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07
407
-오늘 대본 리딩하는 날이지?
“기억하고 있었네요.”
-당연하지 애인 스케줄 정도는 줄줄 꿰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아유, 그러세요.”
혁권의 너스레에 소현은 한쪽 귀에 스마트폰을 댄 채 피식 웃었다.
-내가 나중에 데리러 갈까?
“대본 리딩이 끝나고 간단하게 연출진하고 회식이 있다고 했으니까 안 와도 돼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제 나가 봐야 되니까 그만 끊을게요.”
-알았어. 떨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만 해.
“그럴게요.”
스태프와 선배 연기자 들 앞에서 혹시라도 말을 버벅거리거나 실수를 하면 어떻게 하나 내심 긴장하고 있던 소현은 혁권과 통화를 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다.
처음 해 보는 연기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최근 여러 가지 소속사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 들렸던 것도 그녀를 신경 쓰게 만들었다.
며칠 전에 다행히 일이 잘 해결됐고 사장도 바뀌었다는 걸 정 실장을 통해 듣기는 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우웅.
진동 소리에 스마트폰을 확인하자 픽업을 하러 정 실장이 집 앞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어머. 벌써 오셨네.”
미리 외출 준비를 다 끝내 놓고 있던 소현은 서둘러 가방을 챙겨 들고는 오피스텔을 나섰다.
“소현 씨, 여기야!”
막 자동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던 소현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실장님.”
“잠은 푹 잤어?”
“네. 그런데 웬 밴이에요?”
일명 연예인 차라고 불리는 쉐보레 익스플로러 밴Explorer Van이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면서 정 실장 뒤에 세워져 있는 걸 보고 소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이거. 앞으로 소현 씨가 타도 다닐 차야.”
“제가요?”
“그래. 이제 드라마 촬영을 시작하면 로드는 물론이고 코디에 메이크업까지 붙어야 되고, 현장에서 밤을 새워야 될 때도 있을 텐데 카니발은 너무 좁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정말 이걸 제가 타고 다녀도 되는 거예요?”
“하하하. 그렇다니까.”
카니발도 일이 있을 때만 겨우 타고 다니다가 갑자기 차량 가격만 1억이 훌쩍 넘어가는 밴이라니, 소현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특히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사가 많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더욱 그랬다.
괜히 드라마 촬영 스태프와 연기자 들 앞에서 그녀의 자존심을 세워 주려고 무리를 한 것 같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 실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카니발도 괜찮으니까 이런 차를 안 타고 다녀도 돼요.”
“왜, 밴이 마음에 안 들어?”
“그게 아니라…… 회사도 어렵다고 하던데, 저 때문에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들은 정 실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낮게 웃었다.
“이번에 우리 회사 사장 자리 바뀐 거 알지?”
“예.”
“새로 오신 사장님이 투자 자금을 넉넉하게 내주셨어. 덕분에 전보다 훨씬 회사 주머니 사정도 나아졌고. 그러니까 소현 씨는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돼.”
“정말요?”
“자, 이제 다른 소리 그만하고 일단 타 봐.”
정 실장이 옆문을 열어 주자 소현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한구석에 넣어 두고 밴에 올라탔다.
여자들도 편하게 오르고 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발판을 밟고 안으로 들어가자 완전히 신세계가 펼쳐졌다.
카니발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실내에 비행기 1등석처럼 편안한 고급 가죽 시트 그리고 27인치 LED 모니터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남이 타던 차가 아니라 새로 뽑은 건지 특유의 냄새가 풍겼다.
정말 이걸 타고 다녀도 되는 건지 아직까지도 믿기지가 않은 소현은, 잘못해서 흠집이라도 날까 봐 조심해서 자리에 앉았다.
조수석에 탄 정 실장이 그걸 보곤 웃으면서 말했다.
“편하게 있어도 돼. 그리고 소현 씨, 인사해 이쪽은 새로 일하게 된 로드 매니저인 도형석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도형석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또래로 보이는 사내가 몸을 돌려 깍듯하게 인사를 하자 소현도 얼른 같이 머리를 숙였다.
“아, 잘 지내 봐요.”
“제대한 지 얼마 안 되는 친군데, 운전도 제법 하고 싹싹하니까 함께 일하기 좋을 거야.”
“……네.”
“코디하고 메이크업은 이틀 뒤부터 나오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일단 신인인데 첫 리딩부터 늦으면 안 되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하자고.”
“예.”
“일산 DBC 제작 센터로 출발해.”
“알겠습니다.”
신입답게 힘차게 대답한 도형석은 가속 페달을 천천히 밟으면서 밴을 출발시켰다.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소현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주변 환경 변화에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장동 올림픽파 중간 간부이자 행동대장인 이일주가 유흥가에 위치한 성인 나이트클럽에 들어서자, 홀을 관리하는 조직원이 그를 알아보곤 얼른 앞으로 다가와 꾸벅 허리를 접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큰형님은?”
“안쪽 사무실에 계십니다. 저…… 그런데 기분이 안 좋으시니 조심하십시오.”
“알았다. 일 봐라.”
“예, 형님.”
홀을 가로질러 걸어간 이일주는 클럽 안쪽에 위치한 사무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간 이일주는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있는 사내를 보며 인사를 했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30대 후반에 날카로운 눈매와 두툼한 입술이 인상적인 사내는 마장동 일대를 주무르는 올림픽파 두목인 허종철이었다.
클럽 사장실은 상당히 넓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책상 뒤편으로 책장과 함께 수입산 골프채 세트도 놓여 있었다.
한 세트에 수백만 원이 훌쩍 넘는 아주 고가의 골프채였지만 공보다는 사람한테 더 많이 휘둘렸다.
“사설 경마장에서 우리 애들을 박살 낸 자식들이 누군지 알아냈어?”
고개를 든 허종철이 몸을 뒤로 기대면서 묻자 이일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직 찾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찾고 있는 중이라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종철이 책상에 놓여 있던 크리스털 재떨이를 집어 던지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와장창!
“그걸 지금 뚫린 입이라고 나불대는 거야!”
“죄송합니다.”
얼른 머리를 숙였지만 허종철은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씨근덕거렸다.
그나마 행동대장이자 측근인 이일주였기에 이 정도지, 아마 다른 말단 조직원들 같았으면 불같은 허종철의 성격에 재떨이가 아니라 대번에 골프채가 날아왔을 거였다.
“야! 이 새끼야, 일이 벌어진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여태 깽판을 친 놈이 누군지 정체도 모르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이래 가지고 내가 믿고 너한테 일을 맡길 수 있겠어?”
버럭 소리를 친 허종철이 이일주를 노려봤다.
“조직원들이 다섯 명이나 당해서 병원에 들어가 있는데 이러고 있으면 다른 조직들이 날 얼마나 우습게 여기겠어! 이 바닥은 한번 약점을 보이면 끝장이라는 거 몰라.”
“애들을 전부 풀어서 뒤지고 있으니 조만간 어떤 놈들인지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허종철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이일주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틀을 줄 테니까. 그 안에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우리 애들을 곤죽 낸 놈을 잡아내서 내 앞으로 끌고 와. 만약 그러지 못하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낮게 깔린 목소리에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느낀 이일주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가 봐.”
“옛.”
귀찮은 듯 허종철이 한쪽 팔을 내젓자 이일주는 머리를 숙이고는 사무실을 나왔다.
굳은 얼굴로 룸 사이에 난 복도를 걸어가던 이일주는, 조직 내에서 그와 경쟁 관계인 박민재가 부하 두 명을 대동하고 한쪽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는 걸 보고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그냥 지나쳐 가려고 하자 박민재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툭 말을 내뱉으며 신경을 건드렸다.
“오랜만이야. 그런데 얼굴색이 별론데 큰형님한테 야단이라도 들었냐?”
대충 눈치를 채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물어보는 모습에 이일주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너하고 장난칠 기분 아니니까. 건들지 마라.”
“어쭈, 그러다가 진짜 한 대 치겠다.”
벽에서 몸을 뗀 박민재가 빈정거리면서 말하자 이일주가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작살나기 싫으면 주둥아리 닥치고 있어.”
“자기 영업장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병신 같은 새끼가 어디서 이빨을 보이고 지랄이야.”
“이 자식이!”
“덤벼 봐, 새끼야.”
서로 욕설을 내뱉으면서 금방이라도 한판 붙을 것처럼 노려보자 주위에 있던 조직원들까지 덩달아 두 패로 갈려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2인자 자리를 두고 오래전부터 개와 고양이처럼 부딪쳐 온 사이였기에 언제 피를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서로 성격이 상극인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하기 위해서 허종철이 의도적으로 이런 분위기를 조성한 것도 한몫했다.
바로 주먹질이 오갈 것 같던 그 순간 두목인 허종철의 심복으로 측근 경호를 맡고 있는 송정렬이 조직원들을 헤치고 다가와 두 사람을 말렸다.
“왜들 이러십니까? 사무실에 큰형님이 계신데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요.”
송정렬의 말에 잔뜩 얼굴을 상기시킨 채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너 이 자식 운 좋은 줄 알아.”
“누가 할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뭐야!”
잠시 사그라들었던 싸움의 불씨가 다시 붙을 낌새를 보였다.
해보라는 식으로 턱을 치켜드는 이일주와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박민재 사이에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아까 송정렬이 끼어들어서 한 말 덕분인지 박민재는 이를 갈기만 할 뿐 더 이상 큰 소리를 내진 않았다.
“시발 새끼. 나중에 두고 보자.”
거칠게 몸을 돌리자 박민재의 부하들도 상대방을 노려보고는 뒤를 따랐다.
“흥.”
반면 이일주는 구겨진 넥타이를 단정하게 정돈하면서 혀를 찼다.
꼼꼼하게 위에 걸친 재킷까지 탁 소리 내어 주름을 편 그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얼굴로 부하들을 이끌고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클럽을 나오자 옆에 붙어 있던 권계현이 이일주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십니까.”
“제길. 이제 개나 소나 내가 다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군.”
“…….”
짜증스럽게 내뱉는 말에 권계현은 죄인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
승용차를 기다리면서 이일주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권계현이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줬다.
“후우.”
하얀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길게 내뱉은 이일주가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날 우리 애들을 박살 낸 녀석들이 영업장에서 죽치고 있던 호구를 먼저 끌고 나갔다고 그랬지.”
잠깐 기억을 떠올린 권계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예.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 호구 자식이 놈들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당장 찾아내서 끌고 와.”
“알겠습니다.”
때마침 승용차가 도착하자 이일주는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버린 뒤 구둣발로 비벼 끄고는 뒷좌석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