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04
404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리자 정 실장이 곧장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사장이 스마트폰 전원을 꺼 버렸는지 연결음이 조금 울리다가 음성 사서함으로 그냥 넘어갔다.
“끄으응.”
무책임한 행동에 잇새로 앓는 소리를 흘리는 정 실장의 눈치를 보면서 김수나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오늘 사무실 임대료도 보내 줘야 되는데, 어떡하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정 실장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후우. 내가 며칠 미루어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저, 그리고…….”
“왜 또 내가 모르는 일이 있어?”
정 실장이 빤히 쳐다보며 다그치듯 묻자 김수나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했다.
“미해하고 승미한테 행사 페이를 줘야 되는데…….”
“코엑스 패션쇼 건을 이야기하는 거야?”
“네.”
“그게 언제 건데, 아직도 지급을 안 했다는 거야?”
“사장님이 직접 주신다고 하셔서 믿고 있었는데, 여태 안 주셨던 모양이에요. 저도 오늘 아침에 두 사람한테 전화를 받고 알았어요.”
“이것 참.”
정 실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혀를 차니 옆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김수나는 제가 잘못한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줘야 할 페이가 얼마야?”
“300만 원요.”
“다른 건 몰라도 돈 문제는 확실해야 해. 그래야 애들도 우리를 믿고 일을 하지.”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린 정 실장은 제 지갑에서 법인 카드를 꺼냈다.
“일단 이걸로 현금 서비스를 받아 두 사람한테 보내 줘.”
“예.”
“난 밖에 좀 나갔다 올 테니까. 사장님 들어오시면 바로 연락을 해 줘.”
“그럴게요.”
대답을 등 뒤로 들으면서 정 실장은 사장이 저질러 놓은 것들을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위이잉-.
초록색 야채를 가득 담은 믹서가 요란스럽게 돌아갔다.
핸드 믹서를 꾹 누르고 있던 소현은 잠시 후 걸쭉해진 액체를 보고 살짝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다란 컵에 따라 TV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TV를 켜긴 했어도 낮 시간대라 볼 만한 프로가 없었다.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재방송 중인 예능 프로에 채널을 고정시킨 소현은, 언제 먹어도 맛이 없는 야채주스를 꿀떡 삼켰다.
“으엑.”
‘사과를 조금 넣을 걸 그랬나.’
단맛이 부족해 도통 목구멍 너머로 넘길 엄두가 안 났다.
당분간 모델 활동은 중단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역을 참아 내야 하는 이유는 촬영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는 드라마 때문이었다.
소현은 극중에서도 모델 역할이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늘씬하게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방송 카메라는 평범한 사람도 통통하게 보이는 마법을 부리지 않는가.
나중에 TV에 나올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고생을 꼭 견뎌야만 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잡다한 소리들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소현은 손을 뻗어 며칠 전에 새로 받은 대본을 펼쳤다.
오디션용으로 얄팍했던 것과는 달리 제대로 된 정식 대본이다.
그중에 소현의 분량은 얼마 안 되지만, 몇 안 되는 대사라도 완벽하게 해낼 생각이었다.
스티커로 표시해 놓은 부분을 찾아 막 읽으려고 할 때 타이밍이라도 맞춘 듯 스마트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액정에 뜬 낯선 이름에 소현은 눈을 깜박거렸다.
전화번호부에 등록해 놓은 것을 보면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닌데.
그렇게 잠시 기억을 더듬던 소현은 마침내 상대방이 누군지를 떠올리곤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유미해는 같은 모델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소현과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친해질 기회도 있었고 말도 몇 번 섞긴 했으나 손주아한테 눈엣가시 취급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얽힐 일이 줄어들어 지금은 마주치면 인사만 잠깐 나눌 정도인 그런 관계였다.
잠시 망설이던 소현은 여전히 떨리는 스마트폰의 통화 표시를 꾹 눌렀다.
“여보세요.”
-소현아, 나 미해.
“응. 그래. 어쩐 일이야?”
-너 이번에 DBC 드라마에 캐스팅 됐다면서? 축하해.
“아. 고마워.”
-언제부터 방송하는 거야?
“일단 예정은 두 달 뒤로 잡혀 있어.”
-그럼 이제 곧 촬영을 시작하겠네.
“아마 그럴 거야.”
-한동안 바쁘겠네.
“조연이라서 그렇게 많이 나오지는 않아. 그래도 처음 하는 거니까 당분간에 여기에만 집중하려고.”
-잘 생각했어…….
잠깐 머뭇거리던 유미해가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너 정 실장님하고 친하지?
어떤 의도로 물어보는 건지 몰랐기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나쁜 사이는 아니지.”
-요즘 회사에 대해서 뭐라고 안 그러셔?
“별말씀 없었는데……. 왜 그래?”
-회사 사정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서 말이야.
“…….”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소현이 물었다.
“뭐 들은 이야기라도 있어?”
-지난번에 코엑스에서 화장품 론칭쇼가 열렸었잖아.
“그랬지.”
원래는 그녀도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드라마 오디션 준비를 한다고 포기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너하고 승미가 갔던 행사잖아.”
-맞아. 그런데 그때 페이를 아직도 못 받았어.
깜짝 놀란 소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벌써 보름도 훨씬 넘은 거잖아?”
지금까지 보통 일주일 안에는 정산을 해서 사무실에서 페이를 지급했었다.
아무리 늦어도 보름은 넘기지 않았었는데, 아직까지 페이를 못 받았다고 하니까 소현도 뭔가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써 그럼 마음을 지우면서 말했다.
“일이 조금 늦어지는 거겠지. 사무실에 있는 수나 언니한테 전화를 해 봤어?”
-했지. 그런데 언제 넣어 준다는 이야기도 없이 그냥 기다리고 있으래.
“그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속이 탈 만도 했다.
-이러다가 돈도 못 받고 갑자기 회사가 문을 닫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설마 그럴라고.”
-이 바닥에 그런 식으로 없어진 매니지먼트사가 한두 곳이 아니잖아. 혹시 누가 알아. 페이 지급을 자꾸 늦추는 것이 찝찝하잖아.
“……그건 그렇지.”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정 실장과 회사를 믿고 싶었지만, 돈 문제는 아주 민감한 거였기에 소현은 함부로 말을 못 하고 그냥 이야기를 들어 줬다.
-휴, 내가 애먼 사람 붙들고 뭐 하는 짓이람. 그냥 답답한데 아무도 말 할 사람이 없어서 전화해 봤어. 너랑 나랑은 적어도 같은 소속사니까…… 어쨌든 관계자잖아.
수화기 너머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안해.
“으응, 괜찮아.”
-얘기 들어 줘서 고마워. 다음에 만나면 밥이라도 한 끼 먹자. 그땐 내가 살게.
속내를 털어놓아서 시원한 듯 아까보다는 약간 후련해진 투로 미해가 그리 말하고 끊었다.
소현은 까맣게 변한 액정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통화 기록에서 정 실장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전화해서 사정이라도 물어볼까.
통화 버튼 위에서 헤매던 손가락이 이내 천천히 떨어졌다.
직접 연관된 사람도 아닌데 괜히 연락했다가 이상한 걸 캐묻고 다닌다고 불쾌해할지도 몰랐다.
모델계에선 몇 안 되는 친분인 데다 자신을 여기까지 끌어 준 정 실장님인데 내가 믿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분명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래, 남에게서 한쪽 이야기만 들은 걸로 판단하면 안 돼.’
소현은 그리 생각하고 스마트폰 대신 아까 보려고 했던 대본을 손에 들었다.
지금은 해야 되는 일에 집중하자.
똑똑똑.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자 깔끔하게 치마 정장을 차려입은 여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와 앞으로 다가왔다.
“사장님, 곽병창이라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래? 들여보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여직원이 몸을 돌려 나가자 그는 살펴보고 있던 서류철을 덮고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시 뒤 햇볕에 그을려서 까무잡잡하게 탄 피부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곽병창이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사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진을 통해 얼굴을 알고 있던 혁권이 웃는 얼굴로 먼저 한쪽 손을 내밀면서 상대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김덕현 전무한테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김혁권입니다.”
“아. 예. 곽병창입니다.”
회사에 함께 다닐 때 도움을 많이 받았던 김덕현 전무하고 대략 이야기를 나누고 오기는 했지만, 첫 만남부터 사장인 혁권이 반갑게 맞이하자 살짝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한 것이 공空은 아니었기에,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손을 맞잡고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그걸 놓치지 않고 본 혁권은 마음속으로 플러스 점수를 줬다.
“미안한테 여기 차 좀 가져다 줘요. 커피 괜찮으시죠?”
“네.”
“커피로 두 잔.”
“예, 사장님.”
두 사람은 한쪽에 있는 소파로 가서 마주 앉았다.
“보내신 이력서는 잘 받았습니다. 남미 국가들과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까지 이력이 아주 대단하시더군요.”
“말씀을 편하게 하십시오.”
꼬박꼬박 존대를 써 주는 것이 조금 불편했는지 곽병창이 말하자 그는 빙긋 웃으면서 머리를 내저었다.
“저보다 나이도 많으시고 아직 회사에 들어오신 것도 아닌데, 당연히 존대를 해 드려야지요. 물론 나중에 함께 일을 하게 된다면 상하관계가 분명해야 되니 말을 놓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공과 사를 정확히 구분하면서 상대를 존중해 주는 모습이 곽병창은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때 여직원이 커피를 가지고 들어오자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췄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집어 든 혁권은 몸을 살짝 뒤로 기대면서 말했다.
“무슨 일을 해야 되는지 이야기를 들었겠지요?”
“네.”
“오지奧地라고 할 수 있는 시에라리온 내륙에서 1년 중 거의 대부분을 보내야 되는 아주 고된 일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곽병창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 생활은 익숙하기 때문에 상관없습니다. 현재는 가족들하고 함께 지내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이혼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그는 괜히 아픈 개인사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기에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갔다.
“그럼 오랜 외국 생활도 상관이 없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진지한 얼굴로 앞에 앉아 있는 곽병창을 봤다.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이미 김덕현 전무를 통해서 들었을 테고, 구체적인 제안을 하도록 하죠.”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대우도 못 받고 다시 취업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곽병창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혁권의 이야기를 들었다.
“부장 직책에 연봉은 1억 그리고 실적에 따라서 적절한 액수의 보너스를 추가로 지급하고 휴가 때 비행기 티켓을 제공토록 하지요. 물론 각종 수당은 연봉에 포함되지 않는 조건입니다. 어떻습니까?”
“……!”
직접 와서 보니까 제법 규모는 있었지만, 그래도 대기업 계열사인 대평 인터내셔널에 비하면 작았기에 어느 정도 연봉에서 손해를 볼 걸 생각하고 있던 곽병창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1억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러자 무슨 의미로 묻는 건지 눈치챈 혁권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아마 보너스가 추가되면 그것보다 훨씬 많을 겁니다.”
“그, 그렇군요.”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전 마음에 드는데, 곽병창 씨는 회사에 들어오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연봉도 전에 있던 회사보다 높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인정해 주고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은 곽병창은,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받아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