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28
328
서류철을 받아서 펼쳐 본 틸러슨 부행장은 동의서를 고문변호사한테 건네주고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건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지요?”
“동의서를 발급해 준 곳이 트리폴리 정부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스텐저가 따지듯이 묻자 은행 고문변호사가 대신 이유를 설명했다.
“트리폴리 정부는 리비아 전체를 대표하는 곳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트리폴리 정부는 세계 각국에서 인정받은 유일의 리비아 정통 정부입니다. 미국 정부 역시 그걸 인정하고 재무부에서 압류하고 있던 동결 자금 일부를 지급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설마 이걸 부정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
상대편의 얼굴에 다시 한 번 곤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자칫 잘못하면 미국 정부의 행동을 부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기에 쉽사리 대꾸하기 어려웠다.
준비한 패를 적시적소에 꺼내면서 제대로 사용하는 스텐저 변호사의 모습에 혁권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면서 내심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고문변호사가 뭐라고 반론을 펼치려는 거 틸러슨 부행장이 손을 들어서 제지했다.
그러고는 이쪽을 바라보면서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존슨 씨 말대로 미국 정부도 인정한 곳이니 동의서가 효력이 있다고 치도록 하지요.”
“그러면 저희가 요청한 대로 채권을 지급해 주시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틸러슨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하는 이야기에 스텐저 변호사는 미간을 찡그렸다.
“방금하신 말씀하고 다르지 않습니까!”
“아니지요. 동의서는 인정하지만 그저 참고 사항에 불과할 뿐 이런 서류 한 장으로 모든 걸 다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솔직히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과도적인 기구에 불과할 뿐, 리비아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정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현재도 리비아 국내에서 이 문제를 두고 갈등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몸을 뒤로 살짝 기대면서 틸러슨이 말을 계속했다.
“저희 입장에서는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에 선뜻 응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걸로 인해 차후에 법적 분쟁이 생기는 걸 염려하시는 겁니까?”
혁권이 묻자 상대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문제점을 이미 인지하고 계시는 것 같으니 말을 하기가 한결 편하겠군요. 저희한테 아무런 득이 안 되는 일을 법적 분쟁의 위험까지 떠안으면서 요청을 들어 드릴 이유가 없지요.”
틸러슨은 재차 거절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자 혁권이 상대와 시선을 맞춘 채 진지하게 말했다.
“만약 법적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해 드린다면 어떻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는 겁니까?”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틸러슨이 콧방귀를 뀌며 쳐다봤다.
“재판을 하는 겁니다.”
“……?”
“채권 지급 요청을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재판까지 하게 된다면 뱅크 오브 아메리카 측은 동결 자금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 되니까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길 경우 핑계를 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제안을 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상대가 약간 술렁이는 모습을 보였다.
틸러슨 역시 잠시 고심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안경을 살짝 고쳐 쓰면서 입을 열었다.
“재판을 하게 되면 기한이 끝도 없이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쪽에 유리한 판결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을 텐데요?”
당연한 이야기였다.
재판까지 끌고 갔다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낭패가 없었다.
실제로 미국 제일의 은행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서 작정을 하고 방어를 한다면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이쪽의 약점을 제대로 파고드는 말에 당황할 만도 했지만 혁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아니, 오히려 여유 가득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재판은 집중 심리를 신청해서 기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고, 거기다가 양측이 서로 협조한다면 판결을 더 빨리 받아 내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그러자 틸러슨 부행장이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가 왜 그래야 되지요?”
“그러는 것이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도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이해가 안 되는군요.”
틸러슨 부행장이 떨떠름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저희 제안대로 해 주신다면 지난 6년 동안 발생한 이자와 수익 부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은행 측 인사들은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애써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틸러슨 부행장 역시 지금쯤 등줄기가 서늘해졌을 터였다.
“이자라니……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동결 자금은 말 그대로 특별한 사유에 의해 출금이 제한된 계좌이기 때문에 이자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뭔가 찝찝했지만 틸러슨 부행장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이어진 혁권의 이야기에 틸러슨 부행장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이자는 뭐 그렇다고 치지요. 하나 묶여 있는 자금을 이용해서 그동안 상당히 많은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익률이 얼마나 좋은지 저도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여윳돈을 맡기고 싶은 마음이더군요.”
혁권이 턱짓을 하자 옆에 있던 자말이 서류를 하나 꺼내 틸러슨 부행장 앞에 내려놨다.
무심코 그걸 집어든 상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내뱉었다.
“으음.”
서류에는 지난 6년간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서 동결 자금을 비밀리에 운용해서 상당한 수익을 거둔 것이 아주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실제로 리비아 사태가 장기화되자 뱅크 오브 아메리카 경영진은 단시간에 카다피 정권의 자금이 동결에서 풀리지 않을 거라 판단하고 이걸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무려 100억 달러에 달하는 거액을 그냥 은행 금고에 묵혀만 두는 건 너무 비능률적인 데다 갑자기 자금을 지급해야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2,282억 달러나 되는 자본과 예치금이 있었기에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물론 동결 자금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건 명백한 불법 행위였다.
그러나 많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일인 데다 지금까지 아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뱅크 오브 아메리카 경영진은 서슴없이 불법을 저질렀다.
그렇게 해서 지난 6년간 거두어들인 수익이 무려 10억 달러가 훌쩍 넘었으니 은행 입장에서는 정말 짭짤한 수익이 아닐 수가 없었다.
특히나 이건 회계 장부에도 잡히지 않는 일종의 비자금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더욱 활용도가 높았다.
당연히 이런 사실이 드러나면 고객의 돈을 동의도 없이 함부로 손을 댄 거였기에, 도덕성과 신용에 큰 타격이 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서 은행과 경영진이 법적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 경영진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동결 자금과 관련된 사항을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자금 운용도 직접 하지 않고 별도의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서 처리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마치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보기라도 했듯 혁권이 자세하게 알고 있으니 당황스럽고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혁권 역시 거액의 동결 자금을 가지고 있는 금융기관들이 그걸 그냥 가만히 놔두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는 의심만 했지 딱히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
협상장에서 이걸 거론해 상대를 압박하는 용도로 쓰려고 했는데, 이왕 CIA의 도움을 받는 김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료가 있는지 물어봤었다.
그리고 결과가 지금 틸러슨 부행장이 손에 들고 있는 서류였다.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답게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행동을 속속들이 다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거운 분위기가 회의실 안에 가득 내려앉은 가운데 혁권은 느긋한 얼굴로 앞에 놓인 차를 마시면서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틸러슨 부행장이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이걸 어디서 구한 겁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닐 텐데요. 그리고 세상에는 완전한 비밀이란 없는 법입니다.”
한쪽 뺨을 실룩인 틸러슨 부행장은 이내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협상의 주도권이 넘어간 걸 인정했다.
“우리가 뭘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 겁니까?”
“이미 다 이야기를 드렸지 않습니까. 제가 원하는 건 정당하게 채권을 지급 받는 것뿐입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귀측과도 싸울 의사가 없고 말입니다.”
“그 말은 경우에 따라 이 문건을 묻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겁니까?”
틸러스 부행장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묻자 그는 씨익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물론입니다. 괜히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키는 건 저도 원하지 않는 일입니다.”
“흐음.”
“그동안 얻은 수익에 대해서도 일체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얼굴을 굳힌 틸러스 부행장은 목소리를 낮춰 다른 임원들과 의견을 교환했다.
혁권은 차를 마시면서 여유로운 얼굴로 그걸 가만히 지켜봤다.
그가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건 상대가 내릴 결론이 뭔지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동결자금을 은행에서 마음대로 이용한 것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여러 가지로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혁권의 요청을 들어주는 건 충분한 근거가 법적 책임을 회피할 그럴싸한 명분까지 만들어 준다니, 피해 볼 것이 그리 크지 않았다.
특히 수익 부분에 대해서는 묵인하고 함구하겠다고 했으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문제가 불거지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이 바로 틸러스 부행장을 비롯한 은행 경영진이었기에 뭘 선택할지 불을 보듯 뻔했다.
대충 의견이 조율됐는지 틸러스 부행장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그를 쳐다봤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것보다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제안하신 내용은 충분히 이해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바로 결론을 내리기에는 워낙 중대한 사안인 데다 이것저것 검토해 볼 것들이 있으니 이틀 뒤에 다시 자리를 마련했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조금 아쉬웠지만 어차피 바로 합의를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기에 혁권은 시원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지요. 다음에 만날 때는 부디 좋은 결과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협상을 이만 끝내도록 하지요.”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을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손을 뻗어 악수를 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 본사를 나와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혁권은 차창 밖에 시선을 둔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상대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문제는 채권을 지급해 주라는 법원의 판결을 얼마나 빨리 받아 내느냐 하는 거였다.
고개를 바로 한 혁권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스텐저 변호사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법원 판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까?”
“글쎄요. 상대편에서 얼마나 협조를 해 주느냐에 따라서 유동적이겠지만, 늦어도 3개월 안에는 결정이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3개월이라…….”
거액이 걸린 재판이라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빨리 진행되는 거였지만, 혁권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2개월로 줄일 수는 없겠습니까?”
혁권의 말에 스텐저 변호사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솔직히 3개월도 상황을 아주 낙관적으로 생각해서 나온 기한입니다. 자칫 너무 서두르다가 보면 오히려 일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진지하게 스텐저 변호사가 충고를 하자 혁권은 금방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확실히 일을 마무리 지어 주십시오.”
그러자 스텐저 변호사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스텐저 변호사의 실력이라면 이미 충분히 확인을 했기에 그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