에 다른 두 사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야.”
“태 중사님 말씀이 맞아, 선호야.”
하지만 김선호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이러는 거 아닙니다.”
그는 제 앞에 놓인 잔을 단숨에 비우더니 맘속에 있는 말을 토해 내듯 털어놓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시장 좌판에서 야채 장사를 하고 계세요. 저 어렸을 적부터 쭉요. 여름엔 더운데 작은 선풍기 하나 없이 부채로 버티고, 겨울엔 손끝이 다 터서 갈라지는데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제가 못난 탓입니다. 제가 제대로 돈을 못 버니까 어머니가 그 나이 되셔서도 고생하시는 거예요. 이제 더 이상 그런 꼴 보기 싫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자란 김선호의 가정 상황을 모르지 않았던 세 사람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선호야…….”
“이번 참에 돈을 제대로 벌어서 시장에 번듯한 가게를 하나 사서 어머니께 그동안 못했던 효도를 한번 해 보렵니다.”
김선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혁권을 보면서 말했다.
“전 하겠습니다. 아니, 꼭 데려가 주십시오.”
“그래 함께 가자. 그리고 위험한 일이 있다면 절대 너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태니까. 걱정하지 마.”
“믿습니다.”
복잡한 얼굴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태영준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렸다.
“후우. 이것 참. 그 위험한 곳을 막내만 보낼 수는 없지.”
“태 중사님.”
유승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자 태영준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우리도 목돈을 한번 마련해 보자고. 너 장가가려면 전세금이라도 있어야 될 거 아니야.”
“그건 그런데…….”
갑자기 유승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어색한 표정을 짓자 혁권은 애인이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
“뭐야, 사귀는 사람이 있는 거야?”
“흠흠. 심각한 건 아니고 그냥 괜찮은 사람이 있어서 만나 보는 중이야.”
그러자 옆에 있던 태영준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까는 결혼할지도 모르겠다고 했잖아.”
“그냥 그런 마음이 있다 이거지요. 태 중사님도 참…….”
“아무튼 축하한다.”
“아직 그 정도 사이는 아니라니까.”
쑥스러운지 자꾸 아니라고 부정하다가 결국 얼굴을 붉히며 수긍하고야 말았다.
“그래, 여우 같은 마누라랑 토끼 같은 자식 가지고 싶어서 연애한다, 왜! 불만 있어?”
“아이고! 불만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성님~.”
“야 함은 누가 드냐? 우리가 자원봉사 뛰어 줄까?”
“이 새끼들 김칫국부터 마시는 거 봐라. 자~알들 논다.”
“큭큭큭.”
덕분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잠시나마 풀어졌다.
놀림감이 된 유승우는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다들 간다는데 나 혼자만 빠질 수는 없지.”
“정말 괜찮겠어?”
혁권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가면 적어도 반년은 그곳에서 지내야 돼.”
그러자 유승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지.”
“여친이 허락해 줄까?”
“그렇게 따지면 선호도 어머니를 혼자 두고 떠나야 하잖아. 내가 설득해 볼게. 야, 근데 가끔 휴가는 주는 거지?”
“당연하지. 비행기 푯값도 다 대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면 됐어.”
시원스럽게 대답을 하자 혁권은 마음 한구석에 있던 미안함을 털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유승우까지 함께 가기로 결심하자 태영준이 작게 헛기침을 하곤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상대해야 될 반군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달랑 네 명만 가는 건 아니겠지?”
“PMC 한곳과 계약을 체결해 함께 움직이게 될 겁니다.”
“거 뭐냐, 민간 군사 기업인가 뭔가 하는 곳을 말하는 거야?”
“아시는군요.”
“군에서 막 나왔을 때 몇 번 제안을 받은 적이 있어.”
최근 몇 년 사이에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정세가 불안해지고 해적들까지 설치면서 보안 수요가 폭발하고 있었다.
당연히 국내 기업들 역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 군사 기업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한국인 용병들의 수요가 생겨났다.
태영준처럼 실력이 뛰어나고 경험까지 많은 군인이라면 당연히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을 터였다.
“그랬군요.”
“그때는 갓 태어난 딸하고 아내 때문에 거절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구먼.”
씁쓸한 표정을 짓는 태영준의 이야기에 혁권이 그러고 보니, 하면서 말을 돌렸다.
“형수님이 임신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딸인지 아들인지는 몰랐는데 예쁜 공주님이 나왔나 봅니다.”
“그래. 요즘 딸자식 재롱 보는 재미로 살아. 역시 시커먼 사내 녀석 보다는 딸이 더 낫다니까.”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지 한결 풀어진 얼굴로 태영준이 대꾸했다.
“어휴, 완전히 팔불출 아빠 다 되셨네요. 아직 저처럼 애인도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빨리 좋은 사람 만나라고. 너 정도면 여자들한테도 꽤 먹힐 텐데, 소개시켜 주려고 해도 본인이 싫어하니 원.”
“아직은 결혼보다 일이 더 좋아서 그런가 봅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태영준은 막걸리 주전자를 들어 비어 있는 혁권의 잔에 술을 채워 주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용병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면 우리는 굳이 필요 없는 거 아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쪽은 믿고 등을 맡기기 어려우니까요.”
혁권의 말에 상대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돈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니까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겠지.”
“맞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승우가 살짝 미간을 좁힌 채 끼어들며 말했다.
“견제 역할을 해 달라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도 달랑 우리 네 명…… 아니, 셋만 가지고는 힘들 거 같은데.”
함께한다고 했지만 사장인 혁권이 현지 광산에 계속 상주하는 건 어렵다는 걸 알았기에 유승우는 셋이라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인원을 더 보강해야지.”
“몇 명이나 생각하고 있는데?”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였기에 태영준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미리 생각을 해두고 있던 혁권이 바로 대답했다.
“1개 팀 정도를 구성할 계획입니다.”
“팀 단위 전술에 익숙하니까 괜찮을 것 같네.”
다른 두 사람도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일반 부대와 달리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공수특전단은 보통 열두 명이 1개 중대를 구성하고 팀으로 호칭했다.
실제로 훈련과 임무 수행 모두 팀 단위로 움직였기에 가장 익숙한 편제였다.
“아홉 명만 더 데려오면 되겠네요.”
“우리보고 직접 고르라는 거야?”
놀란 표정을 짓는 태영준과 달리 그는 당연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서로 목숨을 맡기고 손발을 맞춰야 되는데, 마음이 맞는 사람들로 팀을 구성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렇지.”
실전에서는 단 한 명의 실수가 팀원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었기에 무엇보다 서로 간의 신뢰와 팀워크가 중요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혁권이었기에 과감하게 인원 선발을 내심 팀장으로 생각하고 있는 태영준한테 전부 맡겨 버렸다.
“출발까지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으니까 최대한 빨리 팀원을 뽑아야 될 거예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혁권의 의중을 알아차리곤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작게 눈빛을 교환한 뒤에 대답했다.
“알았어. 가능한 한 서둘러 보지.”
“이왕이면 해외 파견을 나간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낫겠지.”
고개를 끄덕인 태영준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아는 특전사 전우들의 얼굴을 주욱 떠올리면서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걸로 진지한 이야기를 모두 마무리 지은 혁권과 세 사람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