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08
408
그날 저녁.
이일주는 사설경마장 사무실에서 잔뜩 겁먹은 얼굴로 무릎을 꿇고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는 배명규를 가만히 내려다 봤다.
잡혀 오면서 두들겨 맞았는지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 보이는 얼굴은 온통 멍투성이였다.
“이놈이야?”
옆에 서 있던 권계현이 얼른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설경마장에 처박혀 있는 걸 찾아냈습니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군.”
“그날 처음 봤고 누군지 전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일주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직 덜 맞았나 보군.”
“저, 정말입니다!”
사색이 된 얼굴로 배명규가 소리쳤지만 이일주는 팔짱을 낀 채 조직원들을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뭐 해?”
뒤에 있던 조직원 두 명이 각목을 손에 들고 나와서는 바닥에 앉아 있는 배명규를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퍽! 퍼퍽!
“아악!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배명규는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엎드려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미 사설 경마장 영업이 끝난 시간인 데다 경찰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 이 건물 전체를 올림픽파에서 임대해 쓰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를 도와주러 올 사람이 없었다.
각목이 한번 내려쳐질 때마다 배명규는 온몸이 부서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양심과 소속사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감췄던 배명규는 구타를 이겨내지 못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소리를 내질렀다.
“다 말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좀 살려 주십시오!”
“그만.”
이일주의 말에 조직원들이 구타를 멈추고는 쓰러져 있는 배명규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워서는 다시 무릎을 꿇리고 앉혔다.
“말해 봐. 대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라면 그때는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땀이 흘러 샤워라도 한 듯 온몸을 적신 배명규는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그, 그때 저한테 회사를 사 갔습니다. 그리로 가시면 누군지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회사라고?”
눈에 힘을 주면서 묻자 배명규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네. 작은 매니지먼트 회사를 하나 운영했었는데, 그걸 넘겨줬습니다.”
“흐음.”
잠시 생각을 하던 이일주는 겁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배명규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다른 건 없어.”
“제가 알고 있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다시 구타를 당할까 봐 필사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이일주는 피가 진득하게 묻은 각목을 한쪽 손에 들고 서 있는 조직원들에게 시선을 줬다.
“창고에 가둬 놔.”
“예, 형님.”
허리를 접으면서 대답한 조직원들이 두들겨 맞아서 너덜너덜해진 배명규의 팔을 양쪽에서 잡고는 사무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매니지먼트 회사라…….”
혼잣말을 중얼거린 이일주는 이내 고개를 돌려 권계현을 쳐다봤다.
“애들 데리고 가서 저 자식 말이 맞는지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이제 꼬리가 잡힌 것 같군.”
이일주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들거렸다.
두둑. 둑!
연습용 글러브를 양손에 낀 혁권은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아 가면서 눈앞에 걸려 있는 샌드백을 두들겼다.
가볍게 잽을 날리다가 가끔씩 터져 나오는 훅과 어퍼컷 펀치가 상당히 위력적이었다.
이쪽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꾸준히 운동을 하고 관리를 해 온 덕분인지 운동복 사이로 드러난 등근육과 어깨는 웬만한 격투기 선수 못지않을 정도였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이 체육관 바닥을 적셨지만 혁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위빙을 하면서 주먹을 날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요란한 벨 소리가 울리며 미리 설정해 놓은 4분이 다 지났음을 알렸다.
출렁거리는 샌드백을 두 손으로 잡고 호흡을 가다듬은 혁권이 잠시 쉴 듯한 기미를 보이자 백성균이 재빨리 수건을 내밀었다.
“아직 한 세트 더 남았지?”
“예.”
마른 수건을 목에 건 혁권이 한 쪽에 놔둔 접이식 의자에 턱 앉았다.
흘린 땀을 보충이라도 하듯 이온음료를 들이켜자 목울대가 아래위로 꿈틀거렸다.
백성균이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보스, 잠깐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통을 한쪽 손에 든 채 혁권이 고개를 들어 백성균을 쳐다봤다.
“말해 봐.”
“지난번 사설 경매장에서 부딪쳤던 조직원들이 말입니다.”
“그놈들이 어쨌는데?”
소현과 관련된 이야기였기에 혁권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날 시비가 붙었던 것이 찝찝해서 후배들을 시켜 살펴보고 있었는데,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 봐.”
“올림픽파 놈들이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사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그놈들이 거길 왜!”
“아무래도 지난번 일 때문에 그러는 것 같습니다.”
“으음.”
혁권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들 입장에서는 사업장에 와서 난동을 부린 걸 테니까 자존심상 그냥 있을 수는 없을 거였다.
바깥에서 굵직한 상대들과 맞부딪치다 보니 한국 조폭들을 너무 쉽게 본 것이 잘못이었다.
백성균이 혹시 몰라 후배들을 시켜 계속 주시하고 있었기에 다행이지, 만약 아무것도 모른 채 올림픽파가 보복을 해 왔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했다.
하킴을 비롯한 경호원들이 24시간 옆에 붙어 있는 자신은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을 테지만, 다른 주변 인물들은 상황이 달랐다.
부모님이나 소현이 위해를 당하기라도 했다면 그 죄책감과 분노는 감당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문 혁권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매니지먼트 회사에 얼쩡거린다는 걸 보니 전 사장이 입을 놀린 모양이군.”
“짐작이 맞으실 겁니다.”
“후배들한테 일을 시켰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저번에 보니까 제법 힘을 쓰고 눈치도 빠른 것 같던데, 어디 다른 데 소속되어 있는 곳이 있나?”
백성균은 질문을 하는 혁권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얼른 대답했다.
“운동만 하던 녀석들이라 조직 같은 곳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무슨 운동을 했는데?”
“격투기를 배웠습니다. 둘 다 챔피언은 못 됐지만 프로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실력은 있습니다.”
“만약 계속 옆에 두고 일을 시킨다면 어떨까?”
“최소한 뒤통수는 치지 않을 녀석들입니다.”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에 찬 대답에 후배들에 대한 백성균의 믿음을 잘 알 수 있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이 앞에 서 있는 백성균을 보면서 말했다.
“좋아. 그러지 않아도 국내에 두고 쓸 사람이 필요했는데 잘됐군. 후배들한테 내 밑에 들어와서 일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도록 해.”
“분명 감사하며 제안을 받아들일 겁니다.”
“아무래도 조만간 할 일이 생길 것 같으니까. 빨리 이야기를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샤워를 하고 나올 테니까 하킴을 불러와.”
“예.”
아직 한 세트가 더 남았지만 혁권은 음료수 통을 의자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걸어갔다.
탁.
골프공이 퍼팅 매트 위를 가볍게 굴러가 홀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허종철이 상체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모델 매니지먼트사라고 했어?”
시선을 받은 이일주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배명규라는 놈한테 매니지먼트사 지분을 넘겨받으려고 왔다가 저희 애들하고 부딪친 것 같습니다.”
허종철은 송정렬에게 골프채를 넘기고는 두툼한 가죽 소파로 가서 앉았다.
담배를 입에 물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송정렬이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 주었다.
하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면서 허종철이 물었다.
“그런데 족보도 없는 놈들이라고?”
“예. 조사해 보니 안양에 작은 회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는 것 빼고는 별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재미있군. 그딴 녀석들한테 영업장 앞에서 떡이 되도록 얻어 터졌다는 거야?”
눈을 매섭게 치켜뜨면서 쳐다보자 이일주가 침을 삼키며 머리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다른 조직들이 이걸 알면 우릴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어중이떠중이를 다 받아들이더니 애들 관리가 안 되는 모양입니다.”
신경을 긁는 이야기에 이일주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박민재를 찢어 죽일 듯이 사납게 노려봤다.
마음 같아서는 주둥아리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지만 큰형님이 계신 자리였기에 애써 끓어오르는 화를 눌러 참았다.
“그래도 생활을 한다는 놈들이 가오가 있지. 애들 관리에 신경 좀 써.”
“……예.”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두 사람을 쓸어 보면서 허종철이 이야기를 했다.
“어찌 됐건 피해를 입었으니 적절한 보상을 받아 내야 되겠지.”
“맞는 말씀입니다.”
잽싸게 맞장구를 친 박민재가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제법 돈푼깨나 있는 놈 같으니까 큰 걸로 3~4장 정도는 받아 낼 수 있을 겁니다.”
“애들이 다쳐서 병원 신세까지 졌고 영업에도 지장을 줬으니까 그 정도는 뱉어 내게 해야지. 어때, 할 수 있겠어?”
“이자까지 쳐서 받아 오도록 하겠습니다.”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처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백성균이 지난번에 봤던 후배들을 데리고 사장실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앞으로 다가온 백성균이 혁권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 후배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백성균이 눈짓을 하자 바짝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후배들이 허리를 기억자로 꺾으면서 인사를 했다.
“이렇게 다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동선수 출신답게 둘 다 각 잡힌 체격에 절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혁권은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오른쪽 사내한테 시선을 멈추고는 입을 뗐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임영식입니다.”
“저는 지병하라고 합니다.”
둘 다 긴장한 탓인지 말을 조금 더듬거렸지만 그렇다고 위축된 모습은 아니었다.
“대충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들었겠지.”
“옛.”
“일이 있으면 전쟁터도 찾아가야 되고, 때에 따라서는 사람을 죽여야 될 수도 있어. 만약 그럴 자신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해.”
너무나도 직설적인 이야기에 잠깐 당황스러워하던 두 사람은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이미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것 같은 태도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배신하지 않고 날 밀고 따라온다면 너희들 뒤는 내가 책임진다.”
“충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혁권이 한쪽에 서 있는 백성균을 보면서 말했다.
“두 사람 다 소현이한테 붙여서 조용히 경호를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제 소현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기에 혁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시를 내렸고 부하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지갑에서 수표를 잡히는 대로 꺼내 두 사람한테 내밀었다.
“일단 활동비로 쓰고 부족하면 여기 있는 백성균을 통해서 언제든지 이야기를 해.”
잠시 머뭇거리던 두 사람은 백성균이 살짝 머리를 끄덕이자 양손으로 공손하게 수표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백성균이 앞으로 해야 될 걸 자세히 설명해 주고 가능하면 오늘부터 바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예.”
대답을 들은 혁권이 고개를 바로 하고는 먼저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임영식과 지병하는 얼른 차례대로 그의 손을 양손으로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