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81
381
달콤한 향기가 나는 과실주는 여성용이라 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예쁘게 장식된 탄산 주스에 가까웠다.
비록 등을 떠밀린 격이라도 어쨌든 혁권과 다시 만나게 되어 살짝 기분이 들뜬 소현은 아까보다는 훨씬 편해진 표정으로 입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렇게 두 잔째가 되자 지수가 기왕 클럽까지 왔으니 춤이나 실컷 추다 가자며 먼저 일어섰다.
“하긴, 계속 앉아서 술만 마시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더라.”
주변에도 다른 테이블 석이 있지만 다들 춤을 추다가 지쳐서 쉬러 오는 용도지, 소현의 일행처럼 입장해서부터 계속 앉아 얘기를 나누진 않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조용한 술집을 가지 굳이 클럽에 올 이유도 없었고.
“혁권 씨가 올 때까진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소현이 너도 즐겨.”
그러면서 도연까지 일어나자 소현도 슬슬 마음이 동했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춤만 추는 건데 뭐 어때.
테이블에서 나와 플로어에 있는 사람들 틈에 섞이자 쿵쿵 울리는 음악에 저도 모르게 기분이 고조되었다.
무대 앞쪽에선 양팔에 문신을 한 DJ가 술을 병째로 잡고 마시면서 손님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흥분을 고취시키는 음악을 선곡하고 있었고, 플로어 중간중간에 설치된 봉을 잡고 춤추는 여자들은 허리를 뒤로 젖혔다가 다리를 들어 올리고 일부러 아찔한 포즈를 취하면서 쏟아지는 환호성에 마음껏 몸을 내맡겼다.
이름도 모르는 어떤 여자와 등을 맞대고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던 소현은, 주변에 남자들 몇몇이 기다렸다는 듯 어느새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혼자 왔어?”
제법 매끈한 얼굴을 한 남자가 소현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속삭였다.
주변이 시끄러웠으므로 대화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크게 소리치거나 귓속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낯선 남자가 갑자기 훅 다가오는 것이 달갑지 않아 소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었다.
“제가 술 한 잔 사 드릴게요.”
그 틈을 타 또 다른 남자가 와서 주문하지도 않은 술잔을 내밀었다.
도망치려고 해도 제일 공간이 비좁은 플로어 한가운데라 쉽게 나갈 수가 없었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점점 몸을 밀착해 오는 사내들 틈에 끼어, 소현이 불쾌한 낯빛을 떠올렸을 때 타이밍 좋게도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내 친구한테 볼일 있어요?”
거만한 표정으로 두 사내 앞을 막아선 지수.
“갑자기 사라져서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그리고 도연은 남자들이 함부로 소현의 몸에 접촉하지 못하게 뒤에서 빈틈없이 밀착 방어를 시전했다.
사람들 틈에 뒤섞이다 보니 각자 뿔뿔이 흩어져서 놀다가 멀리서 소현이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 서둘러 달려온 모양이었다.
“어, 뭐야? 일행이 계셨네.”
굳이 따지자면 조금 더 잘생겼다고 할 수 있을 법한 사내가 왁스로 고정시킨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웃었다.
“잘됐다. 우리도 세 명인데 같이 놉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손목을 잡고 끌고 가려는 것을 지수가 사납게 탁 쳐 냈다.
“뭐래는 거야, 떡진 머리가.”
“떠, 떡지다니…….”
“하도 반들거려서 머리에 기름이라도 처바른 줄 알았네. 냄새 졸라 심하니까 저리 꺼져 줄래.”
지수가 코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면서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미용실에서 손질한 건데 무슨 소리야!”
“어머, 그러니? 이발소가 아니고 미용실에 가셨어요, 나름 노력했네. 그래도 담당 디자이너는 바꾸는 게 좋겠다. 걔 솜씨 형편없거든. 존나 촌스러워.”
남자가 화난 표정으로 씩씩대는데도 지수는 기죽은 기색 하나 없이 연거푸 혀를 놀려 댔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다른 사내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미끈한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성격 한번 화끈하시네. 저기요, 숙녀분들이 싫다고 하시니까 신사답게 물러나시죠.”
그러면서 떡진 머리라 불린 남자를 어깨로 밀어낸 그는 싸움을 중재하는 척하면서 제안했다.
“자, 자, 기분 좋게 놀러 왔는데 화내지 말고. 사과의 의미로 제가 여기 있는 아가씨들께 술 한잔 쫙 돌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일행 사이에 섞여 테이블에 앉으려는 것을 도연이 가볍게 제지했다.
“우리도 술 있거든요. 필요 없어요.”
“에이, 그래도 남이 사 주는 술이 제일 맛있는 법이죠. 저 돈 많으니까 사양 마세요.”
그는 패션용으로 걸친 안경을 손으로 밀어 올리면서 보란 듯이 아우디 마크가 달린 차 키를 테이블에 놓았다.
“큭.”
지수가 그 모양새를 보고 있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폭소했다.
“……?”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상대적으로 평온한 기색인 도연과 어째서인지 민망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보통 여자들은 이쯤 되면 반은 넘어오는데.’
얼굴은 다른 놈들에 비해 좀 딸려도 돈이 있다는 냄새를 솔솔 풍기면 대부분은 태도를 바꾸기 마련이었다.
이 방법으로 여러 번 헌팅에 성공했던 그는 예상과 완전히 빗나간 반응을 보이는 세 여자 때문에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아우디라……. 어떤 모델을 타세요?”
양갓집 규수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도연이 물었다.
“어, A4인데요.”
대학 입학 기념으로 아버지가 장만해 준 것이었다.
아우디에서 나오는 자동차 중엔 보급형이라고 불리는 저가 모델이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외국차가 타고 싶었던 그가 열심히 아버지를 졸라 겨우 받아 내었다.
대기업 부장인 아버지는 제네시스를 끌고 다니지만, 하나뿐인 아들이 그렇게 원하니 어쩔 수 없이 카드를 건네주면서도 반드시 36개월 무이자 할부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거기다 최근 안 좋은 사건 때문에 대대적인 할인 행사를 하고 있어서 무리를 하면 충분히 구매할 수 있었다.
물론 할부금의 반 정도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가 갚아야만 했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좀 딸리긴 해도, 아우디 마크가 떡하니 붙어 있는 차를 끌고 다니면 주변에서 보는 시선이 달라져서 캠퍼스 내에서 우월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어머, 그러시구나.”
도연의 입 꼬리에 걸려 있는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실례지만 그 모델은 차체가 작아서 남성분이 타기에 불편하지 않나요? 전 아무래도 승차감이 안 좋아서 별로던데.”
“네, 네?”
“저도 예전엔 A6를 타다가 BMW 528i로 갈아탔어요. 예전에야 아우디 하면 알아줬지, 요즘엔 브랜드 가치가 많이 떨어져서. 돈이야 조금 차이 나지만 그 정도는 투자할 만하죠. 아무래도 자동차는 새것일수록 더 좋은 법이잖아요.”
그러면서 도연이 손가락으로 제 차 키를 빙글 돌렸다.
대학생 신분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차량의 브랜드 마크를 확인한 그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불쌍할 정도로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소현은 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저런 허세는 도연에겐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남자의 패배였다.
아버지를 국회의원으로 둔 도연은 세 명 중에서도 집안 형편이 가장 부유했고, 브랜드 로고가 떡하니 찍혀 있는 걸 안 좋아해서 그렇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태연하게 명품으로 둘둘 두르는 게 일상인 여자였던 것이다.
오죽하면 집에서 입는 수면 바지도 루이비통일까.
얼굴이 벌겋게 변해선 도망치듯 일어난 남자를 보며 혀를 쭉 내밀고 야유를 보낸 지수가 통쾌하다는 표정으로 깔깔 웃었다.
“어휴, 간만에 좋은 구경했네.”
“재밌었어?”
“어. 웬만한 개그프로보다 더 존잼이었음.”
지수가 씩 웃으면서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그거 네 생일 선물로 받은 거지?”
도연는 차를 두 대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그냥 학교 통학이나 가까운 외출용으로 쓰는 것이고 다른 한 대는 가끔씩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용으로 사용하는 스포츠카였다.
물론 두 대 다 아까 그 남자가 자랑스레 지껄였던 모델보다 훨씬 고급형인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응. 나중에 집에 갈 땐 대리 부를 거야.”
“잘됐다. 나도 태워 주라.”
“그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도연이 물로 마른 목을 축였다.
“그럼 또 한판 뛰러 갈까?”
아직 성이 제대로 안 풀렸는지 지수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이번엔 우리가 옆에 딱 붙어 있을게. 자, 가자!”
두 친구의 재촉에 못 이겨 소현도 덩달아 일어났다.
안 그래도 한창 춤추면서 재밌게 즐기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격이라 제대로 발산하지 못한 열기가 몸을 들뜨게 했다.
그렇게 셋이 테이블을 떠나자 플로어에서 떨어진 안쪽 구석, 바의 의자에 앉아 험악한 얼굴로 일행을 주시하고 있던 남자가 옆의 친구를 툭 건드렸다.
“야, 아까 말했던 거 내놔 봐.”
“뭐.”
“가루 가지고 있다며.”
그는 버릇처럼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지수가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이라고 놀리던 걸 떠올리고 한층 표정을 찌푸렸다.
“있긴 한데…… 어디다 쓰게.”
“건방진 년 골탕 좀 먹여 줘야지.”
그러면서 남자가 플로어에서 한창 춤을 추고 있는 소현의 일행을 손으로 가리켰다.
“와. 씨발, 죽이네.”
친구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철새처럼 밤마다 여러 클럽을 전전하면서 화려하게 꾸민 여자들을 많이 만나 봤지만, 소현과 친구들은 그중에서도 특 S급의 미모였다.
“쟤가 제일 예쁘다. 까만 바지 입고 머리카락 긴 애.”
친구가 소현을 콕 짚어 말했다.
“섹시하고 청순하고 다 했네. 쟤들 꼬시러 갈 거냐?”
나도 데리고 가, 하면서 금방이라도 일어나려는 친구를 그가 다시 눌러 앉혔다.
“됐고, 빨리 물건이나 내놔.”
친구가 인터넷에서 샀다며 자랑하던 가루는 술에 조금만 타서 먹여도 금방 만취한 것처럼 몸을 못 가누게 만드는 약이었다.
물에 빨리 녹고 향이나 맛 같은 게 없어서 쉽게 쓸 수 있다며 콧대 높은 계집애들을 몇이나 이걸로 쓰러트렸다고 거드름 피우는 걸 들었을 때는 약 없이는 여자 하나 못 후리는 못난 놈이라 비웃었는데, 지금은 그가 제일 간절해진 셈이었다.
“자, 긴 머리는 내가 찜했다. 알지?”
발갛게 달아오른 양 볼의 홍조와 땀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짧은 상의 사이로 한 손에 확 휘어잡아도 남을 것 같은 얇은 허리와 귀여운 배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약을 담은 봉지를 건네준 친구가 몇 번이나 당부했다.
“짜식. 알았으니까 신호하면 나오기나 해.”
테이블 옆을 지나가는 척하면서 잔에 남은 술에 약을 타고, 나중에 여자들이 휘청거리면 그때서야 일행인 양 행세해 모텔에 데리고 갈 심산이었다.
어차피 세 명을 동시에 다 데리고 가진 못하니까 한 사람 정도는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았다.
비록 제일 미모가 출중한 여자를 친구한테 넘겨주는 건 좀 아쉬운 일이지만, 일단 그의 첫 번째 목표는 건방지게 입을 놀려 대던 단발머리에게 주제를 알려 주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손바닥 사이에 약봉지를 숨기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소현 일행이 앉아 있던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플로어를 쳐다보니 여자들은 한창 재밌게 노는 중인 듯 이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비죽 입꼬리를 올린 그가 자연스럽게 손을 스치면서 마시다 남은 술이 아직 반절 이상 남아 있는 잔에 가루를 막 타려던 순간.
“뭐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