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46
346
함께 길거리를 걷다가 유독 찬 바람이 많이 부는 쌀쌀한 날씨에 두 사람은 몸을 녹일 겸 제일 먼저 보이는 가까운 매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으, 추워.”
“눈이 오려나.”
절기상으로는 추위도 한풀 꺾여야 정상이건만 아직 두꺼운 코트가 필수일 정도로 추웠다.
닫힌 유리문 너머로 휭휭 부는 바람 소리가 매섭게 울렸다.
갑자기 따뜻한 곳으로 들어와 빨갛게 변한 소현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면서 혁권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살 거라도 있어?”
“별로 없는데. 바로 나가기 싫으니까 그냥 좀 둘러봐요.”
가게는 여러 스포츠 브랜드의 신발이나 의류를 모아 놓은 편집숍이었다.
유럽의 클럽 같은 데서 흔하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리듬감 있는 여성 보컬과 가볍게 쿵쿵거리는 드럼 소리가 혼합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벽에는 유명 스포츠 선수가 찍은 커다란 브로마이드가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소현은 꾸준히 운동으로 몸매를 가다듬고 있었으니 스포츠 의류에 제법 관심이 가는지 그쪽으로 향했다.
“아.”
잡화 쪽을 뒤적거리던 소현이 혁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것 봐요. 귀엽죠.”
소현이 가리킨 것은 반들거리는 방수 재질의 크로스와 숄더를 겸하는 여성용 가방이었다.
모양은 에코백이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여름을 겨냥해서 나온 상품인지 선명한 푸른색 바탕에 화려한 야자수와 꽃무늬가 인쇄되어 있었다.
“갖고 싶어?”
“으음~ 어쩔까. 비슷한 사이즈의 가방이 하나 있긴 한데 아직 멀쩡하거든요. 근데 작년 이월 상품이라 가격이 싸니까…….”
쪼그려 앉은 자세로 소현이 짐짓 진지하게 고민했다.
“괜한 걸로 고민하기는. 내가 사 줄게.”
“어, 진짜요?”
“나 참. 여자 친구한테 이 정도도 못 사 주는 남자가 어디 있어.”
“헤헤.”
여자 친구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소현이 눈을 접어 가며 배시시 웃었다.
“기왕 들어온 김에 필요한 거 있으면 더 골라.”
“와아~!”
두 손을 들고 기뻐하는 소현의 모습에 혁권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여자들은 운동하면 이런 것도 챙겨야 하지 않아.”
옆면 벽에 진열되어 있는 스포츠 브라와 레깅스 들을 보면서 혁권이 말했다.
아무래도 여성용이다 보니 쉽게 손을 대지 못하고 그냥 눈짓으로만 가리키는 게 꼭 속옷 매장에 혼자 온 사람처럼 약간 어색한 태도였다.
“그런 건 집에 다 있어요. 예비용으로 미리 사 둔 것도 넉넉하고…….”
“흐음.”
기왕 사 준다고 말을 꺼냈으니 뭐 더 손에 쥐여 줄 게 없을까 하고 고개를 돌리던 혁권은 운동화 코너에서 시선을 멈췄다.
“운동화는 아예 안 신어? 가끔은 발도 편하게 해 줘야지.”
직업이 직업인지라, 높은 구두 때문에 발바닥이 아프다며 지압 마사지도 받으러 다닌다는 소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뭔 소리예요. 당연히 자주 신죠.”
“그래? 난 거의 못 본 거 같은데.”
“그거야 오빠를 만나는 건 데이트니까 잘 보이려고 하는 거고요.”
외출 준비에만 3시간이 걸리는 여자들의 고충을 아냐며 소현이 핀잔을 주었다.
“운동화 사 주게요?”
“음. 난 이게 괜찮은 것 같아.”
혁권은 하얀색에 분홍빛 포인트가 들어있는 동글동글한 모양의 운동화를 가리켰다.
“하얀색은 때 많이 타는데…… 응, 귀엽긴 하네요.”
“그치?”
역시 자신의 안목이 탁월하다고 혁권이 콧대를 높였다.
“이거 보니까 또 몸이 찌뿌둥하네. 아, 운동하고 싶다.”
“계속 다니는 거 아니었어?”
“전부 실내 운동뿐이잖아요. 날이 따뜻할 때는 한강까지 가서 달리기도 하고 도연이랑 같이 배드민턴도 치고 이것저것 많이 했는데 요즘은 추우니까 아무것도 못 했거든요.”
“하긴, 안에서 하는 거랑 밖에서 하는 건 많이 다르지.”
운동화와 가방을 들고 카운터로 향하는 소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혁권은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면서 말했다.
“그럼 오늘은 같이 운동하면서 데이트할까. 밥 먹고 카페에 앉아서 쉬는 것도 좋지만, 나도 요즘 몸이 좀 굳은 것 같아서 땀을 좀 빼고 싶거든.”
“하지만 어디로 가게요? 게다가 옷도 외출복인데.”
혁권은 여느 때처럼 롱코트에 얇은 니트와 셔츠를 겹쳐 입은 차림이었고 소현은 벨트로 날씬한 허리를 강조한 원피스였다.
이런 옷을 입곤 무슨 운동이냐며 의아한 눈초리를 하는 소현에게 혁권이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이 근처에 실내 스케이트장이 있잖아. 천장이 있는 건 똑같지만 꽤 넓기도 하고 전신의 근육을 다 쓰는 운동이니까 몸 푸는 덴 딱이지.”
“정말요? 나는 있는 줄도 몰랐는데…….”
어떻게 알았냐는 소현의 물음에 혁권은 오가다 간판을 봤다며 대답했다.
마침 되풀이되는 데이트 코스에 슬슬 질리기도 하던 참이었으므로 소현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스케이트장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선불 요금을 지불하고 3층으로 올라오니 안에는 벌써 많은 수의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여기서 신발 갈아 신자.”
두 사람은 벤치 식으로 된 나무 의자에 앉아 머리에 안전모를 착용하고 대여용 스케이트 화를 신었다.
“으으, 어떡해. 넘어질 것 같아요.”
“처음이야?”
소현이 반쯤 우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내 손 잡고 일어서.”
든든하게 받쳐 주는 손에 소현이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밑에는 얇은 카펫 같은 것이 깔려 있어서 많이 미끄럽지 않았기 때문에 소현도 어기적거리며 걸음을 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일단 빙판장 안으로 들어서자, 첫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뒤로 휘청한 소현은 죽는 소리를 내면서 봉을 잡고 낑낑거렸다.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덜덜거리는 게 마치 갓 태어난 아기 고라니와도 비슷해 보였다.
다 큰 성인이 쩔쩔매는 모습이 우스웠는지 옆을 지나가는 초등학생들이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에 소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엄마얏!”
어떻게든 저 혼자 힘으로 해 보려다가 훅 하고 몸이 넘어가는 순간, 소현은 제 허리를 붙잡고 끌어당기는 힘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험하잖아.”
쯧, 혀를 차는 소리와는 달리 표정은 재밌는 걸 봤다는 것처럼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비웃지 말아욧!”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가슴팍을 팍 치는 주먹이 아플 법도 하련만 혁권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소현을 바로세워 주고 안전봉을 잡게 했다.
“괜찮아. 중심만 잘 잡으면 넘어지지 않을 거야.”
마치 초보자가 절대 할 수 없는 난이도의 그림을 그려 놓곤 ‘참 쉽죠?’라고 하는 누군가를 연상케 하는 발언이었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요. 몸이 말을 안 들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도와준다잖아.”
혁권은 소현의 양손을 잡고 부모가 아기의 첫 걸음마를 도와주는 것처럼 일단 바로 서는 방법부터 가르쳤다.
“스케이트도 자전거랑 마찬가지야. 처음엔 뒤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줘야 하지만, 일단 요령이 몸에 익기만 하면 그다음은 아주 쉬워.”
다정한 말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소현은 대뜸 도끼눈을 치떴다.
“그딴 말 하면서 갑자기 손 놓으면 헤어질 각오해요.”
평생 용서하지 않겠다는 살벌한 눈초리였다.
“하하. 그럴 리가.”
혁권은 안심하라는 것처럼 잡고 있는 손등을 토닥이고는 슬슬 다리를 움직였다.
“꺗! 우, 움직이지 말라니까!”
“하루 종일 서 있을 수는 없잖아. 자, 용기를 내 봐.”
“아직 괜찮거든요! 익숙해질 시간은 줘야…… 자, 잠깐만요!”
스케이트 날이 제멋대로 미끄러지면서 몸의 중심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잡아 주는 손이 없었다면 몇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고도 남을 기세였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잔뜩 줬더니 벌써부터 허벅지가 근육통으로 욱신거리는 듯한 기분이다.
“그렇게 긴장하고 있으면 오히려 더 다쳐. 자연스럽게 미끄러진다는 감각으로.”
“이……잇!”
“옳지, 잘한다.”
“멋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죠! 으악!”
넘어질 것처럼 하면서도 혁권이 절대 놓지를 않으니 줄타기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감각이 이어졌다.
차라리 시원하게 바닥에 엉덩이를 찧고 좀 쉬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몸이 휙 젖혀질 때마다 혁권이 받쳐 주니까 오히려 몸의 긴장이 풀어질 새가 없었다.
말하자면 매를 맞기 전의 제일 부들부들 떨리는 시간이 끝없이 쭉 이어지는 기분?
온갖 비명과 욕을 내지르면서 1시간을 꽉 채운 뒤, 소현은 마침내 스파르타식 강습에서 해방되어 땀으로 흠뻑 젖은 모자를 벗었다.
“어때, 재밌었지?”
“이…… 그걸 말이라고 해요!”
퍽, 정강이를 걷어차인 혁권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왜?”
“사람이 다 죽어 가는데 말이야, 쉬게 해 주진 못할망정 계속하라고 등을 떠밀고!”
“그, 그래도 결국엔 스케이트를 잘 타게 됐잖아. 원래 그런 식으로 해야 빨리 느는 법이라고.”
“됐네요. 두 번 다신 안 올 거야.”
소현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난 소현이 네 생각해서 멍 안 들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예에. 대신에 악 쓰느라 목이 갔지요.”
소현이 일부러 들으라는 것처럼 기침을 쿨럭거렸다.
실제로 노래방을 한바탕 뛰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목이 칼칼했다.
“마실 거 없어요? 아, 힘을 썼더니 배가 고프네.”
빙상장 바깥에는 수업을 들으러 오는 꼬맹이들과 일반 손님들을 대상으로 해서 약간의 주전부리를 파는 분식집 같은 가게가 있었다.
푸드 코트 식의 딱딱한 테이블에 앉아 떡볶이 2인분과 따뜻한 오뎅 국물을 순식간에 해치운 두 사람은 다 먹은 그릇을 앞에 두고 부른 배를 두드리면서 동시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휴우. 아, 그렇지.”
소현이 가방에서 영화 포스터를 꺼냈다.
“우리 다음엔 이거 보러 가요. 재개봉하는 건데, 지수가 명작이라면서 꼭 보라고 추천하더라고요.”
“영화?”
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혁권을 만나기 전에는 많아 봐야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극장을 들를까 말까 했는데, 아무래도 서울 시내에서 할 수 있는 데이트 코스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요즘엔 영화도 자주 보게 되었다.
“날짜가…… 아, 이번 주 주말이네.”
“주말엔 시간 안 돼요?”
“으음, 그게 아니라…….”
혁권이 잠깐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주에 또 출장이거든.”
“에에~.”
처음 듣는 소리라며 소현이 볼을 부풀렸다.
“그게 뭐예요? 저번에 갔다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미안. 근데 중요한 바이어랑 꼭 만나서 얘기해야 될 일이 있거든.”
“하아, 일이니까 어쩔 수 없죠…….”
나름 기대했던 일정이라 의기소침해지긴 했지만 소현도 그 정도는 이해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여 수긍했다.
하긴 소현도 해외 촬영 일정이 잡히면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입장인데, 그걸 가지고 애인이 일이 중요하냐 내가 중요하냐 하면서 발목을 잡으면 곤란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쉽다. 나도 못 본 작품이라서 꼭 같이 보고 싶었는데…….”
“대, 대신 선물 많이 사 올게. 응?”
“누가 선물 받고 싶어서 그런담.”
입술을 삐죽이긴 했지만 기분이 조금 풀리기는 했다.
사실 선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혁권이 이렇게 제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는 게 더 좋았다.
“그래서 이번엔 어디로 가는데요?”
“터키.”
“어휴, 또 먼 데로 가네.”
저번처럼 통화도 자주 못 하겠다며 소현이 툴툴거렸다.
“사진 많이 찍어서 보내 줄게.”
“그러든가요. 본인이 직접 오는 게 천배백배 낫지만…….”
사진 따위론 외로움을 달랠 수 없다며 고개를 홱 돌려 버리는 소현을 달래느라 혁권은 한참 동안이나 진땀을 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