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29
329
몇 시간 뒤.
혁권은 묵고 있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틸러스 부행장을 만났다.
호텔 수준에 맞게 레스토랑도 우아하고 럭셔리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흰색 테이블보에 놓인 은 접시와 도자기 그릇들은 하나같이 수제 명품이었다.
협상을 끝내고 객실로 돌아와 쉬고 있을 때 틸러스 부행장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와서 갑자기 만남이 이루어졌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식사를 어느 정도 끝마친 틸러스 부행장이 냅킨으로 입가를 살짝 닦으면서 말했다.
“사실 오늘 협상에서 존슨 씨의 요구를 거절하는 걸로 내부적으로 방침을 세워 두고 나갔었습니다.”
처음 그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대충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혁권은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도저히 저희가 거부할 수 없도록 상황을 아주 능숙하게 이끌어 가시는 걸 보고 정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특히 록슨 펀드 자료를 눈앞에 들이밀 때는 하마터면 협상 중이라는 것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습니다.”
록슨 펀드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 은행에서 카다피 정권의 동결 자금을 운용하기 위해서 비밀리에 설립한 펀드였다.
“은행 내부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던 정보인데, 도대체 어떻게 록슨 펀드의 존재를 알아차린 겁니까?”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묻자 그는 유리잔을 들어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여유롭게 말을 받아 넘겼다.
“틸러스 씨 같으면 정보 출처를 쉽게 밝히시겠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텐데요?”
그러자 틸러슨 부행장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런, 제가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것 같군요.”
“하나만 말씀드린다면 제가 무턱대고 이번 일을 맡은 건 아니라는 겁니다.”
“흐음. 그렇군요.”
이야기를 들은 틸러슨 부행장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실상은 일을 하나씩 풀어 나가다 보니 록슨 펀드의 자료를 입수하게 된 거지만, 틸러슨 부행장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킬레스건이나 마찬가지인 록근 펀드의 존재를 알고 모든 일을 설계한 것으로 오해했다.
상대의 반응에 혁권도 그걸 눈치챘지만, 그러는 것이 오히려 협상을 풀어 가는 데 득이 됐기에 그냥 모르는 척 내버려 뒀다.
“그걸 물으시려고 절 만나자고 한 건 아닐 테고, 이제 진짜 하고 싶으신 이야기를 해 보시지요.”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틸러슨 부행장은 쓴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존슨 씨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경영진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직 결론이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요청을 받아들이는 걸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거 반가운 소식이군요.”
자신들한테 불리한 이야기를 이렇게 하는 걸 보면 채권을 지급해 주기로 결정이 났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입장을 정리하기 전에 존슨 씨께 확답을 듣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말씀해 보시죠.”
이제부터가 진짜 본론이었기에 혁권은 내심 긴장을 하며 상대를 바라봤다.
“첫 번째로 록슨 펀드에 대해서 일체 함구를 하고 이번 협상 이후로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낮에 협상장에서 자신이 먼저 이야기한 거였기에 혁권은 머뭇거리는 것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염려 마십시오. 한번 협의가 이루어진 일을 다시 거론할 만큼 염치가 없지는 않습니다.”
“가지고 계신 자료도 전부 저희 쪽에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죠.”
뱅크 오브 아메리카도 자신들의 아킬레스건이 드러난 만큼 분명 록슨 펀드를 깨끗하게 정리할 것이 분명했으니, 굳이 자료를 가지고 있어 봤자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물론 현 경영진과 은행을 압박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지만, 뭐든지 너무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었다.
그럴 바에야 자료를 시원하게 넘겨주고 서로 신뢰 관계를 쌓는 것이 훨씬 나았다.
“역시 젊으신 분이라서 그런지 대답이 시원하시군요.”
“다음 요구 사항은 뭡니까?”
“이번 협상 이후 또다시 카다피 정권의 동결 자금과 관련해서 존슨 씨를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다시 채권을 가져와서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 은행 한곳에 국한된 이야기이겠지요?”
“물론입니다.”
다른 금융기관과는 어떻게 되든 말든 그건 틸러슨 부행장의 관심 밖이었다.
“그렇다면 저도 별다른 이의가 없습니다.”
“이 모든 사항을 서류로 만들어서 서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보고 각서를 쓰라는 겁니까?”
혁권이 살짝 인상을 쓰자 틸러슨 부행장이 가볍게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존슨 씨를 믿지 못해서 그러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저 만약을 대비해서 서로 일을 확실히 해 두자는 의미입니다.”
“서류를 만들었다가 나중에라도 외부에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상당히 골치 아플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도록 저희 본점 비밀 금고에 잘 보관해 둘 테니까요.”
그는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다고 해서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 건 아니지요.”
“…….”
“괜히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위험 요소를 굳이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살짝 거슬릴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틸러슨 부행장은 노련하게 대응했다.
“신뢰를 확인하기 위한 행위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한번 당한 일을 또다시 반복할 만큼 저희 은행이 허술한 곳은 아닙니다.”
부드러운 말투 속에 숨겨진 단호함에 그는 이내 표정을 풀며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길 원한다면 해 드리도록 하지요.”
“고맙습니다.”
대화가 원하는 대로 잘 마무리된 것에 틸러슨 부행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고 혁권 역시 만족했다.
“그럼 이틀 뒤 협상장에서 다시 보도록 하지요.”
“그러시죠.”
미소 띤 얼굴로 악수를 나누며 틸러슨 부행장하고 헤어지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킴과 알아바디가 얼른 뒤로 다가와서 섰다.
두 사람의 양복 윗도리는 숨겨 둔 권총 때문에 불룩 튀어 나와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무기부터 구매했는데, 혁권 역시 허리에 권총을 하나 차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습격을 받게 될지 몰랐기에 항상 만약을 준비해 두는 건 당연한 행동이었다.
두 사람을 뒤에 달고 발걸음을 옮기던 혁권은 문득 호텔 로비 한쪽 벽면 유리에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커다란 광고 사진을 보고 잠시 멈춰 섰다.
그건 호텔 안에 입점되어 있는 시계 전문 브랜드의 광고였다.
금발에 약간 부스스한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연출한 모델이 손목시계가 잘 보이도록 취한 자세로 살짝 눈을 내리깔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스?”
혁권이 아무 말 없이 멈춰 서 있자 뒤에서 알아바디가 의아한 듯 불렀다.
그의 시선을 따라 두 사람 역시 자연스럽게 광고 사진을 보았지만 그저 예쁜 여자가 사진에 찍혀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느끼질 못했다.
‘혹시 보스는 저 여자가 마음에 든 걸까?’
‘혹시 보스는 저런 여자가 취향인 걸까?’
그렇게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알아바디와 달리 하킴은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는 듯 잠자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닮았군.”
“예?”
“어디가 말입니까?”
통 짐작을 하지 못하는 알아바디에 반해 하킴이 태연스레 되물었다.
“손가락이 말이야. 가늘고 쭉 뻗은 게 닮았어.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다고 했던가.”
“그렇습니까?”
하킴은 어지간히 중증이라고 생각하면서 성의 없이 대답했다.
“한번 구경이나 해 볼까.”
딱 그 말만 하고 혁권이 제 맘대로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알아바디가 뒤따르려던 하킴의 팔꿈치를 붙잡곤 속닥였다.
“대체 무슨 일이야?”
“그런 게 있어.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지금은 보스를 경호하는 거나 신경 써.”
“흠…….”
알아바디는 영 마뜩지 못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다.
항상 둘이서 보스를 그림자처럼 따르지 않았던가.
당연히 하킴이 아는 것은 자신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보스와 단둘이서만 통하는 대화를 하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영역을 침범당한 것 같아 불쾌했다.
“나중에 꼭 얘기해 줘야 해.”
하킴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매장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혁권의 곁에 따라붙었다.
“……20대 여성분이라면 이런 밝은 브라운 컬러의 가죽 시계는 어떠세요? 블랙이나 네이비가 베스트 컬러긴 하지만, 너무 무난해서 질린다고 하시는 분들도 꽤 계시거든요. 줄이 가늘어서 얇은 손목을 더 돋보이게 하고, 안쪽의 시계 침에도 약간 컬러감을 입혀서 통통 튀는 느낌의 제품이랍니다.”
“밖에 있던 광고 제품은 어떤 거죠. 그걸 보고 왔는데…….”
“아! 그거라면 마침 딱 한 점밖에 안 남았는데, 보여 드릴까요?”
혁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원은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유리장 안에서 꺼낸 시계를 그의 앞에 내놓았다.
“시즌 한정판이라서 저희 매장에도 딱 5개밖에 안 들어온 제품이에요. 보시면 시계판을 따라서 동그랗게 박혀 있는 것들은 최상급 스왈로브스키 큐빅이고요, 안쪽에는 캐럿 수가 작긴 하지만 진짜 다이아몬드랍니다. 햇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나서 따로 장신구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화려한 느낌이 나지요.”
“이건 가죽이 아니고 메탈이군요.”
“네. 가죽 줄은 사용하다 보면 주름이 지거나 정기적으로 교환을 해 줘야 하는 번거로운 면이 있는데, 메탈은 편하게 착용하실 수 있답니다. 원래 여성용으로만 나온 제품이라서, 팔찌 대신 사용할 수 있게 장신구적인 측면이 강하죠.”
“흠…….”
“아! 그래도 저희 브랜드는 시계 전문이라서 속의 부품은 물론 무브먼트도 모두 스위스에서 제작한 것을 쓰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다른 패션 브랜드에서 나오는 액세서리급의 시계하고는 질이 다르다며 직원이 열심히 설명했다.
혁권 역시 일을 할 때는 스위스에서 생산된 고가 시계를 차고 다니지만, 아무래도 남자가 선호하는 디자인과 여성이 보는 눈은 다르기 때문에 무엇을 선물하면 소현이 기뻐할지 몰랐다.
결국 딱 1개밖에 안 남았다, 게다가 한정판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놓치면 언제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직원의 멘트에 홀려 혁권은 광고판에서 보았던 시계를 선택했다.
“선물 포장하실 거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생글생글 웃으면서 카드를 받아 든 직원은 영수증과 함께 돌려주며 재빨리 시계 상자를 포장했다.
지나가다 문득 생각나서 산 선물치고는 꽤 고가였지만 소현이 좋아할 얼굴을 생각하니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게다가 저번에는 사 준 목걸이는 척 봐도 금에다 작지만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것이라 받기 부담스러워했지만, 이번엔 시계니까 괜찮을 것이다.
롤렉스니 까르띠에니 하는 소위 명품 브랜드에서 나온 시계라면 소현도 대충 금액 대를 아니까 또 거절할지 몰라도, 시계만 전문으로 판매하는 회사의 제품은 가격은 몇 배로 뛰지만 굳이 그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름 한번 들어 본 적 없는 브랜드가 대다수기 때문에 아마 모르고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 혁권의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그가 선물해 준 것으로 소현의 전신을 치장해 주면, 결국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세트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엔 소현을 위해서 기념할 만한 데이트를 해야겠다며 혁권은 조만간 찾아올 가까운 미래를 머릿속으로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