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82
382
머리 위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함께 손목이 강한 힘으로 붙잡혔다.
“으.”
사내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이, 이거 놔!”
하지만 상대는 손에 힘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 옥죄어 왔다.
뼈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몸을 뒤틀자 약봉지가 툭, 하고 테이블로 떨어졌다.
흩어진 하얀 가루들을 본 혁권의 눈에 불이 튀었다.
굳이 정체를 묻지 않아도 어떤 용도로 쓸 약인지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제법 깜찍한 짓을 하는군그래.”
여유 있어 보이는 말투와는 달리 목소리는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지수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왔더니 오자마자 목격한 광경이 바로 이거다.
혁권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소현의 스마트폰에 잠시 시선을 뒀다.
하트 모양의 독특한 장식물은 혁권과 함께 데이트를 하다가 수제 액세서리를 파는 가판대에서 귀엽다고 소현이 산 것이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언제 어디서건 소현을 금방 찾아낼 자신이 있는 그는 눈으로 플로어를 훑다 무대 중간에서 친구들과 함께 즐거이 웃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잘 놀고 있는데 굳이 방해할 필요는 없지.”
춤을 추는 척하면서 은근히 몸을 비벼 오는 다른 남자들을 볼 때마다 그의 입가가 꿈틀거렸지만 함께 있는 지수와 도연이 그때마다 철벽처럼 서로를 지켜 주는 것을 보곤 안심했다.
“그럼 우린 대화 좀 해 볼까.”
칼날처럼 꽂히는 날카로운 시선에 사내가 몸을 흠칫거렸다.
‘시발, 좆 됐다.’
이유는 몰라도 일이 상당히 뭣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붙잡혀 있는 손목을 빼내려고 애쓰면서 도와줄 사람을 찾았으나, 어쩐 일인지 그에게 가루를 건네준 친구 역시 크고 육중한 덩치를 가진 외국인에게 잡혀 이쪽을 향해 상당히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따라와.”
순식간에 목덜미를 잡혀 버린 사내는 혁권에게 개처럼 질질 끌려가면서 버둥거렸다.
“씹, 이거 놔! 너 깡패야, 뭐야!”
난동이라도 피우면 클럽 직원들이 와서 좀 말려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바깥으로 끌려 나가는 동안 우연히 마주친 직원들은 모두 그를 외면했다.
혁권을 따라온 하킴이 미리 직원에게 다소 소란이 있더라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돈을 찔러 준 결과였다.
커다란 쟁반을 들고 서빙 하는 여자도, 뒷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도 모두 시선을 피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에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사내는 뒷골목의 쓰레기통에 큰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크학!”
등이 얼얼하니 아팠다.
바닥에 쓰러진 그가 시발, 욕설을 내뱉으며 일어나려고 하자 구둣발이 복부를 세게 강타했다.
“악! 쿨럭, 쿨럭.”
골목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클럽에서 놀다가 잠시 바깥 공기를 쐬려고 나온 사람이나, 담배를 피우던 남자들 무리도 서넛은 되었으나 혁권의 뒤를 이어 등장한 갈색 피부의 외국인이 흘긋 눈길을 주자마자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하곤 소리 없이 흩어졌다.
저 중에 괜히 오지랖 넓은 녀석이 있어서 경찰에 신고라도 해 줬으면 좋겠지만, 아마 그런 행운은 바라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거 진짜 장난 아니잖아.’
애초에 싸움을 잘하는 편이 아닌 사내는 난생처음 겪어 보는 생생한 폭력에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숨이 모자라 헐떡이면서 괴로운 듯 몸을 웅크리고 있으니 다시 한 번 혁권의 발이 사내를 걷어찼다.
“누가 편하게 누워 있으래.”
“씨, 씨발. 뭐야? 나한테 왜 이러는데!”
“정말 몰라서 물어?”
번화가의 불빛을 등지고 선 혁권의 얼굴이 반쯤 어둠에 덮여 더욱 흉흉한 기색을 뿜어냈다.
“다시는 같잖은 약 가지고 장난 못 치게 만들어 주지.”
만약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해서 소현이 약을 탄 술을 마셨다면.
그 뒤를 상상하는 순간 혁권은 적에게 총구를 겨눌 때조차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살의에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힉!”
딱히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주저앉은 사내의 입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혁권이 금방이라도 쳐 죽일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이, 본능적인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리라.
덜덜 떨고 있는 사내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고 혁권이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때 백성균과 하킴이 다른 놈을 끌고 왔다.
반항하다가 한 대 쳐 맞았는지 퉁퉁 부은 얼굴로 잡혀 온 놈은 제 친구라던 사내를 보더니 저 새끼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쟤, 쟤가 먼저 약을 달라고 했어요! 저는 아무한테도 쓸 생각이 없었다고요.”
“시끄러워.”
혁권의 한마디에 그가 입을 합, 하고 다물었다.
“오늘 두 놈 다 제삿날이라고 생각해라.”
험악한 기세를 흩뿌리며 혁권이 피가 묻을 것을 우려해 소매를 걷어붙이던 찰나였다.
“보스, 전화 왔습니다.”
커다란 액정에 소현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혁권은 불시에 기습을 맞은 것처럼 우뚝 멈춰 있다가 곧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아. 타이밍도 참.”
“여긴 제가 처리해 놓겠습니다. 보스께선 먼저 가시죠.”
그쪽이 더 중요하지 않냐는 듯한 눈으로 하킴이 말하자 혁권이 큼 헛기침을 했다.
“깔끔하게 정리해 놔. 다시는 이런 짓 못 하게 말이야.”
“맡겨 주십시오.”
하킴에게서 윗도리를 받아 든 혁권은 혹시 주먹을 휘두르다가 옷이라도 구겨지지 않았는지 상태를 점검하고는 다시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혁권이 사라지고 난 뒤, 제일 무서웠던 인간이 없어진 것에 내심 안도했던 사내와 그 친구는, 조금의 감정도 없는 무감각한 눈동자로 공포스럽게 다가오는 하킴과 백성균을 보면서 다시금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사, 살려 주십쇼.”
“제발 한 번만…… 크헉!”
퍽, 퍽 육중한 주먹이 휘둘리는 소리와 함께 고통스러운 비명이 다시금 뒷골목을 가득 메웠다.
“혁권 오빠!”
지수가 손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한창 놀다가 지쳤는지 세 사람 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늘어져 있었는데, 피곤한 것과는 별개로 얼굴엔 생기가 흘러넘쳤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기다리다 지칠 뻔했네!”
혁권을 반갑게 맞이하며 소현의 옆에 앉아 있던 지수가 제 자리를 양보했다.
“재밌게 놀고 있었던 모양이야.”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던 소현은 혁권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훅 풍긴 체취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술과 땀 냄새로 혼탁해진 실내 공기와는 달리 혁권에게선 바깥의 시원한 바람 냄새가 느껴졌다.
그리고 혁권이 항상 쓰는 향수와 함께 거의 입에 달고 다니는 커피 냄새가 섞여 옷에 남은 체향은 소현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다.
“…….”
소현은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혁권을 제대로 쳐다보질 못했다.
그 모습에 아직도 화난 건가, 하고 약간 울적해진 혁권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지수와 도연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쨌든 연락해 줘서 고마워.”
“네. 얼른 데리고 가세요.”
“사랑싸움은 우리 안 보는 데서 해 주라.”
싱글싱글 웃으면서 배웅하는 두 친구를 뒤로하고, 소현은 혁권을 따라 클럽을 나왔다.
입구에는 여전히 긴 줄이 늘어서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시선조차 지금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소현의 감각은 오로지 혁권과 맞잡은 두 손에 쏠려 있어서, 다른 데 정신을 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랑 계속 말 안 할 거야?”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려고 하니 혁권이 대신 해 주면서 툭 내뱉었다.
“……화난 거 아니에요.”
“정말?”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눈을 마주쳐 오는 혁권에게 소현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별것도 아닌데 짜증 내서.”
소현의 안색을 살피던 혁권은 진심으로 하는 사과인 것을 알아채고 눈가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렸다.
“아니야. 나라도 소현이 입장이었다면 분명 불쾌했을 테니까.”
누구라도 상대의 옛날 애인을 마주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만약 혁권이 소현과 사귀었던 남자를 보게 된다면, 그것도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면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했을 거다.
“어쨌든 이제라도 화해해서 다행이야.”
그 말에 소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참, 그리고 오해를 하나 더 풀어야 할 게 있는데.”
“네?”
혁권은 낮에 다솜에게서 받았던 청첩장을 흔들어 보였다.
“이거 때문에 말을 걸었다 하더라고.”
새하얀 종이에 금박을 입힌 문양, 그리고 카드의 안쪽엔 정중한 필체로 결혼을 하는 두 사람의 이름과 예식 날짜가 적혀 있었다.
신부의 이름이 최다솜인 것을 확인한 소현이 놀란 얼굴로 혁권을 보았다.
“결혼한대요?”
“그래.”
“어머…….”
입을 다물지 못하는 소현에게 혁권이 피식 웃는 낯으로 말했다.
“결혼식엔 못 오더라도 축의금은 꼭 내라고 하더라.”
“풋. 그게 뭐예요?”
“결혼 준비한다고 돈이 모자라대.”
하하, 맑게 웃는 소현의 웃음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뭐야, 그랬구나.”
안심한 듯 미소 짓는 소현의 옆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질투해 주는 건 기쁘지만, 두 번 그랬다간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읏, 누가 질투했다고 그래요.”
“그럼 아냐?”
그 물음에 부정은 하지 못하는 소현이었다.
“집에 빨리 데려다주기나 해요.”
“공주님 분부대로 합지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소현을 곁눈으로 훔쳐보며 혁권은 낮에 못 다 한 드라이브를 지금이라도 즐기려는 양 밤의 도로를 느긋하게 달려 나갔다.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새로 매입한 건물의 리모델링 계획서를 살펴보고 있을 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무심코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혁권은 살짝 얼굴을 굳혔다.
발신인은 서로 필요에 의해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도 상당히 껄끄러운 상대인 CIA의 샌더슨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연락이 올 때마다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을 가지고 왔기에 떨떠름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그렇다고 전화를 안 받을 수는 없었기에 그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스마트폰을 한쪽 귀에 가져다 댔다.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어쩐 일이오?”
-그다지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아니군.
“그럴 리가 있겠소.”
혁권의 말에 샌더슨이 스마트폰 너머에서 콧방귀를 뀌었다.
-하긴 남자한테 환대를 받아도 그다지 즐겁진 않지.
“어쨌든 용건이나 말해 보시오.”
우리가 한가롭게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사이는 아니지 않느냔 투로 혁권이 말했다.
-그러지.
잠시 뜸을 들인 샌더슨이 정색을 하며 용건을 이야기했다.
-얼마 전에 이란 쪽에서 아주 민감한 금수품을 몰래 가져다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들었어.
“……!”
이야기를 듣자마자 혁권은 미간을 좁히고는 날이 바짝 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감시받는 것이 싫다고 분명히 이야기를 했을 텐데.”
-아. 다른 쪽에서 나온 정보이니 오해는 하지 말도록 해. 이름이 하즈사피라고 했던가?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챈 혁권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내가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데 꽤 괜찮은 제안 같던데 하즈사피하고 거래를 하지그래.
뜻밖의 이야기에 혁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나보고 금수품 거래를 하라 이거요?”
-돈이 된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거 아니었나?
비아냥거림이 섞인 샌더슨의 이야기에 그는 딱딱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또 뭘 꾸미는 거지?”
-그런 거 없어.
“지금 날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금수품을 그것도 미국 정부가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는 군수품을 적대국인 이란에 넘기라고 하는데, 아무런 꿍꿍이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역시 그냥 넘어가질 않는군.
‘지금 누굴 바보로 아나.’
혁권은 한없이 가벼운 샌더슨의 말투가 거슬려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얄팍한 수에 넘어갈 것 같았으면 벌써 진창에 코를 박고 몇 번은 죽고도 남았을 터였다.
“당연한 거 아닌가?”
짜증스러운 속내를 감추지도 않고 그대로 드러내며 혁권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