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77
377
얼마 뒤 화보 촬영이 모두 끝나자 스태프들은 혁권이 예약해 둔 호텔 일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입맛에 맞게 한식을 먹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이 호텔에는 한식당이 없었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그것도 한국 대기업이 운영하는 최고급 호텔에 한국 음식을 만들어서 파는 식당이 없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안내를 받아 일행이 넓은 별실로 들어가자 길게 붙인 테이블에 미리 기본 밑반찬들이 깔려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사시미와 함께 여러 종류의 초밥이 푸짐하게 나왔다.
야채 장식으로 예쁘게 꾸며진 회 접시에는 광어와 농어, 도미에 비싸다는 참치까지 놓여 있었다.
특히 참치에는 살짝 금가루까지 뿌려져서 한층 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기다가 다른 접시에 함께 나온 모듬 해산물 역시 전복 같은 고가의 해산물로 구성되어 있었고, 당근으로 만든 나비와 꽃장식이 한데 잘 어울러져 마치 음식이 아니라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줬다.
대충 저렴한 회나 탕 종류가 나올 줄 알았던 일행은 정말 제대로 된 대접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야, 이게 다 뭐야?”
“오늘 소현 씨 덕분에 위장이 호강하겠는데요.”
“잘 먹을게요!”
“아. 예. 많이들 드세요.”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 스태프들의 말에 웃으며 대꾸를 한 소현은 옆에 서 있는 혁권을 보곤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뭘 이렇게 비싼 것들을 시켰어요?”
“내가 원래 먹는 건 아끼지 말자는 주의거든.”
어깨를 으쓱이면서 혁권이 하는 대답에 소현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죠.”
그러자 혁권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곤 부드럽게 이야기를 했다.
“괜히 돈을 아끼려다가 안 좋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이렇게 머릿속에 대접을 받았다고 확실히 각인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나아.”
“맞는 말이기는 한데, 오빠가 부담될까 봐 그러죠.”
“너한테 쓰는 건 아까운 것이 없다고 했잖아.”
무심코 툭하고 던지는 말에 소현은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고맙기는 한데 앞으로는 이러지 마요.”
“알았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인 혁권은 사케를 들고 스태프 한 명 한 명한테 가서 술잔을 채워 주면서 소현을 잘 부탁한다며 이야기를 했다.
왕년에 회사를 다닐 때 접대를 했던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내면서 금방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며 소현을 제대로 서포트해 줬다.
정말로 에이전시 관계자인 것처럼 그녀를 위해 행동하는 모습에 소현은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오피스텔 건물 앞에 도착하자 뒷좌석에 앉아 있던 혁권은 어깨에 기대 깜빡 잠이 든 소현을 가볍게 흔들어서 깨웠다.
“소현아, 다 왔어.”
그러자 소현이 유난히 긴 속눈썹이 도드라져 보이는 눈꺼풀을 올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으음. 어디예요?”
“오피스텔 앞이야.”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봐요.”
“오늘 화보를 찍느라 많이 피곤했나 보지.”
소현이 귀엽게 혀를 살짝 내밀면서 대답했다.
“조금 그러긴 했어요. 몇 시간을 물속에 있었던 데다 아침 일찍 밥도 거르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했었거든요.”
“오늘 보니까 체력 소모가 장난 아니던데, 아무리 바빠도 밥은 챙겨 먹어야지. 그러다가 쓰러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더군다나 수영복 화보라서 비키니도 입어야 되는데 똥배가 나오면 안 되잖아요.”
“똥배가 어디에 있다고…… 오히려 너무 말라서 걱정이거든.”
“오빠가 몰라서 그러는데 나보다 마른 모델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44사이즈 몸매가 뭐 그냥 만들어지는 줄 알아요.”
“너무 마른 거보다 건강한 몸이 더 좋아.”
“칫.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몸매 좋은 여잘 싫어하는 남자는 못 봤네요.”
“난 아니라니까.”
“뭐, 그렇다고 해 둘게요.”
혁권은 난감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고 이렇게 가끔씩 보여 주는 귀여운 모습에 소현은 몰래 웃음을 삼켰다.
차에서 내리자 밤바람에 제법 쌀쌀하게 불었다.
오피스텔 입구까지 함께 걸어간 혁권은 소현의 얼굴을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감기 걸리겠다. 어서 들어가서 푹 쉬어.”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남자 친군데 내가 당연히 챙겨야 되는 거 아냐. 자꾸 그러니까 괜히 서운해지려고 그런다.”
“아니에요.”
“내일은 스케줄 없지?”
“오전에 운동하러 가는 것 말곤 없어요.”
“그러면 저녁에 영화나 보러 갈까?”
“좋죠.”
“알았어. 그럼 내가 예매를 해 놓을게.”
“그래요.”
비밀번호를 누르자 오피스텔 현관 유리문이 좌우로 열렸다.
그 순간 고개를 돌린 소현이 가까이 다가와 옆에 서 있던 혁권의 입술에 먼저 가볍게 키스를 했다.
“어!”
혁권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소현이 얼른 말을 내뱉고는 건물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에요.”
잠시 멍하니 소현의 뒷모습을 바라본 혁권은 이내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에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던 감촉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자를 처음 사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모르겠군.”
조금은 어색하면서도 이런 감정이 싫지 않았다.
며칠 뒤. 혁권은 새로 론칭하는 주얼리 브랜드 매장을 내려고 매입한 건물을 둘러보기 위해 청담동으로 향했다.
“앞에 보이는 이 건물입니다.”
안내를 맡은 최정욱 대리의 말에 그는 대로변에 세워져 있는 3층 건물을 올려다봤다.
외벽이 통유리로 마감되어 있는 건물은 그동안 관리를 꾸준히 해 왔는지 전체적으로 깔끔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가 없는지 군데군데 오래된 부분이 눈에 띄었다.
“원래 있던 세입자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지?”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노른자위 상권답게 모든 층에 세입자들이 다 들어와 있었다.
1층만 해도 꽤 유명한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 매장이 영업 중이었다.
“이사 비용과 한 달 치 월세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다음 달까지 전부 비워 주기로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못 나가겠다고 하는 곳은 없고?”
“마침 재계약 시기인 데다 이사 비용을 후하게 챙겨 줘서 그런지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행이군.”
세입자하고 분쟁이 벌어진다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을 텐데 그런 것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가 됐다니, 어쩐지 조짐이 좋게 느껴졌다.
최정욱 대리를 따라 걸음을 옮긴 혁권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아직 리모델링 설계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1, 2층은 매장 그리고 나머지 3층은 사무실과 디자인실 용도로 쓸 예정입니다.”
이미 김덕현 전무한테 한차례 보고를 받고 결재까지 해 준 이야기였기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직 세입자들이 영업 중이었기에 혁권은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빠르게 주위를 살펴보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많이 좁군.”
버튼 위에 6인승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면서 혁권이 중얼거리자 최정욱 대리가 얼른 말을 받았다.
“엘리베이터 자체는 새로 교체한 지 4년밖에 안 된 거지만, 아무래도 층수가 낮고 오래전에 세워진 건물이다 보니까 설치 공간이 작아 소형을 놔둔 모양입니다.”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이거 하나뿐이지?”
“그렇습니다.”
대답을 들은 혁권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매장을 열면 손님들이 많이 드나들고 우리 직원도 이용해야 되는데 그건 문제가 있군. 리모델링 설계를 할 때 이것보다 큰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 뒤로도 건물을 둘러보면서 바꿔야 될 부분을 하나하나 지적했고, 최정욱 대리는 혁권이 이야기한 걸 모두 수첩에 빠짐없이 기록했다.
공실로 비어 있는 3층 사무실 한곳에 들어간 혁권은 팔짱을 낀 채 통유리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다른 곳과 달리 키가 높지 않은 건물들이 넓은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서 있고,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명품과 대기업 브랜드 매장이 빼곡하게 들어찬 모습이 역시 명품 거리라는 명칭에 어울렸다.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이곳에 자신의 명의로 된 건물을 가지게 됐다는 것에 혁권은 왠지 모를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월급쟁이에서 100억 대 건물 주인이 되다니 이 정도면 나도 성공했군.”
시에라리온에 위치한 다이아몬드 광산을 비롯해 이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 건물을 소유하게 되니 느낌이 또 달랐다.
잠시 감상에 젖어 있을 때 상의 안쪽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스마트폰을 꺼낸 혁권은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하고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여보세요.”
-미스터 존슨, 나 하즈사피요.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밝으신 걸 보니 요즘 사업이 잘되시는 모양이군요.”
-하하하. 존슨 씨 덕분이오. 지난번에 보내 준 차량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벌써 다 처분했소이다.
“그렇습니까? 그거 반가운 소식이군요.”
첫 거래 결과에 따라 차후 추가 오더가 예정되어 있던 거였기에 혁권은 반색을 했다.
-지난번 계좌로 잔금을 다 보냈으니 확인해 보시오. 그리고 이쪽에 구매 수요가 많아서 예정했던 것보다 차량을 추가로 더 빨리 들여와야 될 것 같소.
“그러시면 구체적인 물량과 품목을 보내 주십시오.”
-물량이 두 배 정도 늘어날 것 같은데 괜찮겠소?
“중고와 신차 양쪽 다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S모터스와 배도환 사장한테 확인을 해 봐야 했지만 혁권은 일단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가능합니다.”
-물량을 맞추기 어려울까 봐 걱정했었는데, 그거 다행이오. 바로 오더 메일을 보내도록 하겠소.
“그러십시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하즈사피가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필요한 물건이 하나 있는데 구해 줄 수 있겠소?
“뭔지 말씀해 보십시오.”
-프랫 앤 휘트니Pratt & Whitney사에서 제작한 TF-30P-414A 터보팬 엔진 20개를 가져다줬으면 좋겠소.
별생각 없이 이야기를 듣던 혁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건 전투기용 엔진이 아닙니까?”
-맞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F-14에 들어가는 제트엔진이오.
“……!”
F-14 톰캣 전폭기라면 이제는 모두 퇴역을 했지만 한때 미해군을 대표하던 기체였다.
이슬람 혁명 전까지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든든한 동맹국이었던 이란에 유일하게 50대가 수출됐었다.
팔레비 국왕 망명 이후로 미국 정부가 부품 수출을 금지하고 노후화가 진행되면서 가동률이 현저하게 떨어졌지만, 아직까지도 20대가 넘는 F-14 전폭기가 이란 공군의 주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마하 2.3의 빠른 속력과 우수한 레이더 덕분에 초장거리 교전이 가능한 기체였기에, 이란 정부에서 전투 상태를 유지하려고 미국의 금수 조치를 피해 암시장에서 필요한 부품을 구입해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자신한테 의뢰해 올 줄은 몰랐다.
적성국으로 분류되는 이란에 그것도 금수 물품을 몰래 넘기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특히나 지금은 수습이 잘됐지만, 이미 한차례 CIA와 충돌한 적이 있었던 혁권 입장에서는 더욱 껄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