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75)
로판에서 살아남기 175화
종막(2)
“청도국의 상처가 크다. 역등귀가 남긴 상처는 앞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도 계속 회자될 것이겠지.”
아직 청도궁의 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당상 고관들 사이에서 생겨난 수많은 공석들을 여러 대리자들이 때우고 있는 상황이라, 업무 파악만으로도 다들 몇 달은 걸릴 것이다.
그런 과도기를 보내고 있는 청도궁.
본궁 앞에 펼쳐져 있는 평천전(平川殿)에서 대장군의 즉위식을 단출하게 마무리했다.
내게 대장군의 인장이 새겨진 목패를 하사하는 운성 황제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대장군 설태평의 존재는 청도국을 수호하는 천군만마와도 같겠지만, 한 편으로는 언제고 들고 일어나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국정을 운영할 때 내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그냥… 나 안 건들이면 됐다.
대장군의 복식을 잘 차려입고, 허리에 찬 검을 다잡으며 평천전을 나와 보좌들과 함께 걸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일대의 사람들이 반으로 갈라지고, 고개를 숙이고, 경외의 표정을 보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만인이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신분이 되었으니, 이 청도국의 진정한 권력자라고 불러도 되겠군요. 이리되실 줄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
“…혹 제가 결례라도 범했을까요?”
즉위식이 끝나고 적궁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부관 인하연이 대기하고 있다가 내 검을 받아주었다.
가주 인선록이 죽고 구심점을 잃은 정선 인가는 반으로 갈라졌다고 들었다. 정선 인가의 후손으로서 심경이 복잡할 것인데, 그녀는 자신의 핏줄만큼이나 활성방 부관으로서의 정체성도 소중한 것인지 매번 착실하게 업무를 처리하러 나오는 것이었다.
내 검을 받든 뒤 고개를 숙이고서는, 지시할 것이 있는지 묻는 인하연을 보며 나는 헛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절 빤히 쳐다보시는 것이 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합니다. 가감 없이 말씀해 주시길.”
“별로 대단할 건 아니고… 그냥. 주작궁의 주인 노릇하다가 내 수발이나 들고 있으면 그 간극에 위화감 같은 건 안 느끼나 해서.”
“처음 활성방에 든 날에 이미 마음 정리는 끝내두었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짚으실 만한 부분은 아닙니다.”
“아니… 사실 굳이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
“…예?”
나는 경대에 가만히 걸터앉아서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했다.
내 어깨를 주물주물 거리면서 귓가에 속삭이는 설란의 그 흉흉한 눈동자.
이제 자신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청도국을 쥐락펴락할 그 천도공녀의 모습이었다.
“….”
“…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아니, 뭐… 별건 아니고….”
그래도 본성은 안 변하는 법이었다.
이따금씩 천진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영락없는 내 누이 설란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만인의 위에 바로 설 권력을 얻은 제 누님의 방침에… 나는 반기를 들 마음이 한 톨도 없었던 것이다.
“너, 해고다.”
“…예?”
나는 나지막이 인하연을 보고 똑바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됐다.”
“………………예????”
설란이 천도공녀의 자리를 꿰차면서, 임시로 자리를 맡아두고 있던 진청랑은 다시금 청룡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공석이 된 귀비의 자리를 이제 누가 채우게 되느냐가 문제였는데, 이런 혼란한 상황에선 새로운 인물을 뽑을 만한 사정이 안된다.
그러니, 원래부터 두루 존경을 받으며 그 자리를 역임하던 인물을 가져다 꽂는 게 가장 부담이 없었던 것이다.
인하연은 활성방 부관들 중에서도 가장 능력이 출중하여, 그녀를 다시 빼내서 후궁으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은 참 속이 쓰린 일이었으나….
사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해 보면 소속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역등귀의 재앙에 설 장군이 세운 공은 가히 나라를 구했다고 보아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 그에게 내가 표할 수 있는 가장 큰 예의는, 내 가장 소중히 아끼는 보물을 건네주는 것이겠지.”
현원 태자가 새 당상관들과 육부의 판서들 앞에서 내뱉은 말이었다.
말은 청산유수였다.
애초에 사대궁의 주인들에게 관심이라고는 한 톨 조차도 없었던 황태자 현원은, 국법과 황궁의 규율상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태자비들을 전부 내게 하사해 버린 것이다.
사실, 후궁의 여인을 구국의 충신에게 하사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아예 없었던 일은 아니다.
허나 그런 경우에도 하사되는 여인은 태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하급비들이다.
궁내 규율의 중심이자 가장 고귀한 여인들로 화자되는 사대궁의 주인들을 죄다 하사해 버리는 건 파격적인 행보를 넘어서,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일이 분명했다.
보통 이런 말도 안되는 선언을 하면 제아무리 황태자의 결단이라 해도 정3품 이상의 당상관들이 전부 다 들고 일어나는 법이다.
특히 궁내에서 꼰대의 역할을 수행하는 예부나 이부 판서들이 입에 칼을 물고 안 될 일이라며 본궁 앞에 드러누워야 정상이었다.
허나, 상황이 상황이었다.
대장군 설태평은 황제조차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권력의 최정상에 있는 인물로 유명하고.
무엇보다 이런 일을 추진한 것이 천룡채의 주인자리에 앉은 천도공녀 설란이었던 것이다.
이 청도국에 화용설가의 두 남매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자는 없다.
몇몇 신하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소심하게 반기를 들어본들, 황태자가 순식간에 일축해 버렸다.
그렇게… 청도궁 역사에 두 번은 없을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었다.
“태, 태자 전하….”
예부 판서가 눈물로 호소하며 이야기 했다.
“궁내의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옵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비참한 결단을 내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설 장군도 이런 일을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부 판서는 내 결단을 존중하라. 나도 쉬이 내린 결정은 아니다.”
“태자… 전하….”
졸지에 현원 태자는 태자비들을 전부 권력의 최정상에 있는 자에게 빼앗겨 버린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상은, 어떻게 하면 설란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고뇌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성인식을 치르고서도 후궁에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는 순애보다.
설란 이외의 여자가 어디 가서 뭘 한들 별로 관심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신하들 입장에서야 비극의 주인공이지, 현원 태자 입장에서는 이참에 설란에게 제 마음을 증명할 만한 좋은 기회를 잡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당상 회의의 소식을 들으며 아련한 눈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라꼴이…. 개판이구나….”
역등귀가 반쯤은 작살내놨으니 이런 혼란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싶다가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이 나한테 이렇게 가혹하게 굴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듣다 보니 설 시녀… 아니, 설 공녀님도 정치인이 다 되었다는 생각이 드네.”
“어떤 상황에서든 완벽하게 적응하는 분이시니, 조만간 이 청도국을 다 집어삼키시겠지.”
“무섭다 무서워….”
활성방 관청 뒤로 나와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면, 야트막한 언덕지대가 나온다.
그 뒤를 따라 올라가면 잔디가 가득히 펼쳐진 초원이 탁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곳에서 더 나아가다 보면 언덕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느티나무를 볼 수 있다.
그 풍경이 봄이 되면 어찌나 따사로운지, 이따금씩 바람을 쐬러 나오곤 하는 장소였다.
윤회가 마무리되고 나서, 연리는 한동안 활성방 자택에서 요양을 하기로 했다.
앞으로는 뭐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된 게 없다. 그래서 일단은 몸부터 회복하고 생각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요양 중에 한 번씩 사라질 때가 있었는데, 활성방 뒤쪽의 언덕에 올라오면 느티나무 위에 걸터 앉아서 조용히 황도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심경이 복잡하겠다 싶어서 가만히 놔뒀는데, 이제 슬슬 앞으로 어떻게 할지 물어볼 때가 되었다.
“태평이 네가 황위를 찬탈할 마음을 먹을 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설 공녀님도 알고 계시는 거야. 그래도 세월이 흐르고, 다시금 황족의 권위가 돌아오기 시작하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확실히 해두고 싶으신 거겠지.”
“….”
느티나무 가지에 걸터 앉아 가만히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연리.
나는 줄기 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초봄의 따사로운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겼다.
조카를 많이 보고 싶다느니, 넌 좋은 여인을 반려로 들여야겠다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았지만.
설란의 목적은 오로지 그것뿐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대장군 설태평이 태자비들을 모두 취했다.
그것이 청도국 정치판에서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흩뿌리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이런 식으로 황권을 찍어누르고, 적어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엔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것일까.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황권을 확실하게 견제하고, 그들을 꼭두각시로 만들어놓을 계산을 끝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로판 여주라는 것은….
….
….
“거기다가, 사대궁의 태자비들이 계속 널 두고 경쟁하고 싸우는 그림을 원하셨을지도….”
“….”
“원래 권력과 권위는 분리되어 있을수록 통제하기 쉬운 법이야. 어떤 한 명의 반려를 정해두기 보다는, 서로 경쟁을 시켜서 계속 서로를 견제하게 만드는 상황을 최대한 유지하려 할 거야. 태평아….”
설란은 가지 끝에 걸터앉아 발을 휘휘 내저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 잘난 가족을 둬도, 고생이 많은 법이구나….”
“이미 다 포기했다.”
이미 지금쯤 내 혼례에 대한 서신이 사대궁의 태자비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는다.
청룡궁의 처마 끝에 녹은 눈에서 뚝뚝 물이 떨어진다. 겨울이 끝났음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그 처마 아래의 마루에 앉아서, 궁복깃으로 제 입을 가리고서는 서신을 받아 읽고 있는 진 숙비의 모습이 있다.
얼굴에 용암이라도 끼얹은 듯 새빨개져서는, 발을 동동 구르며 배시시 웃다가… 이윽고 다른 태자비들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쨌든 쉬운 상대들이 아닌 것이다.
서신이 도착한 것은 현무궁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실에 앉아서 조용히 서신을 읽은 포 현비는, 식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목창을 열어 바깥바람을 쐬었다.
친우인가 연인인가 고민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제는 아예 부부의 연을 맺으라 하니 한층 더 땀줄기가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요컨대, 본인이 설 장군을 이성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귀비의 자리로 돌아와 앉은 인하연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주작궁의 상황을 살피며, 시녀장 현당과 회포를 풀고 있던 그녀는 혼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이윽고 조용히 얼굴을 붉히고 만다.
언제나 믿음직하던 인 귀비가 여인의 얼굴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시녀장 현당은 심경이 참으로 복잡해졌다.
그래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윽고 활기차게 웃어보인 것이다.
백호궁을 거닐다가 서신을 받은 하 덕비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허나, 이윽고 턱을 괴더니 조용히 손익을 계산하기 시작한다. 그가 황권에 도전할 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사실상 황제의 비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자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챈다.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서신을 품속에 넣은 뒤, 피어나기 시작하는 백호궁의 벚나무 아래로 조용히 걸어들어간 것이다.
“솔직히 감당하기 좀 힘들다.”
사대궁의 주인들은 한 명 한 명이 시대를 주도할 정도로 기가 세거나, 능력이 출중하거나, 욕심이 많은 자들이었다.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의 주인들을 모두 감당하라는 것은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천지를 뒤덮은 요귀를 홀몸으로 베어낼 수는 있어도, 여인의 마음을 휘어잡으라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연리야. 너 앞으로는 뭐 하고 살 거냐.”
“응? 생각 정리 중이야. 긴 세월을 청도궁에 다잡혀서 윤회를 반복해 왔으니, 이제 좀 바깥 세상도 다시 거닐어볼까 생각도 들고… 나 여행 꽤 좋아하거든.”
“….”
나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잠시간 하늘을 쳐다보다가, 잠시 헛웃음을 흘리곤 이야기했다.
“말했듯이, 나 혼자서 사대궁의 태자비들을 전부 감당하기는 너무 버거워….”
“아하하하! 말했잖아, 고생길 훤하다고. 태평이 네 팔자겠거니 하고 생각해. 그래도 백선궁 시절에 비하면 좀 낫지 않아? 적어도 목숨에 위협이 올 일은 없잖아.”
“그래도 버거운 건 마찬가지야. 그 사대궁의 주인을 휘어잡고 중심을 잡아줄 만한 인물이 좀 필요해.”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궁 내외의 상황에 눈이 밝으면서도, 사대궁의 태자비들이 어떤 인물인지 명확하게 꾀고 있고, 임기응변에 능한 그런 사람이 필요해. 그런 사람을 정부로 앉혀놓고 밀어주면, 적어도 그 갈등이나 견제가 선을 넘지 않도록 무게중심을 딱 잡아줄 수는 있겠지. 그럼 적어도 내 정신적인 압박이 많이 줄어들기는 할 거야… 그렇게 내 부인들을 다 휘어잡아 줄 만한 인물이 필요해.”
“오호… 확실히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 그런 딱 맞는 인재를 구하기가 어디 쉽겠니? 언제나 사람이 없는 게 문제지. 거기다 사대궁의 태자비들을 휘어잡다니,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 대개는 권력에 눈이 멀어서 사사로운 것에 집착하게 되겠지.”
“….”
“뭐, 그래도 태평이 네 권력도 하늘을 찌를 듯하니… 잘 수소문해서 찾다 보면 그런 사람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응원할게. 고생도 많이 했으니까, 이제 빛 볼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네~.”
“네 얘기야, 연리야.”
“…?”
정적.
따스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언덕에 가만히 앉아, 나는 지나가듯 이야기했다.
청혼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낭만이 결여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따사로운 봄볕 속에서 푸른 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는 것이면 충분하지 않나.
피로 얼룩진 가시밭길을 걸어오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은,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이 양지바른 언덕에서, 나는 목소리를 드높여 이야기했다.
“결혼하자, 연리야.”
나무에 올라타 발을 휙휙 휘젓고 있는, 저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소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얼굴을 부드럽게 훑는 바람이 머릿결도 천천히 흔들어놓고 있었다.
고된 삶을 버텨왔을 소녀에게 내가 건넨 그 짧은 말 한마디가 소녀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섣불리 짐작하려 해봐야 의미도 없을 터.
나는 다만, 쓸데없는 미사여구 따위는 전부 집어치운 채… 나답게 전달할 따름이다.
그렇게…. 따사로운 봄바람 속에서, 소녀는 지그시 웃으며 대답한다.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찬연히 빛나는 웃음을 얼굴에서 지우지 않았던 그 소녀.
세상에서 가장 값진 그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봄 바람 사이로 따사로이 내려앉았다.
“그건 좀……..”
“……….”
“……….”
“……….”
“…….”
“…….”
“….”
“….”
오 신이시여.
“아, 아니… 부, 분위기가 너무 낭만적이어서 은근하게 넘어갈 뻔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처, 청혼 방식이 너무하잖아…! 와 진짜… 완전히 넘어갈 뻔했네! 선수 다 됐네, 다 됐어!”
“….”
“내 부인들이 너무 기가 세서 무서우니까, 네가 정부 자리에 앉아서 뒷감당 좀 같이해라… 야, 그런 말 듣고 네 결혼해요 하고 고개 끄덕일 여자가 세상에 어딨어?! 미쳤어 태평아?!”
“….”
– 휘익
– 툭
나무에서 뛰어 내려온 연리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이 청도궁에서 얼마나 난리를 피웠는지 알면서, 또 지옥으로 끌려 들어가라고?! 또 그 태자비들이랑 엮여서 죽느니 사느니 생사결을 해대라고?! 아하하-! 안됐네-! 안됐어-! 미안하지만 난 이 지옥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생각이 없지롱! 세상 구경도 좀 하고 밖도 좀 나다니다가 한 번씩 얼굴 보고 싶어지면 찾아올게! 그거면 됐지! 어휴! 분위기에 휩쓸려서 넘어갈 뻔했네!”
…아깝다!
젠장 거의 다… 넘어왔는데… 왜 이럴 때만 갑자기 똑똑해지는 거지?
“아하하! 난 이 청도궁을 뜰 거지롱! 이미 대장군 직위도 받아버렸고, 태자비들과의 혼례까지 확정되어 버린 너는 여기 망령처럼 묶여 있으렴! 난 자유의 바람을 타고 청도국을 떠돌 테니! 그리워지면 한 번씩 찾아와서 근황 이야기도 하고 할게!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꼴 좋다! 계속 버텨보라지! 난 자유다! 자유야!”
세상 고소하다는 듯이 발랄하게 웃어보이는 연리는 만세삼창을 하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
나는 갑자기 뒷목이 당겨오기 시작했다. 이마에 십자 핏줄이 비죽, 하고 튀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언제까지고 국밥이나 먹고 살 순 없지! 아하하핫~! 한 번씩 기념품도 사올 테니까 먹고 싶은 게 생기면 서신이라도 보내놓….”
“연리야.”
“…응?”
꽃이 피어오르듯 명랑한 미소. 란 누님에게 배운 것이었다.
“왜 너한테 거부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응?”
넌 폐위당한 퇴물이고.
난 지금 이 청도국의 황제조차도 눈치를 보는 최고의 권력가였다.
“….”
“….”
“….”
“….”
3일 뒤, 연리는 시녀들에게 둘러싸여서 몸치장을 받고 있었다.
“아현 아씨…! 너무 아름다우세요! 청도국 최고의 권력가이신 설 장군의 정부 자리라니… 그야말로… 그야말로 궁내의 모든 여인이 우러러보고 있을 거예요!”
“저희만 믿으세요! 천룡채에 있을 때부터 몸치장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숙달되어 있으니까요!”
“혼례식장에서는 세상 그 어떤 여인도 넘볼 수 없을정도로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드릴게요!”
“그런데… 날이 많이 따스해져서 그런가… 땀을 좀 흘리시네요… 분칠이 지워지면 안 될 텐데….”
시녀들에게 둘러싸여서 앉아 있는 연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감히 날 이 지옥에 몰아넣어 놓고 혼자 도망치려고?
그리 말하는 설태평의 흡족한 미소가 눈가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소녀는 그렇게 눈물을 머금으며, 얌전히 몸치장을 받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