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45
345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또다시 이런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으며 좋겠군요.”
-그 점은 염려하시지 마십시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격이었지만 그래도 한번은 확실하게 짚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저들이 원하는 것이 뭡니까?”
-존슨 씨와 직접 대면해서 협상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습니다.
“나하고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상대가 자신과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말에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드러나는 것도 껄끄러웠지만 무엇보다 엘리엇 매니지먼트라는 거대한 헤지 펀드를 배경으로 둔 곳과 엮이는 게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썩 내키지 않는군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혁권이 말했다.
그러자 스텐저 변호사가 조심스럽게 그를 설득했다.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상 그냥 이대로 무시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렐리우스 매니지먼트 측에서 이번 재판에 훼방을 놓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헤지 펀드의 특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에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돈을 받아 내기 위해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군함까지 압류하며 대놓고 협박을 벌인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나오지 말란 법이 없지요.
혁권 역시 익히 잘 알고 있는 사건이었는데 이걸 시작으로 다각도로 아르헨티나 정부를 압박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결국 원하는 대로 거액의 돈을 뜯어 낼 수 있었다.
당시 경제 위기와 외환 고갈로 휘청거리던 아르헨티나를 더욱 어렵게 만든 사건이자 헤지 펀드의 악랄함을 그대로 보여 준 일화였다.
이걸 떠올리자 더욱 오렐리우스 매니지먼트와 만나는 것이 꺼려졌다.
하지만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게 할 수는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만나 보도록 하지요.”
-염치가 없지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런 상황을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다른 일이 있어서 가능하면 빨리 만났으면 합니다.”
아예 안 볼 거라면 몰라도 결정을 내린 이상 압둘라흐만을 도와주러 가기 전에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쪽도 재판이 더 진행되기 전에 이야기를 끝내려고 할 테니 바로 반응이 올 겁니다.
혁권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화가 다 끝난 다음에 다시 연락 주십시오.”
-예.
전화를 끊은 혁권은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것처럼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됐건 상대와 만나기로 했지만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억지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에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채 혁권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날 오후.
압둘라흐만이 보낸 메일을 확인한 혁권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주문 물량에 살짝 놀랐다.
개인화기부터 박격포와 수류탄, 탄약 그리고 각종 피복류는 물론이고 이미 한차례 보내 줬던 전투식량까지 다시 주문을 했다.
1개 중대는 너끈하게 완전무장을 시킬 수 있는 물량이었는데, 액수로도 700만 달러나 됐다.
내역을 모두 확인한 혁권은 곧장 압둘라흐만한테 전화를 걸었다.
-날세. 물품 내역은 전부 받았겠지?
다짜고짜 물음부터 던지는 압둘라흐만의 말에 그도 인사를 생략한 채 대답을 했다.
“네. 그런데 물량이 꽤 되는군요.”
-그래 봤자. 이번에 넘겨줘야 되는 물량에서 일부분일 뿐이네.
“그렇군요.”
이것만 봐도 이번 거래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슬람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자존심을 걸고 벌이는 일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이란의 숨겨진 비수인 쿠두스가 개입해 압둘라흐만을 제거하려고 한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계획대로 대규모의 군수품이 넘어간다면 열세에 처해 있는 반군 세력이 다시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네. 열흘 뒤에는 화물을 가지고 이리로 와야 돼.
“상당히 촉박하군요.”
말을 하며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운송하는 시간까지 감안한다면 여유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그렇게 됐네. 물량 확보는 가능하겠나?
“되도록 만들어야지요.”
-자네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네.
날짜를 제대로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 될 텐데도 그런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돈은 바로 입금시켜 놨으니 확인해 보게.
“그러지요.”
-이야기를 해 놨으니 앞으로는 샤레프와 연락을 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어차피 현장에서 함께 손발을 맞춰 움직여야 되는 건 샤레프였기에 미리 의사소통을 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화물은 터키의 이스켄데룬Iskenderun으로 가져오면 되네. 거기서 샤레프와 합류해서 국경을 넘어갈 걸세.
이번에도 터키를 통해 시리아로 넘어가는 거였는데,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수니파 국가로 함께 연대를 하고 있는 데다 거리상으로도 최단 코스였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한 일이었다.
“화물은 한꺼번에 다 넘기는 겁니까?”
-굳이 위험을 두 번이나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규모가 커지면 그만큼 외부의 시선이 집중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숨긴다고 해서 저들이 눈치채지 못할 일도 아니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과감하게 움직이는 것이 더 낫다는 게 내 판단이네.
불안 요소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미 움직임이 노출된 상황이라면 압둘라흐만의 말대로 한 번에 승부를 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단단히 준비를 하고 오는 것이 나을 걸세.
“명심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대꾸한 혁권은 통화가 끝내고 뒤로 몸을 기댔다.
등받이에 무게가 실리자 의자가 끼익하는 소리를 내었다.
리야드 중심가에 있는 이슬람 사원.
압둘라흐만이 입원한 병원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곳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신도들이 드나들며 알라를 향해 기도를 올렸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예배 소리를 들으면서 기하학적인 무늬로 뒤덮여 있는 양탄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한 사내.
골격이 크고 단단하여 근육은 돌덩이와도 같았고 일반인의 두 배 정도는 될 법한 커다란 손의 피부는 여러 번 찢어졌다가 나은 흉터가 훈장처럼 남아 있었다.
바로 압둘라흐만의 첫째 아들인 샤레프였다.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샤레프 옆으로 압둘라흐만 조직의 간부인 모센이 다가왔다.
“도련님.”
고개를 돌린 샤레프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아봤나?”
“예. 테흐칸 대령이라는 자가 이번 일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테흐칸이라…….”
굳은 얼굴로 샤레프가 이름을 되새기는 가운데 모센이 말을 계속 이었다.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서 큰 활약을 한 인물로 지금은 시리아에 파견된 쿠두스 병력을 이끌고 있는 걸로 파악됐습니다. 보스를 노리고 포트사이드에 있던 창고를 불태우려고 한 것 모두 이란 정부의 뜻이 아니라 테흐탄 대령이 지시를 내린 거라고 합니다.”
그러자 샤레프가 작게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놈 혼자서 결정했을 리는 없어. 윗선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순히 밀수 상인 하나를 제거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의 의뢰를 받은 일인 데다 수도인 리야드 시내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한 호텔에서 그것도 대낮에 대놓고 습격을 벌인 건 사우디아라비아의 자존심을 그대로 짓뭉개는 행동이었다.
이런 걸 고작 대령 따위가 혼자 독단으로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살짝 말끝을 흐린 모센은 샤레프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정보에 의하면 쿠두스와 시리아 정부군 일부가 이들리브Idlib 북쪽 국경 지역으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샤레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들리브는 시리아 서북부에 터키 국경과 접해 있는 도시로 반군 세력의 주요 거점 중 한 곳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지원해 주는 온건파 반군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도시로 이번에 가져가는 군수품의 최종 도착지였다.
원래부터 전투가 치열한 곳이기는 했지만, 모든 관심이 55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알레포로 집중되면서 약간은 소강상태를 이루고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새로운 군 병력의 움직임이 보인다는 건 누가 봐도 목표가 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릴 노리는 거군.”
“그렇다고 봐야 될 겁니다.”
부담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샤레프는 전혀 그런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강한 자신감을 내비췄다.
“흥, 어디 덤벼 보라고 해. 이번에 당한 것까지 더해서 확실히 빛을 되갚아 줄 테니까!”
“……이란의 숨겨진 비수라고 불리는 쿠드스입니다. 너무 가볍게 보지는 마십시오.”
상대를 무서워하지 않는 샤레프의 대담함은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용기와 만용은 겨우 종잇장 차이에 불과하니 모센은 그것이 염려스러웠다.
“나도 알고 있어.”
아랫사람에게 충고를 받는 것이 탐탁지 않은 듯 샤레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심기를 거슬려 버린 것 같군.’
모센은 속으로 혀를 차며 고분고분하게 머리를 숙였다.
“주제넘은 이야기를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시선을 거둔 샤레프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병은 얼마나 모였나?”
“현재까지 쉰 명을 구했고 출발 전까지 말씀하신 숫자를 전부 모을 수 있을 겁니다.”
“어중이떠중이들로 머릿수만 채워서는 안 돼.”
“염려 마십시오. 실전 경험이 많은 이들로 골라서 뽑고 있습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최고들로만 인원을 구성하도록 해.”
“옛.”
이 시점에서 양쪽 모두 한차례 격렬한 싸움을 벌이게 될 거라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샤례프는 여기서 확실하게 복수를 하며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다질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야기해 봐.”
“함께 움직이기로 되어 있는 존슨은 새로 주문한 화물을 가지고 이스켄데룬로 바로 와서 합류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샤레프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한 거야?”
“아닙니다. 보스께서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샤레프는 짧게 혀를 찼다.
“쯧. 아버지께서는 날 못 믿으시는 모양이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객식구를 끼워 넣으시니 하는 말이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미 한차례 반군과 거래를 한 경험이 있어 시리아 쪽 상황에 밝으니 도련님을 잘 보좌하라는 의미로 불러들인 걸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시선을 받은 모센은 괜히 혁권한테 반발심을 가지지 않도록 애써 샤레프를 달랬다.
“물론입니다. 도련님을 믿고 신뢰하시니 이번 일을 맡기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모센을 바라보던 샤레프는 이내 기도를 하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준비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또다시 놈들한테 허를 찔리는 일이 없게 주변 경계를 단단히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모센의 대답을 들은 샤레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예배당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