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79
379
“후아, 시원해라.”
따뜻하게 난방이 되어 있던 실내를 나와 신발을 다시 신으면서 소현이 살짝 휘청거렸다.
“조심해.”
“으응.”
술을 몇 잔 마셔서 그런지 소현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더니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머리를 부비는 행동에 혁권은 순간 당황했다가 이내 이것도 썩 나쁘진 않은데,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소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 같은 포즈로 나란히 계산대에 도착하자 혁권은 소현을 잠시 떼어 놓은 후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어?”
그때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맞네. 혁권 씨, 오랜만이야.”
혁권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 사람은 젊은 여성이었다.
방금 미용실에서 나온 것처럼 굵은 웨이브가 진 머리칼을 한쪽으로 넘기고, 유달리 큰 눈동자는 색소가 옅어 갈색 빛을 띠었다.
깔끔한 흰색 블라우스에 잘록한 허리와 엉덩이의 동그란 곡선을 강조하는 H라인 치마에서 성인 여성의 성숙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순간 주춤하던 혁권은 옆의 소현을 의식하는 듯 흘깃 눈짓을 주다가 다가오며 인사하는 여성을 무시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알은척을 했다.
“그러게. 이게 몇 년 만이지?”
“한 3년쯤 됐나? 내가 회사를 다른 곳으로 옮긴 후로는 거의 만나지 못했으니까.”
“……누구예요?”
소현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혁권의 팔을 부여잡았다.
“예전 회사 동료야.”
“한다솜이라고 해요.”
능숙하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그녀는 소현을 유심히 살피더니 알겠다는 것처럼 혁권을 흘겨보았다.
“여자 친구 생겼나 봐.”
“어.”
혁권이 짧게 대꾸했다.
“흐응.”
대화가 길게 늘어지는 것을 피하고 싶은 듯 다소 거북한 표정의 혁권과, 반대로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두 사람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낯선 여자.
둘 사이의 분위기는 누가 봐도 일반적인 회사 동료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묘하게 친근한 여자의 태도가 소현의 신경에 무척이나 거슬렸다.
“…….”
소현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붙잡고 있었던 혁권의 팔에서 손을 천천히 놓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척 가까웠던 둘 사이의 거리가 한순간에 멀어진 기분이었다.
소현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눈치챈 혁권은 내심 한숨을 내쉬며 다솜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어. 그럼.”
“아, 잠깐만!”
빨리 계산을 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다솜이 뒤에서 그를 붙잡았다.
“왜?”
뒷수습을 할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 혁권은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하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잠깐 줄 게 있어. 가방 들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그렇게 말을 내던진 그녀는 혁권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아까 복도를 지나칠 때 단체 손님이 들어가 있어서 떠들썩한 소리가 새어 나오던 바로 그 룸이었다.
난감해진 혁권은 살며시 소현의 눈치를 살폈다.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지만 내심 불쾌해한다는 걸 아무리 둔한 그라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이런 데서 우연히 만날 줄은 미처 몰랐어.”
“오빠가 왜 미안해요. 그냥 옛 회사 동료라면서요.”
“응, 그렇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게 또 있기라도 해요?”
소현이 눈을 똑바로 들고 물었다.
“혹시 옛날에 사귀던 여자 친구라던가.”
덜컥,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한순간 당황한 혁권이 재빨리 표정을 관리했지만 이미 소현은 볼 걸 다 본 뒤였다.
“……맞구나?”
“그, 그게, 있지…….”
내 말 좀 들어 보라며 혁권이 손을 내밀었으나 평상시라면 마주 잡아 줄 손이 지금은 너무 멀리 있었다.
“알았어요. 뭐, 그럴 수도 있죠. 세상이 참 좁네.”
생긋 웃으면서 말하는데 이상하게 등허리에 한기가 돌았다.
“천천히 얘기하다 오세요. 저는 다리가 아파서 먼저 차에 가 있을게요.”
“뭐?”
“차 키 줘요, 안에 앉아 있게. 그럼.”
혁권이 붙잡을 새도 없이 소현은 쌩하니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문을 닫아 버렸다.
깜박이는 숫자판을 바라보면서 닭 쫓던 개처럼 멍하니 서 있는데, 어느새 다솜이 돌아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왜 혼자야. 아까 그 아가씨는?”
“……먼저 갔어.”
너 때문에 싸웠다는 말을 하기 싫어 애매하게 얼버무리자 다솜이 눈을 가늘게 접었다.
“어머. 혹시 화나서 가 버린 거야? 으음, 미안해라.”
“…….”
“역시 알은척 하면 안 되는 거였나. 그래도 별말 안 했는데.”
“대충 분위기로 알아차린 모양이야.”
“하긴 여자들은 그런 데 민감하지. 하지만 우리 둘이 사귀었던 것도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그러게.”
혁권은 쓰게 웃으며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직 담배 못 끊었구나. 여전하네.”
그 말에 혁권은 손바닥을 머쓱하게 펼쳤다.
“몇 번 시도는 해 봤는데 말이야.”
“옛날에도 내가 잔소리 많이 했었지.”
같은 흡연자가 아니고서야 여자들 중에 담배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솜 역시 마찬가지라 옷에 밴 냄새가 싫다고 질색하면서 향수라도 뿌리라고 타박을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소현은 딱히 그런 말을 하지 않는데.’
모델들 중엔 식욕을 참기 위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많다던데 그래서 익숙해진 걸까?
아니면 별다른 이유 없이 개의치 않는 걸지도 몰랐다.
혁권은 무엇을 생각해도 항상 그 끝은 소현에게로 다다르는 것에 내심 당혹해했다.
오랜만에 만난 옛날 여자 친구는 여전히 예쁘고, 예전보다 더 여성스러워져서 한순간의 그리움일지언정 마음이 쏠릴 법도 한데, 정작 그의 머릿속은 소현으로 가득하니 이래서야 여자에게 푹 빠져서 허우적거린다고 놀림 받아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뭐, 그래 봤자 한 달밖에 사귀지 않았지만.”
옛날 추억을 회상하기는커녕 혁권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다솜은 어쩔 수 없나, 하면서 시원하게 내뱉었다.
“아주 매정하게 찼었지, 나를.”
“하지만 헤어질 이유가 너무 많았는걸. 명색이 애인인데 데이트는커녕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지,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 연락도 잘 안 되지. 갓 사귀기 시작한 연인 사이인데도 그럴듯한 일들은 하나도 하지 못했었으니까.”
손가락을 꼽아가며 원망을 쏟아 내는 다솜의 말에 혁권은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그,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정말이야?”
“응.”
다솜은 얇게 뜬 눈으로 혁권을 째려보다가 이내 웃는 낯으로 돌아왔다.
“하긴 이젠 다 지난 일이니까. 처음에 혁권 씨 일하는 모습이 성실하고 책임감 있어 보여서 먼저 사귀자고 고백한 것도 나지만, 못 견디고 차 버린 것도 나니까 이젠 더 이상 말하지 않을게.”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카드를 내밀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마음에 걸렸거든. 그 때의 혁권 씨는 뭐에 홀린 것처럼 일만 해서, 회사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처럼 보였어. 회사 입장에서 보면 우리 같은 일개 사원들은 그냥 부속품에 불과할 텐데 말이야. 그래서 나중에 상처 입을 일이 있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생각이었던 모양이네.”
“그랬었나.”
“응. 참, 그 회사 사표 쓰고 나왔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아직 내 동기가 거기서 일하고 있거든. 지금은 개인 사업 한다며?”
“그래.”
“잘됐다. 난 지금의 혁권 씨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나아 보여.”
그녀는 작은 앙금을 다 털어 버린 것처럼 후련한 표정이었다.
“아, 참고로 말하지만 그거 내 결혼식 청첩장이야. 식장엔 오지 않아도 되지만 축의금은 꼭 내주라.”
“뭐?”
혁권은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었겠거니 하고 귀를 의심했다.
“준비하는 데 예산이 엄청나게 들어간다니까. 이러니까 다들 돈 없어서 결혼 못 하겠다고 난리지.”
그러면서 다솜은 웨딩 업체는 돈만 많이 받아 먹고선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며 투덜거렸다.
“잠깐만. 너 결혼한다고?”
“응.”
황망해하는 혁권과는 달리 그녀는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아니 물론 사귀는 사람이야 있겠지만…….”
어디에 내세워도 빠지지 않을 미모의 여성인 데다 눈치가 빠르고 상사의 비위를 잘 맞추는 편이라 같은 직장에서 일했을 때도 그녀는 인기가 꽤 많았다.
그러니 물론 남자야 입맛대로 골라잡을 수 있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나도 조금은 더 놀 생각이었는데,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여기서 다 풀어 놓기에는 너무나 긴 이야기라는 듯 다솜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럼 청첩장도 전해 줬으니까 난 이만 돌아가 볼게. 아저씨들이 나 없으면 난리가 나거든.”
귀찮지만 미리미리 밑밥을 깔아 놔야 축의금이라도 내놓지 않겠냐며 싱긋 웃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윙크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혁권은 그저 망연히 바라보았다.
마치 봄과 함께 들이닥친 태풍처럼 갑작스럽게 왔다가 제멋대로 뒤흔들고 사라지는 옛 연인의 변덕스러움은 도저히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 서 있던 혁권은 심통이 나서 먼저 내려가 버린 소현을 떠올리고 급하게 뒤를 쫓았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 보니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소현이 보였다.
혹시 먼저 가 버렸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던 혁권은 속을 쓸어내리곤 문을 열고 그 옆에 앉았다.
“많이 화났어?”
“아뇨. 내가 왜요?”
대꾸하는 소현의 표정은 무척 덤덤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폭풍 전의 고요처럼 느껴지는지라, 혁권은 총알이 빗발치는 격전 중에도 느끼지 못했던 불길함에 몸서리쳐야만 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전에 잠깐 사귀었던 사람이야.”
“흐응.”
“하지만 절대 깊게 사귄 건 아니고! 딱 한 달뿐이었으니까. 그마저도 아주 예전 일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얼굴도 잊고 지냈었어.”
“그런 것 치고는 보자마자 바로 이름을 부르던데요.”
여전히 소현의 눈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 그건…….”
혁권은 쓸데없이 좋은 자신의 기억력을 격렬하게 원망했다.
“별로 신경 안 쓴다니까요. 오빠 나이에 여자 한 번도 못 사귀어 봤다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되잖아요. 다만 머리로 알고 있는 거랑 눈으로 직접 보는 거랑은 역시 다르다는 걸 새삼 체감한 것뿐이고, 그러니까 아주 조~금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응, 괜찮아요.”
‘하나도 안 괜찮은 거잖아.’
지금 깨달은 거지만 소현은 아주 태연하게 한입으로 두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밥을 너무 푸짐하게 먹었더니 잠이 오네. 저기, 오늘은 그냥 일찍 집에 바래다줘요.”
“드라이브는 어때? 시원하게 해안 고속도로라도 달리면 기분이 좀 풀릴…….”
“집. 에. 갈. 래. 요.”
“그, 그래.”
단호한 말투에 혁권은 내심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어디선가 읽었던 글귀를 떠올렸다.
원래 사랑은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거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