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69
369
단호하게 제안을 거절했던 카바트 사령관이 그를 다시 찾아온 건 그날 밤 9시 무렵이었다.
시끄럽게 두들겨 대는 노크 소리에 객실 문을 열자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호위병들을 뒤에 거느린 채 카바트 사령관이 서 있었다.
옆으로는 언제 일어났는지 자말과 부하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와 있었다.
심상치 않는 분위기에 정색을 한 혁권은 앞에 있는 카바트 사령관을 바라보면서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잠시 조용히 둘만 이야기를 하고 싶소.”
“…….”
낮에 지휘소에서 봤을 때와 달리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걸 본 혁권은 잠자코 옆으로 길을 비켜 줬다.
그러고는 객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 전에 슬쩍 자말과 시선을 맞추고는 괜찮으니까 그냥 있으라는 눈짓을 했다.
문을 닫은 혁권은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카바트 사령관을 보면서 한쪽 팔을 들어 소파를 가리켰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작게 머리를 끄덕인 카바트 사령관이 소파로 가서 앉았다.
맞은편 자리로 간 혁권은 상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카바트 사령관이 침묵을 깨면서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날 찾아와서 했던 제안 말인데, 아직까지 유효한 것이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혁권은 몸을 똑바로 세우고는 상대를 쳐다봤다.
“그사이 마음이 바뀌신 이유가 뭡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카바트 사령관이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자유시리아군 지휘관인 카말이 살해를 당했소.”
카말이라면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도 누군지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자유시리아군 서열 3위에 들어가는 자로 이들리브와 가까운 시리아 서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반군 지휘관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혁권은 두 사람이 뭔가 모종의 약속이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카바트 사령관이 침통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카말이 부대를 이끌고 오면 안과 밖에서 협공을 가해 정부군을 격퇴시킬 계획이었는데, 모두 다 허사가 되어 버렸소.”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겁니까?”
그러자 카바트 사령관이 이를 부드득 갈면서 분노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미친놈들처럼 날뛰는 IS의 짓이오.”
“아니, 왜……?”
서로 가지고 있는 이념이 달라 가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사드 정권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기에 IS가 온건 반군 세력의 핵심 인물인 카말을 왜 살해했는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서 반군 진영 내부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진다면 시리아 정부군한테만 좋은 일이었다.
이어진 이야기에 혁권의 의문이 바로 풀렸다.
“서방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그동안의 협력 관계를 끊고 거리를 둔 걸 가지고 앙심을 품고 이런 악랄한 짓을 벌인 것이오.”
“그렇군요.”
온갖 전쟁 범죄를 자행하고 있는 시리아 정부를 비난하면서도 리비아 때하고 달리 서방국가들이 적극적으로 반군을 돕지 못하는 건 자칫 지원해 준 무기와 물자가 테러 단체인 알카에다와 IS로 흘러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자국을 상대로 악랄한 테러를 벌인 두 단체에 무기를 쥐여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반군 역시 통제 불능인 데다 너무 과격한 IS를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지원이 늦어지자 이란과 러시아의 도움으로 전열을 재정비한 정부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해 전략 거점인 홈스를 빼앗기며 다마스쿠스 진격이 좌절되고 말았다.
다급해진 온건 반군 세력들은 지원을 받기 위해 서방에서 요구하는 대로 IS와 거리를 뒀고 그걸 상대는, 이교도에 굴복하고 배신한 거라 여기며 반군 지도부를 타도 대상으로 지목하면서 양쪽의 반목이 더욱 심화됐다.
“낮에 이야기했던 대로 도와줄 수 있겠소?”
그를 바라보는 카바트 사령관의 얼굴에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유일한 희망이 꺾인 지금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끝이 어찌 될 거라는 걸 카바트 사령관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고심을 한 혁권이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입술을 뗐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넘겨주기로 한 물자를 가져오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카바트 사령관이 상관없다는 듯이 한쪽 팔을 가볍게 내저었다.
“도시를 탈출하기로 한 이상 짐밖에 되지 않으니 괜찮소.”
“그래도 약속한 것이 있으니 다른 곳에 다시 자리를 잡으면 그때 물자를 넘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준다면 나야 고마울 뿐이오.”
만약 계획이 성공해서 포위망을 뚫고 이들리브를 탈출할 수 있다면 어딜 가건 다시 기반을 다지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보급품이었기에 카바트 사령관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준비가 모두 갖춰지면 바로 이야기를 드리도록 하지요.”
“타이거 그놈이 오기 전에 일을 벌였으면 좋겠소.”
“저도 같은 생각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럼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소.”
소파에서 일어난 카바트 사령관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객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카바트 사령관 일행이 떠나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얼마 있지 않아 자말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혁권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뭣 때문에 갑자기 찾아온 겁니까?”
소파에 앉은 채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 위에 올린 혁권은 앞에 선 자말을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계획이 바뀌었어.”
“예?”
“함단한테 연락해서 화물을 수송기에 적재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해.”
“그러면 내일 운반을 다 못 끝낼지도 모릅니다.”
등을 소파에 깊게 묻은 혁권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분간 이스켄데룬에 화물을 놔둘 거니까 상관없어.”
자말이 정색을 하며 그를 바라봤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제때 화물을 공수해 오기 위해서 겨우 준비를 다 끝내 놨는데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하니 자말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설명을 원하는 자말의 시선에 혁권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화물 대신 폭탄을 실고 와서 반군을 도와줄 거야.”
“예? 지금 폭탄이라고 하셨습니까!”
자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래.”
너무 놀라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는 자말과 달리 혁권은 담담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반군이 포위망 돌파를 시도할 때 폭탄을 떨어뜨려 주기로 했어.”
“저희가 가지고 있는 건 수송기뿐인데 어떻게 폭격을 해 준다는 말씀이십니까?”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말도 있잖아.”
다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혁권이 말했다.
“그보다 내가 말한 대로 함단에게 빨리 연락을 해 줘.”
“알겠습니다.”
뭔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자말은 결국 포기하곤 얌전히 대답한 뒤 객실을 나갔다.
그리고 혁권은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잠시 생각했다.
탁, 타닥.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리고, 잠시 후 위성전화기를 꺼낸 혁권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시리아의 내전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벌써 난민의 수만 100만 명이 넘었으며, 시리아 인근의 국가들은 국경 경비를 두 배로 강화했다고 발표했으나 사실상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난민들을 막을 수가 없어 크고 작은 사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흘러 넘기던 소리들 중 소현의 발걸음을 잡아끄는 단어가 있었다.
“설마 오빠가 저런 곳에 있는 건 아니겠지.”
소현은 무심코 지나가려던 발을 멈춰 TV 화면을 지켜보았다.
앵커의 목소리와 함께 화면에서는 탱크가 대포를 발사하는 장면, 시가지의 벽들이 부서지는 모습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난민으로 추정되는 어린아이가 이불도 없이 맨 바닥에 앉아 지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줌인되었을 때는 소현도 인상을 찡그렸다.
소현이 있는 자리는 이리도 평화로운데, 바다 건너 어딘가 에선 저렇게 처참한 생활을 보내는 어린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죄책감과 함께 동정심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동시에 드는 생각.
“그리스에서 터키로 넘어갔다고 했는데…….”
소현은 손에 들고 있던 따뜻한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양손으로 꼭 부여잡았다.
터키라면 지금 뉴스에 나오는 시리아하고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인 데다 내부 정치 문제와 난민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뒤섞여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사업 때문에 간 거니까 위험한 장소에 있을 확률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리고 어제 혹시 몰라 인터넷으로 찾아봤을 때까지 터키는 여행 경보가 내려져 있지 않았으니까, 어느 정도 치안이 확보되어 있다는 뜻일 터였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게 속으로 자신을 안심시키듯 거듭 되뇌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야, 안 오고 뭐 해?”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잖아.”
함께 백화점에 왔던 두 친구가 뒤늦게 멈춰 있는 소현을 발견하곤 다가왔다.
“아, 미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뭔데?”
지수가 궁금한 듯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이미 시리아 내전에 관한 뉴스가 끝나고 화면은 한 주간의 스포츠 소식을 전하는 화면으로 넘어가 있었다.
“골프에 관심 있었어?”
“아니야. 벌써 지나가 버렸네.”
소현은 잡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것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꾸물거려서 미안. 도연이 원피스 사러 가야 되지? 얼른 위층으로 올라가자.”
그러면서 소현은 친구들을 재촉해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쪽으로 급히 몸을 돌렸다.
지하철과 연결되어 있는 지하층은 한창 프로모션 중인 신형 TV가 벽면을 한가득 메운 덕분에 쇼핑 중간에 쉬고 싶은 남편들과 그 손을 잡고 따라온 어린아이들로 북적거렸다.
소현은 어느덧 식은 커피를 크게 한 모금 삼키고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어두운 안색을 보곤 작게 한숨 쉬었다.
이래서야 친구들에게 민폐만 끼치게 생겼다.
‘안 돼. 표정 관리를 해야지.’
소현은 벌써부터 사서 걱정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잡고는 짐짓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터키 남부 인시를릭 공군기지(İncirlik Hava Üssü).
이스켄데룬과 함께 나토NATO의 핵심 공군기지 중에 하나로 미 공군의 관리하에 핵폭탄인 B61 수십 발이 보관되어 있는 전략 거점이었다.
중동 지역이 혼란해지자 내전 상태인 시리아와 이라크의 테러 단체를 폭격하는 나토 공군기들의 출격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했다.
어둠에 잠긴 인시를릭 공군 기지에 커다란 수송기 한 대가 관제탑의 통제를 받아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반짝이는 신호봉을 든 통제병의 신호에 따라 천천히 주기장으로 진입한 수송기는 콘크리트로 만든 강화 셔터가 늘어서 있는 곳 앞에 멈춰 섰다.
양쪽 날개에 붙어 있는 엔진을 완전히 끈 이반은 전면 방풍창 너머로 시커멓게 형체만 보이는 주변 건물들을 둘러보면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하다하다 미군 기지까지 올 줄은 몰랐군.”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알란이 약간 긴장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나갔다가 올 테니까 자리를 지키고 있어.”
“네.”
헤드셋을 벗어 한쪽에 놔 둔 이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종실을 나갔다.
아래로 내린 후방 램프를 통해 수송기에서 내리자 전투복에 대위 계급장이 붙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미군 장교가 한 명 다가왔다.
“임시 레일을 설치하고 물건을 적재하는 데 대략 2시간가량 소모될 겁니다.”
무뚝뚝한 말투로 다짜고짜 용건부터 이야기하자 이반 역시 별다른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여긴 보안 구역이 많으니 작업을 하는 동안 주위를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알겠소.”
할 말을 다 끝낸 미군 장교는 몸을 돌려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뭐라고 크게 소리를 쳤다.
그러자 병사들이 준비되어 있는 자재들을 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작업을 시작했다.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던 이반은 약간 떨어진 곳에 커다란 폭탄들이 운반 차량에 실려 있는 걸 보곤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