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12
412
혁권은 얼마 전까지 허종철이 쓰던 사장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전쟁에서 이겨 상대편 왕궁의 옥좌를 차지하고 앉은 승장僧將 같았다.
알아바디가 새로 받아들인 임영식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보스, 다녀왔습니다.”
혁권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
“다른 업소에 있던 조직원들을 모두 정리하고 문을 닫도록 했습니다.”
“잘했어.”
“그리고 이걸 가져 왔습니다.”
알아바디가 천으로 된 커다란 보스턴백 하나를 탁자에 올려놓자, 혁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그러자 알아바디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설 경마장에 보관되어 있는 돈을 가져왔습니다.”
지퍼를 열고 가방 안을 확인하자 5만 원과 1만 원짜리 지폐 뭉치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사설 경마장에서 도박꾼들을 상대로 벌어들인 수익금이었는데, 대충 살펴봐도 3~4억 원은 되는 것 같았다.
시키지도 않은 행동을 한 것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혁권은 이내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다시 지퍼를 채웠다.
“안 그래도 밖에 있는 녀석들에게 돈을 챙겨 줘야 되는데 잘됐군. 수고했어.”
“그럼 전 나가 있겠습니다.”
“그래.”
꾸벅 허리를 숙인 두 사람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하킴이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글쎄…….”
사실 올림픽파 놈들이 이쪽을 노린다는 이야기에 즉흥적으로 일을 벌인 거였기에, 어떻게 정리를 할 건지 따로 생각해 둔 것이 없었다.
“두목과 간부들을 꺾어 놓기는 했지만 기반이 남아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조직을 재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이게 문제였다.
혁권 자신이야 다시 덤벼든다고 해도 얼마든지 다시 박살 내 버릴 수 있었지만, 가족과 소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경호를 붙여 놓고 계속 불안해하며 살 수는 없었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조직을 다시 재건하지 못하도록 아예 싹을 다 잘라 버리는 거였다.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고심하던 혁권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하킴을 보며 말했다.
“방갑수한테 연락해서 이리로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한 하킴은 바로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보며 혁권은 푹신한 가죽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시간이 막 자정을 넘겼을 때 백성균이 방갑수를 데리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갑수는 예의 느물느물한 미소를 입에 달고 아첨하는 듯한 투로 말을 꺼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올림픽파를 금방 박살 내셨군요!”
하지만 혁권은 이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그 대신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 앉아.”
“아. 예.”
방갑수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뒤편에 서 있던 하킴이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줬다.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잠시 아무런 말이 없던 혁권은 방갑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도 사기 도박판을 벌이고 다니나?”
혁권의 물음에 방갑수는 양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대답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이제 그쪽은 완전히 손을 털고,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착실하게 심부름센터만 운영하고 있습니다.”
뒷조사나 불법 도청 같은 걸 하면서 먹고사는 거니 착실한 거하곤 거리가 멀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혁권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밑에 데리고 있는 부하들이 얼마나 되지?”
자꾸 이상한 걸 묻자 의아한 생각이 든 방갑수는 혁권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했다.
“열 명 정도 됩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따로 병신을 만들지는 않겠지만 병원에 실려 간 허종철하고 측근들은 더 이상 이쪽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은퇴를 시킬 생각이야.”
당연한 행동이었기에 방갑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이 구역을 맡아 볼 생각이 있나?”
“……!”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방갑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저한테 여길 맡기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맞아. 기존에 있는 조직원들을 흡수하고 내가 뒤를 봐준다면 쉽게 허종철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지 않겠어. 어때, 생각이 있나?”
“…….”
그냥 한번 던지는 말이 아니고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방갑수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허종철과 측근들이 다 꺾인 상태였기에 남은 조직원들만 끌어들인다면 올림픽파가 장악하고 있던 구역을 차지하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혁권의 영향력 아래에서 움직여야 되겠지만, 어차피 방갑수가 자기 힘으로 조직을 깬 것이 아니었기에 특별히 불만은 없었다.
그리고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방갑수는, 혁권이 뒤를 봐주지 않는다면 자신 혼자서 절대 올림픽파를 장악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당장은 머리를 숙일지 몰라도 백성균처럼 싸움을 잘하지도 못하고, 데리고 있는 부하들이라고 해 봤자 양아치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었기에, 까딱 잘못했다가는 뒤에서 칼을 맞기에 딱 좋았다.
그렇기에 자리를 지키려면 혁권의 힘이 필요했다.
속 편하게 제안을 거절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유혹이 너무 컸다.
군소 조직이었지만 자신만의 구역을 가지고 여러 업소들로부터 상납을 받는 것과, 작은 심부름센터의 사장하고는 비교자체가 되지 않았다.
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던 방갑수는 자세를 바로 하고는 혁권을 향해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맡겨만 주신다면 충심을 다 받치겠습니다.”
충성을 다할 것처럼 행동했지만, 백성균하고 달리 간사하고 계산이 빠른 인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진심이라고 믿지 않았다.
앞으로 방갑수가 어떻게 하든, 계륵鷄肋이나 마찬가지인 조직을 떠넘기고 허종철과 측근들이 재기하지 못하게 막기만 하면 됐다.
“좋아.”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고개를 들어 문 쪽에 서 있는 백성균을 보며 말했다.
“남아 있는 조직원들을 홀에 모아 놨지.”
“예.”
“조금 있다가 나가서 충성 맹세를 받을 거니까. 준비해 놔.”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한 백성균은 지체 없이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던 소현이 꾸물거리면서 겨우 눈을 떴다.
“우웅.”
한쪽 팔을 뻗어서 알람을 끄고 스마트폰 시계를 확인하자 아침 7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더도 말고 딱 1시간만 더 자고 싶었지만 오전에 피부 관리실 예약이 되어 있었기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일어나야 했다.
제작 발표회와 드라마 촬영을 앞두고 소속사에서 잡아 준 거였는데, 이주일 코스에 300만 원이나 하기 때문에 절대 빼 먹을 수가 없었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는데, 피부 관리는 고사하고 스케줄이 있어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매니저 없이 혼자 움직여야 했었다.
모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현장에 가면 그쪽에서 메이크업과 준비된 옷을 입혀 줘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소속사가 작고 넉넉하지 않은 이유가 컸다.
소속된 모델들 모두 전담하는 개인 매니저 없이 정동식 실장과 직원 한 명이 돌아가면서 일을 봐 줬다.
불편한 것이 많았지만 A급 모델이 아닌 이상 대부분 이렇게 움직였기에 그리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렇게 생활을 해 오다가 아이돌들이나 타고 다닌다는 밴에 전담 매니저와 코디네이터, 메이크업 스태프가 배정되고 피부 관리까지 소속사에서 시켜 주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모델 일에서 벗어나 연기자로 데뷔를 한다지만, 그래 봤자 조연을 맡은 신인일 뿐인데 정말 과분한 대우였다.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챙겨 주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다른 모델들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예전과 달리 스케줄이 있으면 소속사에서 차량과 함께 매니저를 보내 줘 훨씬 편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처음에 회사 사장이 바뀌었다고 했을 때 불안해하던 것과 달리 지금은 다들 아주 좋아했다.
소현 역시 정 실장과 김수나 정도만 친분이 있지 배명규 전 사장하고는 그리 가깝지 않았었기에 만족해했다.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욕실을 향한 소현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아직 반쯤 남아 있던 잠기운을 몰아냈다.
자몽 향기가 나는 샤워 젤로 온몸에 거품을 내고 목과 어깨를 간단하게 마사지하면서 수증기로 뽀얗게 흐려진 거울을 바라봤다.
간밤에 푹 자서 그런지 눈가에 붓기도 없고 썩 괜찮아 보였다.
수건을 돌돌 말아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후 대충 물기를 닦고 나온 소현은 화장대 앞에 앉아 꼼꼼하게 스킨로션을 펴 발랐다.
어차피 피부 관리실에선 맨 얼굴로 있어야 하는 데다, 거기서 또 팩이며 에센스며 다 해 줄 것이기 때문에 아침부터 미리 공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집에서 입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말리려고 드라이기를 드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이런 시간에 누구야?”
혼자 사는 여성이라면 으레 품을 경계심을 가지고 소현이 문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나야.
익숙한 목소리에 소현이 눈을 크게 떴다.
“혁권 오빠? 어쩐 일이에요, 아침부터.”
-잠깐 전해 줄 게 있어서 들렀지. 문 좀 열어 줄래?
“조금만 기다려요.”
소현은 카드키를 챙겨 들고 황급히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에 도착하자 투명한 유리문 너머에서 서성이던 혁권이 소현을 향해 다가왔다.
“그냥 문만 열어 주면 되는데, 왜 내려왔어?”
오피스텔 입구에는 입주자들만 출입할 수 있도록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물론 인터폰으로 호출을 해 열어 달라고 하면 위에서 버튼 하나를 누르는 걸로 간단하게 해결되지만,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 준 사람을 조금이라도 밖에 세워 두고 싶지 않았다.
혁권은 마른 어깨가 다 드러나는 원피스 차림의 소현을 보고선 어쩐지 시선을 옆으로 피하는 듯했다.
“자, 커피.”
“고마워요.”
일찍 일어나야 하는 아침이면 항상 카페인이 간절해지는 법이다.
소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아직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에 다시 올라탔다.
“안 탈 거예요?”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이 없어 돌아보니 혁권은 여전히 맨션 입구에서 좀처럼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들어가도 돼?”
굉장히 놀란 표정이라 소현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요. 안 될 게 뭐 있어요?”
‘설마 문전박대라도 할 줄 알았나.’
“어, 그럼…….”
이상하게 머뭇거리는 태도로 엘리베이터에 탄 혁권은 소현이 현관문을 열어 줄 때까지 뒤로 물러서서 기다렸다.
“어서 오세요. 그러고 보니 오빠가 집 안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네요.”
“응.”
구두를 벗어 실내에 발을 디딘 혁권은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눈초리로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집에 초대받을 줄 알았으면 커피가 아니라 더 좋은 선물을 가져오는 건데 그랬어.”
“뭘 그리 거창하게.”
가볍게 웃어넘기려던 소현은 그제야 여자 혼자 사는 집 안에 처음으로 남자를 들였다는 사실을 깨닫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실내에서.
남자와 단둘이.
방금 전만 해도 아무 생각 없었는데 막상 그 상황을 의식하게 되니 묘한 긴장감이 척추를 내달렸다.
“아, 아무 데나 앉아 계세요.”
소현은 연신 속으로 이 바보 멍청이를 외치면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 주방으로 몸을 피했다.
괜히 뭘 찾는 척,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사이 혁권은 여성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는 실내를 찬찬히 눈으로 구경했다.
크림색 벽지에 깔끔하게 정돈된 실내.
공기 중에 희미하게 떠도는 비누 냄새는 가끔 차 안에서 소현과 밀착해 있을 때 맡을 수 있는 그녀의 체향과도 같았다.
TV 앞에 장식되어 있는 작은 인형들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침대 쪽으로 눈이 돌아간 혁권은 흐트러진 이불과 베개를 보고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당황스러운 낯으로 크흠, 헛기침을 터트렸다.
“기다렸죠.”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소현이 사과를 깎아 내왔다.
집에는 과일과 야채 이외에 음식 종류를 거의 놔두지 않는지라, 갑작스럽게 손님이 찾아와도 딱히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 게 사뭇 아쉬웠다.
“오늘은 아침부터 스케줄이 있다며? 그래서 시간이 이른 줄은 알지만 그 전에 얼굴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
“일어나 있었으니까 괜찮아요.”
소현은 혁권이 가져다준 커피를 빨대로 쭉 빨면서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머리카락을 다 안 말렸는데.’
위쪽은 대충 드라이 했지만 아랫부분은 촉촉한 물기가 남아 있었다.
그게 신경 쓰이는 듯 버릇처럼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말면서 소현은, 혁권을 소파에 앉히고 자신은 책상 의자를 끌고 와 거기에 엉덩이를 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