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03
403
-다음은 북한 관련 소식입니다. 지난 13일 싱가포르를 출발해 남포항으로 향하던 2만 5천 톤급 북한 화물선 승리3호가 UN에서 규정한 제재 품목을 몰래 싣고 가다가 오키나와 부근 해역에서 미해군에 적발됐습니다.
시트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혁권이 상체를 바로 하면서 말했다.
“라디오 볼륨을 더 키워 봐.”
“예.”
하킴이 한쪽 팔을 뻗어 카오디오 볼륨을 조절하자 뉴스를 전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북한 선원 서른 명이 탄 화물선에는 이동식발사차량과 구형 MiG-21 전투기 부품이 가득 들어 있었고, 유럽산 사치품도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나포된 화물선은…….
심인성한테 넘겨준 서류에 적혀 있던 화물선 이름이 승리3호라는 걸 떠올린 혁권은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정리를 시작한 모양이군.”
이렇게 라디오 뉴스에 나올 정도면 이미 다른 것들도 다 손을 써서 깨끗하게 정리를 했다고 봐야 했다.
미국이 개입한 건 다소 의외였지만, 서류를 넘긴 이상 그걸 가지고 국정원에서 어떻게 사용하든 그건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잠시 뒤 그가 탄 벤츠 승용차는 시내에 위치한 특급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을 열고 내린 혁권은 하킴과 백성균만 데리고 1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일 낮이라서 그런지 두세 테이블에만 손님이 있고 한산한 분위기였다.
그는 어렵지 않게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방갑수를 찾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앞자리로 가서 앉자 방갑수가 간사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셨습니까?”
한쪽 손을 가볍게 내저으며 인사를 받은 혁권은 지나가던 여종업원을 불러 카푸치노를 시켰다.
하킴과 같이 옆 테이블에 앉은 백성균을 힐끗 쳐다보면서 방갑수가 입을 열었다.
“저 친구 사장님하고 같이 다니더니 아주 신수가 훤해졌군요.”
그러자 혁권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조사해 온 거나 내놔.”
“아. 예. 여기 있습니다.”
방갑수가 가방에서 서류철을 하나 꺼내 혁권 앞으로 내밀었다.
진짜 본업이 있었기에 계속 회사 일에 묶여 있기가 어려운 혁권은, 믿을 수 있고 유능한 김덕현 전무를 불러들여서 전반적인 경영을 맡기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의 제안을 애써 거절하면서 김덕현 전무는 조금 더 현장에 남아 있고 싶어 했다.
하지만 계속된 설득과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보크사이트 광산 재개발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도 서울에서 사업을 총괄적으로 맡아 진두지휘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에 결국 승낙을 했다.
대신 시에라리온 광산 관리를 책임질 인물을 김덕현 전무한테 추천받았는데, 정식으로 채용하기 전에 방갑수한테 어떤 사람인지 뒷조사를 시켰다.
서류철을 펼치자 곽병창의 최근 사진과 함께 대상자의 이력 사항이 A4용지 열장 분량으로 빼곡하게 조사되어 있었다.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린 채 그가 서류를 살펴보자 방갑수가 간략하게 알아낸 걸 설명했다.
“나이는 마흔세 살로 대평 인터내셔널 해외 자원 사업부에서 현장 전문가로 꽤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최근까지도 인도네시아 유연탄 광산 책임자로 오랫동안 근무를 했더군요. 김덕현 전무하고는 처음 일을 배운 사수로 친분이 꽤 두터운 걸로 파악됐습니다.”
아르헨티나 철광석 개발부터 시작해 브라질과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까지 입사 이후 거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리고 맡은 현장을 별다른 문제없이 잘 이끌어 간 걸 보면 성실성과 리더십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혼 10년 만에 아내하고 이혼한 것이 눈에 띄었지만 오랜 해외 생활과 힘든 업무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파견을 나간 현장 대부분이 치안이 불안하고 위험한 오지였기에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생활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터였다.
서류에서 시선을 뗀 혁권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일단 능력은 확실히 있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이 정도면 대평 인터내셔널에서도 꽤 대우를 받고 있을 텐데?”
“그게 조금 애매합니다.”
“무슨 말이야?”
“연차나 실적으로 보면 벌써 본사로 돌아와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되지만, 라인을 잘못 타는 바람에 밀려 버린 거지요.”
어떻게 된 건지 바로 눈치를 챈 혁권은 짧게 혀를 찼다.
“사내 정치에 휘말린 모양이군.”
그 역시 예전에 회사를 다닐 때 비슷한 경험을 했었기에 곽병창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본사로 소환되어 왔다가 승진에서 탈락되고 현재는 명예퇴직을 종용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디서나 밥그릇 싸움은 똑같군.”
“예?”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영입을 한다면 올 것 같아?”
“지난 5년간 탐사부터 시작해 맨손으로 일궈 내다시피 한 인도네시아 유연탄 광산 책임자 자리까지 반강제로 빼앗기면서 회사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이 큰 상태라,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질 겁니다. 알아보니까 이미 명예퇴직 신청도 해 놓은 상태더군요.”
“흠. 그렇단 말이지.”
혁권은 무릎에 올려놓은 서류철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수고했어.”
그렇게 말하고 꺼낸 것은 두툼한 돈 봉투였다.
“이건 수고비야.”
“헤헤, 역시 계산이 빠르십니다.”
테이블에 내려 둔 봉투를 방갑수가 웃으면서 제 쪽으로 가져갔다.
열어 보진 않았지만 대강 손끝에 걸리는 감촉만으로 아주 후한 보수임을 짐작했을 것이었다.
이렇게 가끔씩 일을 봐 주고 받는 돈이 꽤 짭짤했기에 방갑수는 혁권한테서 연락이 오면 만사를 다 제쳐 두고 달려갔다.
얼른 돈 봉투를 안주머니에 챙겨 넣은 방갑수는 비굴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참. 그리고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사 말입니다. 요즘 회사 상황이 그다지 안 좋은 모양입니다.”
서류철을 챙겨서 일어나려던 혁권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방갑수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라면 소현이 소속되어 있는 회사였다.
“자금 사정이 나쁜지 거기 사장이 명동 사채 시장에서 꽤 많은 돈을 빌려다 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채를 쓴다고?”
“그렇습니다.”
사채라는 말에 혁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업을 하다 보면 자금이 부족해서 돈을 빌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금융권이 아니라 이자가 높은 사채를 빌렸다는 건 그다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아, 그리고…….”
“…….”
“이것 참. 말씀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먼저 운을 띄워 놓고 난처한 척하는 표정이 퍽이나 능청맞았다.
“말해 봐.”
짜증을 내면서 말하자 더 이상 신경을 건드려 봤자 득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방갑수가 알고 있는 걸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사장이라는 자가 경마에 손을 대는 것 같습니다.”
“경마라고!”
혁권의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영등포에 있는 사설 경마장에 거의 출근부를 찍을 정도로 자주 들락거린다고 하더군요.”
“으음.”
경마에 사채 빛까지 그 정도면 막장까지 갔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걸 보면 소현도 전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필이면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배역을 어렵게 따내고 연기자로 데뷔를 하려는 시점에 이런 악재가 생기다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소속사에 문제가 생긴다면 아무래도 소현이 활동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간을 찡그린 채 잠시 고심하던 혁권은 이내 고개를 들어 마주 앉아 있는 방갑수를 보며 물었다.
“사장이 진 빛이 얼마나 돼?”
“그것까지는 모릅니다만 필요하시다면 알아봐 드릴 수는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슬쩍 소속사 사장 이야기를 꺼낸 것이 분명했다.
돈을 우려내려는 것이 거슬렸지만 어찌 됐건 까맣게 모르고 있을 뻔한 일을 알게 됐기에 혁권은 모르는 척 넘어갔다.
“사장의 재무 상황이 어떤지 그리고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내부 사정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전부 살펴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간사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방갑수가 대답하자 그는 서류철을 한 손에 챙겨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삑.
외근을 나갔다가 돌아온 정동식 실장은 지하 주차장에 승용차를 대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우우우웅.
상의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자 정동식 실장은 별생각 없이 손을 넣어 스마트폰을 꺼냈다.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조 실장, 안 그래도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이번에 정말 고마웠어. 다음에 내가 소주 한잔 살게.”
-아. 예.
기분 좋게 전화를 받은 정동식 실장과 달리 상대의 응답이 어쩐지 시원치가 않았다.
그러자 정동식 실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목소리가 별로 안 좋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게…… 웬만하면 조금 더 기다려 보려고 했는데,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아무런 말씀이 없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뭔데 그래?”
-소현 씨 개인 레슨비 말입니다. 아직 입금이 안 됐어요.
“설마, 그럴 리가.”
걸어가던 발걸음이 반사적으로 멈췄다.
“내가 분명히 보내라고 했는데.”
-근데 안 들어왔어요. 제가 몇 번이나 계좌를 확인해 봤는데 확실합니다. 저도 형님이 돈 떼먹을 사람 아닌 거 아니까 좀 더 있어 보자, 그렇게 말했는데 아무래도 월말이 다가오다 보니 여기저기 돈 나갈 구멍도 많고…… 강사들 월급도 줘야 되지 않습니까.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야. 내가 알아보고 바로 연락해 주지.”
-아, 그래 주시면 고맙고요.
대화가 부드럽게 풀린 것에 안도한 듯 스마트폰 너머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돈 문제가 엮이면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일단 통화를 끝낸 정동식 실장은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사무실이 있는 층수를 누르고 문이 닫히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어쩐지 찝찝한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정 실장은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김수나에게 곧장 다가갔다.
“수나 씨, 연기 레슨 비용이 아직도 지급이 안 됐다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회사 신용하고도 관련된 일이었기에 정 실장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러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김수나는 곤혹스러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뭐야? 깜빡한 게 아니었어?”
“사실은 법인 계좌에 남아 있는 잔고가 없어요.”
“그럴 리가. 지난번에 봤을 때만 해도 꽤 많은 액수가 들어 있었잖아.”
“어제 사장님께서 다 빼 가셨어요.”
“사, 사장님이?”
“네.”
뜻밖의 말에 정 실장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안 그래도 결제해 줘야 되는 것들이 많아서 안 된다고 했는데, 사장님이 워낙 막무가내로 내놓으라고 하시는 바람에…….”
요즘 회사 일은 뒷전이고 자꾸 밖으로만 돌아서 걱정은 하고 있었는데, 법인 통장까지 손을 댔다고 하자 정 실장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사장님은 어딜 가셨어?”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
스마트폰을 꺼내 든 정 실장은 곧장 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울리고 나서야 전화가 연결됐다.
-무슨 일이야?
귀찮아하는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에 정 실장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애써 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십니까?”
-볼일이 있어서 나와 있어. 지금 바쁘니까 급한 게 아니면 나중에 통화를 하자고.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정 실장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법인 통장을 가지고 나가셨다면서요. 지금 결제를 해 줘야 되는 것들이 많은데, 돈을 다 빼내 가 버리면 어쩌라는 겁니까!”
-흠흠. 쓸데가 있어서 가지고 나온 거야. 금방 다시 채워 넣을 테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경마장에서 말밥을 사 주고 있는 건 아니시고요?”
-비즈니스를 하러 나왔다니까. 아무튼 지금 통화를 오래 못 하니까 그만 끊어.
“제 말 다 안 끝났습니다, 사장님!”
뚜뚜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