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76
376
화보를 잘 찍으라면서 친구들이 보낸 메시지는 와 있었지만 정작 기다린 혁권한테는 아무것도 없었다.
“칫.”
살짝 서운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이고 있을 때 여자 스태프 한 명이 앞으로 다가와서는 말했다.
“이제 실내 촬영을 하신다고 다른 수영복으로 갈아입으시랍니다.”
“네.”
얼른 대답을 하며 선베드에서 벌떡 일어난 소현은 스태프를 따라 수영장 한쪽에 위치한 탈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화보 촬영이 진행 중인 호텔 입구에 검은색 벤츠 S클래식 세단과 포드 익스페디션 밴이 나란히 멈추어 섰다.
대기하고 있던 도어맨이 즉시 다가와서 차 문을 열어 주자 회사에 있어야 될 혁권이 선글라스를 낀 채 뒷자리에서 내렸다.
“여기야?”
높다랗게 세워져 있는 호텔 건물을 쳐다보면서 혁권이 묻자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던 백성균이 바로 대답했다.
“예. 잡지사에서 알려 준 대로라면 옥상에 위치한 야외 수영장과 바로 아래 실내 수영장에서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지만 그래도 아직은 쌀쌀한데 야외에서 수영복 촬영이라니 고생이 많겠군.”
아무리 계절에 앞서 화보를 촬영해야 된다고 해도 수영복 하나만 입고 추위에 떨 소현을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지시한 건 어떻게 됐어?”
“주문을 다 해 놨으니 시간에 맞춰서 가지고 올라올 겁니다.”
“착오가 있으면 안 되니까 다시 한 번 확인을 해.”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가 볼까.”
우르르 떼로 몰려가면 너무 시선을 끌었기에 혁권은 하킴과 백성균 둘만 대동한 채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쪽에 조명을 더 설치하고! 거긴 필터를 끼워서 은은하게 만들어!”
실내 수영장으로 자리를 옮긴 촬영 스태프들은 작가의 지시에 따라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런 가운데 커다란 수건을 둘둘 말고 소현이 나타나자 손가락으로 조명 위치를 세팅하고 있던 사진작가가 마침 잘 왔다며 양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아까 거랑 다른 수영복이지?”
그 말에 소현이 수건을 벗고 입은 옷을 보여 주었다.
가슴 부분이 깊게 파인 흰색 비키니였다.
양쪽 골반 위는 거의 끈 하나로 지탱되는 모양이었고, 목에 건 롱 네크리스가 가슴 중앙에서 달랑거려 시선을 끌었다.
청순하면서도 섹시한 상반된 이미지가 묘하게 어우러지는 것에 사진작가는 크게 흡족한 웃음을 짓고는 소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 이쪽으로 와서 포즈 좀 잡아 봅시다.”
난데없이 손을 잡힌 소현은 잠시 주춤거렸으나 이미 조명이며 촬영 장비들을 다 세팅해 놓은 뒤라 구도를 잡기 제일 좋은 자리를 알려 주려고 그러는가 보다, 하고 일단 넘어갔다.
“허리를 조금 비틀고. 엉덩이의 곡선을 살려야 하니까 뒤로 살짝…… 그렇지.”
그렇게 포즈를 지시하던 작가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이게 아닌데.”
“뭐가 잘못됐나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거랑 그림이 달라서. 자, 내가 도와줄게.”
그러면서 작가가 소현의 허리에 손을 댔다.
사진작가가 이끄는 대로 몸의 각도를 조금씩 바꾸던 소현은 거칠한 손가락이 등의 푹 파인 부분을 슬쩍 쓰다듬는 것을 느끼고 흠칫했다.
‘설마. 아니겠지.’
소현이 사진작가의 얼굴을 돌아보자 그는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는 태연한 표정으로 시선을 받아넘겼다.
겉으로만 보면 열정적으로 작업에 임하는 사진작가와 지도를 받는 모델일 뿐이었다.
하지만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날개 뼈나, 잘록한 허리와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을 음미하는 것처럼 느릿하게 더듬는 손길에선 명백하게 불손한 의도가 느껴졌다.
“…….”
소현은 본능적으로 일그러지는 미간을 애써 폈다.
촬영 현장에서 소란을 피워 봤자 어느 쪽으로 일이 유리하게 돌아갈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조금만 참자, 하면서 소현은 구더기가 기어가는 듯한 더러운 촉감을 힘겹게 견뎌 내었다.
미약하게 반항하던 몸뚱이가 얌전해진 것을 깨닫고 사진작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불쾌한 빛을 역력하게 드러내면서도 반항하지 못하고 꾹 눌러 참는 얼굴을 볼 때마다 그의 속에서 희열감이 피어올랐다.
지금껏 사진작가 일을 하면서 숱한 모델들을 봐 왔지만 소현처럼 손에 착착 달라붙는 피부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뭇가지처럼 비쩍 말라 만질 맛도 없는 다른 여자들에 비하면 소현은 가녀린 체구이면서도 가슴과 엉덩이는 제법 살이 붙어 있어 그의 취향에 제대로 들어맞았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아쉬운데.’
아무래도 다른 스태프들의 눈도 있으니 여기선 살결의 촉감을 느끼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이번엔 조금 더 욕심을 부려 보고 싶어졌다.
‘그렇지, 촬영이 다 끝나고 함께 회식하자고 권해 보자.’
제 옆에 앉혀 놓고 수고했다는 명목으로 술을 먹일 속셈이었다.
몇 번은 거부할지 몰라도, 분위기를 망친다느니 하면서 억지로 권하면 결국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그가 속으로 헛물을 켜고 있을 때,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혁권은 이를 갈았다.
“저 자식이!”
변태처럼 생긴 사진작가 놈이 소현의 몸을 마구 주물럭거리는 모습에 혁권은 눈에서 불이 튀어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어가서 사진작가 놈의 멱살을 잡고 죽사발을 내고 싶었지만 소현이의 입장을 생각해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눌렀다.
“후우.”
길게 숨을 내뱉으면서 표정 관리를 한 혁권은 이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다들 수고하십니다!”
실내 수영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스태프들은 물론이고 사진작가와 소현도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오는 혁권의 모습에 소현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여길 어떻게!”
선글라스를 벗은 그는 소현을 보며 찡긋 눈짓을 하고는 엉거주춤 서 있는 사진작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김재경 선생님 되시지요. 이거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꾸준히 운동을 한 덕분에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고 강한 위압감을 풍기는 혁권의 모습에 사진작가인 김재경은 순간 주춤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여기 소현 씨가 소속되어 있는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관계자입니다.”
“아아.”
너무나도 능청스러운 태도에 김재경은 설마 거짓말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 소현 씨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다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에이전시 관계자라는 이야기에 김재경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됐던 것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쩐지 범상치 않아 보이는 혁권의 분위기와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외국인 사내의 모습에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다들 고생하시는데 해 드릴 건 없고, 호텔 일식당에 자리를 예약해 놨으니 촬영이 끝나시면 스태프분들 전부 그리로 가셔서 식사를 하십시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약소하지만 저희 성의이니 받아 주십시오.”
전혀 비굴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정중하게 그가 재차 이야기를 하자 김재경은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뭐. 그렇다면야, 끝나고 가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기본만 차린다고 해도 단가가 엄청나게 비싼 호텔 일식당에 열다섯 명이나 되는 스태프들을 모두 데려가서 대접한다고 하자 김재경은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내심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소현의 에이전시가 생각했던 것하고 달리 엄청 돈이 많은 곳인가 하는 오해를 했다.
“소현 씨하고 잠깐 할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을까요?”
“아직 세팅할 것이 조금 남았으니까 그렇게 하세요.”
다른 때 같았으면 안 된다며 딱 잘라 거절했을 테지만 오늘은 순순히 허락을 해 줬다.
계속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현은 그와 함께 조용한 곳으로 가자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오빠, 어떻게 된 거예요? 에이전시 관계자라는 건 또 뭐고요?”
“너 응원해 주려고 왔는데 딱히 둘러댈 것이 없어서 그냥 에이전시에서 나왔다고 했지. 많이 놀랐어?”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소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죠. 이제 보니 이거 완전히 거짓말쟁이 같은데…….”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보자 혁권은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소리야, 나처럼 정직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흥. 아주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잘하던데 뭘 그래요.”
“에이. 그건 널 보려고 한 하얀 거짓말이고.”
“그거나 이거나…….”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삐죽이던 소현은 아까 혁권이 사진작가하고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곤 얼른 말을 이었다.
“참. 아까 일식집에서 스태프들 회식을 시켜 준다고 하던데, 진짜예요?”
“그럼 벌써 예약까지 다 해 놨는걸.”
“미쳤나 봐. 여기 일식집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요? 한두 명도 아니고 스태프들을 다 데리고 가면 100만 원은 우습게 넘어갈 거예요.”
“널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낼 수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돈 많은 거 알거든요. 이렇게 쓸데없이 막 쓰고 다니다가는 금방 깡통 차고 다니겠어요.”
“너 좀 잘 봐 달라고 하는 건데 뭐가 쓸데가 없어?”
“그런 거 안 해도 실력으로 인정받으면 돼요.”
“실력도 당연히 최고지.”
혁권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면서 말하자 소현은 이내 풋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돈을 많이 쓴다고 타박하기는 했지만 혁권이 그녀의 자존심을 세워 주려고 이런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미안하면서도 너무나도 고마웠다.
사실 소속되어 있는 에이전시 규모가 작다 보니까 소현은 실력에 비해서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 같은 경우도 스태프들한테 회식을 시켜 주는 건 고사하고 정동식 실장이 배려를 해 주지 않았더라면 매니저도 없이 혼자 촬영 현장에 나왔어야 됐을 터였다.
이러다 보니 아무리 소현이 캔디처럼 꿋꿋한 성격이라고 해도 조금은 위축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 혁권이 제대로 기를 살려 주자 왠지 모르게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아. 맞다. 매니저 언니한테도 이야기를 해 줘야 되는데.”
“미리 양해를 구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
주위를 둘러본 소현은 에이전시에서 붙여 준 여자 매니저가 백성균과 함께 나란히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막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할 때 스태프 한 명이 다가와서 준비가 다 끝났다는 걸 알려 줬다.
“이제 촬영 시작합니다. 어서 오세요!”
“네! 오빠, 안 가고 계속 있을 거죠?”
“응. 다 끝날 때까지 꼭 붙어 있을 거야. 그래야 회식비를 결제해 주지.”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키스는 못 했지만 소현은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곤 이내 서둘러 조명이 켜져 있는 곳으로 갔다.
다시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사진작가의 요구에 따라 능숙하게 포즈를 잡는 소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혁권은 백성균이 옆으로 다가오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
“알아듣게 잘 설명했습니다. 두 분이 사귀는 사이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더니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시는 걸 보고 금방 수긍을 하더군요.”
“입단속은 잘 시켰겠지.”
“예. 애인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일을 위해서 불가피하다는 걸 알면서도 완전히 드러내 놓고 사귈 수 없다는 것에 혁권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