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39
339
혁권과 함께 있으면 항상 어른스럽고 야무지게 행동하는 소현이 친구들 앞에선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것이 여태껏 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과도 같아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바라보고 있자, 그걸 본 지수와 도연이 서로 팔꿈치를 툭툭 치면서 눈빛을 교환했다.
그 뒤엔 혁권이 비즈니스로 다져진 능숙한 화술로 대화를 주도했고, 나중엔 썩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서 한창 이야기를 하다가 슬슬 2시간 정도가 지나자 소현이 먼저 일어나자고 말했다.
“좀 있으면 저녁 시간인데, 식사라도 함께하지.”
혁권으로서는 차만 마시고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건넨 말이었으나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해야 할 과제가 있어서…….”
“지수는 내 차로 데려다줄 테니까 소현이 너는 혁권 오빠랑 함께 가.”
두 사람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소현은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연락할게.”
“그래.”
혁권과 소현이 먼저 일어서고, 단둘만 남게 되자 지수가 몸을 흐느적거리면서 쿠션 위로 반쯤 쓰러졌다.
“으아아, 제기랄. 부러워 죽겠네.”
“꽤 괜찮은 사람 같지.”
도연이 등허리를 쭉 편 자세로 다리를 꼬면서 말했다.
“어. 나쁘지 않더라.”
그리고 반대로 지수는 하이힐을 신은 발을 덜렁거리며 애꿎은 바닥을 탁탁 쳐 댔다.
사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기대 이상이었다.
매끈하게 잘생긴 미남은 아니었으나 눈이 크고 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에 짙은 눈썹과 약간 각진 턱이 남성적인 매력을 풍겼다.
그리고 검은색 니트와 몸에 맞춰 재단한 듯 딱 들어맞는 롱코트의 조합도 호감도를 올리는 중요 포인트였다.
바깥의 서늘한 공기를 두른 채 소현을 보호하듯 뒤에 듬직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지수는 단번에 그가 좋아졌다.
물론 친구의 애인을 뺏을 생각은 없었으므로 이성적인 호감은 아니었지만, 만약 다른 장소에서 만났더라면 한 번쯤은 술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 상대랄까.
“소현이가 이번엔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난 것 같아.”
도연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주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어떤 면에서?”
“일단 돈 냄새가 나.”
“풉!”
비딱하게 기대 있던 지수가 꽥하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엎어졌다.
“어우, 야. 너무 노골적인 거 아냐?”
“사귀는 데 있어서 서로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야.”
“어, 그래…….”
“어쨌든 돈이 없어서 소현이를 고생시킬 것 같진 않더라. 너 그 사람 입고 있는 옷 봤어?”
도연이 특유의 시큰둥한 어투로 말했다.
“그거 전부 다 고급 브랜드야. 어중간한 명품이 아니라 진짜 부자들이 입고 다니는 옷.”
그 말에 지수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코트가 멋있기에 돈 좀 썼구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캐시미어더라, 그것도 아주 최상급이었어.”
“그런 거야?”
“속에 입은 니트랑 바지, 구두까지 전부 다. 하나같이 명품이었어. 그리고 새 걸 막 사서 입은 느낌도 아니었고.”
“그 말은 즉…….”
“평소에도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닌다는 소리지.”
지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끄응, 신음을 흘렸다.
“혹시 재벌 3세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 것 치곤 고생 안 하고 곱게 자란 느낌은 아니었는데.”
“손에 굳은살이 딱딱하게 박혀 있었어. 그건 분명히 육체노동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생을 한 손이야.”
“넌 대체 언제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관찰한 거야.”
지수가 약간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일단 쭉정이는 아니라는 거네.”
“그렇지.”
작게 머리를 끄덕인 도연은 방금 전 두 사람이 나간 입구를 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런저런 거 다 제쳐 두고라도 난 소현이가 마냥 부럽다.”
“왜?”
“너 그 사람이 소현이 바라보는 눈 못 봤니?”
“아…….”
도연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사랑스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시선이었지.”
“아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더라. 나도 연애는 숱하게 해 봤지만, 그런 식으로 바라봐 주는 남자는 없었어.”
“그런데도 아직 안 사귀는 거라니. 나는 오히려 소현이가 왜 자꾸 주저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
“그치?”
지수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런 남자는 혼자 놔두면 다른 여자가 금방 채 갈 텐데 말이야. 어휴, 둔탱이 같으니라고.”
속이 터진다면서 지수가 테이블을 탕탕 두드렸다.
“알아서 잘하겠지.”
“그래, 우리끼리 이러쿵저러쿵 말해 봐야 뭐하겠어?”
두 사람은 자신들만 짝이 없는 서러움을 느끼면서 쓴 미소를 교환했다.
“어땠어요?”
차를 출발 시키자마자 소현이 급하게 물어왔다.
“둘 다 아주 미인이던데. 덕분에 대화하는 내내 즐거웠지.”
“아이, 그런 거 말고.”
소현이 어깨를 찰싹 때리자 혁권은 짐짓 아픈 듯 아야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럼 뭐?”
“괜찮았냐고요. 혹시 애들이 무례한 질문 같은 거 하지 않았어요?”
“내내 옆에 같이 있었잖아. 다 들었으면서 또 뭘 물어봐?”
“그래도 혁권 씨 입장은 또 다를 수 있으니까…….”
그 말에 혁권이 피식 웃었다.
“눈앞이 훤해질 정도로 예쁜 미인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왔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어. 게다가 커피도 맛있었고.”
“그럼 다행이고요.”
그제야 소현이 안심한 듯 시트에 몸을 기댔다.
연예 리포터처럼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에 답하는 게 다소 낯선 경험이긴 했지만 싫다거나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소현의 친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기회라고 생각하고 면접을 치르는 것처럼 성실하게 임하기까지 했다.
“그럼 반대로 묻겠는데, 그 두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 일단 헤어질 때 분위기는 좋았던 것 같지만.”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소현이 굳이 안 물어봐도 된다는 듯 말했다.
“걔들은 거짓말을 못 해서, 처음에 딱 보고 아니다 싶었으면 엄청나게 싫은 티를 냈을 거예요.”
아마 옆에서 보는 소현이 민망해질 정도로 마구 괴롭혀 댔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 남자가 못 견디고 뛰쳐나가면 배짱도 없는 놈이라고 비웃으면서 승리의 축배를 들지 않았을까.
“다행이로군.”
혁권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쨌든 이걸로 확실하게 남자친구라고 인정을 받은 셈이니까, 오늘은 샴페인이라도 한잔해야겠는걸.”
“네? 남자친구라니……?”
“어?”
“우리 사귀고 있는 거였어요?”
끼이익!
급브레이크를 밟은 덕분에 차가 크게 출렁거렸다.
“잠깐만.”
혁권이 크게 당황한 얼굴로 소현을 돌아보았다.
“사귀고 있는 거냐니. 그럼 여태까지 뭐라고 생각한 거야?”
그가 이렇게까지 낭패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스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함께한 식사와 데이트가 몇 번이던가.
자연스럽게 천천히 진도를 빼면서 연인으로서의 코스를 밟아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싶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 소현은 별 감정이 없는데 저 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던 걸까.
아니, 그렇진 않을 거다.
선물도 기쁘게 받아 주었고 무척 소중하게 다루겠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비록 장난스러운 말투이긴 했지만 애인이라고 불렀더니 굳이 부정도 하지 않고 함께 장단을 맞춰 주기까지 했는데.
혁권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소현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그럼 저희 사귀고 있는 거였어요? 언제부터?”
“그건, 굳이 말 안 해도 알 수 있는 거잖아.”
가랑비에 옷자락이 젖듯 서서히 물들어 가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부터 사귑니다, 하고 대체 누구에게 선언한단 말인가.
“난 소현도 나랑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럼 여태까지는 전부 장난이었냐고 그가 알 수 없는 배신감에 몸서리치자 소현의 비명 같은 외침이 뒤따랐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소현의 얼굴이 혁권의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마음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거니까, 난 말해 주지 않으면 모른다고요. 단 한 번도 제게 좋아한다고 해 준 적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확신할 수가 있어요?”
“……!”
혁권은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소현에게 예쁘다, 사랑스럽다고 몇 번이고 속삭였어도 가장 중요한 말은 입 밖으로 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건 무엇보다 먼저 했어야 하는 대사가 아닌가.
혁권이 황급히 안전벨트를 풀고는 비상등을 켠 채 차문을 열었다.
“어디 가요!”
그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뒤따라 내리려는 소현을 혁권이 만류했다.
“5분, 아니 10분만 시간을 줘.”
“네?”
“금방 돌아올게!”
차는 안전한 갓길에 세워 뒀기 때문에 갑자기 견인될 걱정은 없었다.
무작정 내려서 일단 주변을 둘러본 혁권은 찾는 가게가 없는 것에 혀를 찼다.
평소엔 잘만 보이더니 꼭 이럴 때만 눈에 띄질 않는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무작정 물어본 혁권은 가죽 구두에 흠집이 지저분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아스팔트를 달렸다.
그러다 마침내 찾은 꽃집에서 그가 요구한 것은 딱 하나였다.
“장미 꽃다발을 만들어 주세요. 아주 커다란 걸로!”
순간 당황한 여주인이 뒤로 주춤 물러났지만 이내 서두르는 듯한 혁권의 표정을 보곤 대강 사정을 짐작한 것처럼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여자 친구한테 줄 선물인가 보죠?”
“네. 제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어쨌든 부탁합니다. 이 가게에 있는 장미는 모두 제가 사죠.”
“저, 전부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다 못 들고 가실 텐데요.”
제대로 앞도 안 보일 거라고 걱정하는 여주인의 말에도 혁권은 막무가내였다.
그리하여 완성된 거대한 꽃다발을 들고 차로 돌아오자, 소현이 이게 뭐냐며 그를 놀란 얼굴로 맞이했다.
혁권은 조수석의 문을 열고 반쯤 몸을 내민 소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왜 그래요? 어서 일어나요.”
옷 다 더러워진다며 울상을 짓는 소현에게 혁권이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소현아.”
“네?”
“좋아해. 나랑 사귀어 줄래?”
“…….”
뜻밖의 말에 소현이 양 손으로 제 입을 감쌌다.
“내가 생각이 모자랐어. 원래대로라면 진작 말하고 허락을 구했어야 했는데…….”
“그런…….”
소현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렇게 거창한 걸 바란 게 아니었어요. 전 그저…….”
“알아.”
이건 단순히 사과의 표시일 뿐이다.
혁권이 맘 편하게 있는 동안 혼자서 속을 끓였을 소현에게 미안함과 감사를 담은 꽃다발이었다.
차 안에서 손을 붙잡고 말 한마디 내뱉는 것으로 끝냈을 수도 있지만, 입 발린 말로 대충 상황을 얼버무리는 것은 소현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물론 혁권 역시 그런 식으로 소현을 대하고 싶지 않았고.
적어도 좋아하는 사람에겐 성심 성의껏 진심을 내보여야 한다고,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대답은?”
소현의 커다란 눈을 깜박이면서 혁권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장미 꽃다발에 파묻혀 얼굴은 고사하고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지만, 더러운 바닥에 무릎까지 꿇고 소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캔디를 베어 문 것처럼 소현의 입가에 행복한 웃음이 퍼져 나갔다.
“대답은 물론 예스예요.”
장미 꽃다발을 받아 든 소현이 향기를 맡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녀의 양팔로 안고 있기에는 꽃다발이 너무 커서 흩어진 장미 꽃잎이 치마와 발아래를 붉게 장식했다.
불어온 바람이 소현의 머리카락을 살랑이고, 짙은 장미 향기가 사방을 가득 메우며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아마 지금 이 광경을 평생 잊을 일은 없으리라.
혁권은 눈물이 글썽거리는 얼굴로 그를 향해 웃는 소현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