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16
416
# 시기猜忌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럿.
법원 판결을 직접 보기 위해서 미국으로 날아온 혁권은 투숙한 특급호텔 레스토랑에서 이번 재판을 진행한 스텐저 변호사와 점심 식사를 함께하고 있었다.
백발을 멋들어지게 뒤로 넘긴 소믈리에가 우아한 손짓으로 레드 와인을 유리잔에 채워 주었다.
혁권이 먼저 잔을 들어 향을 음미한 후 한 입 머금어 맛을 보았다.
“어떠십니까?”
“좋군.”
그리 말할 줄 예상했다는 듯 소믈리에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허리를 숙였다.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이만, 하면서 그가 청년처럼 꼿꼿하게 허리를 바로 세운 자세로 물러나자 스텐저 변호사도 손을 뻗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음, 괜찮은데요. 저도 나름대로 와인은 많이 마셔 봤습니다만, 손에 꼽을 정도군요.”
“소믈리에의 실력이 뛰어나니까 말이죠.”
“하하, 하긴 와인을 골라 주는 사람의 센스도 중요하니까요.”
“맞습니다. 제아무리 비싼 와인이라고 해도 음식과 궁합이 맞지 않으면 입맛만 버릴 뿐이지요.”
“그렇지요.”
작게 머리를 끄덕인 스텐저 변호사는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최근 국제 채권시장에서 카다피 정권 때 발행했다가 회수가 안 된 불량 채권 가격이 3배나 뛴 걸 아십니까?”
“호오. 그래요?”
한동안 다른 일이 바빠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던 혁권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법원에서 동결된 카다피 정권의 자금으로 채권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소문이 벌써 시장에 퍼진 거지요. 매수는 많은데 매도자가 없어 벌써 채권 액면가의 80%까지 매수 가격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정상적인 채권 거래 가격에 거의 근접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그렇지요. 덕분에 오렐리우스 매니지먼트 쪽은 앉아서 수십억 달러가 넘는 이득을 올렸습니다.”
액면가의 10%도 안 되는 헐값에 리비아 채권을 사들였으니 가격이 회복되는 만큼 고스란히 다 이익이 되는 거였다.
그 역시 낮은 가격에 채권을 구입해 이득을 본 건 마찬가지였지만, 어쩐지 재주는 자신이 다 부리고 돈은 오렐리우스 매니지먼트가 챙기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스텐저 변호사는 눈치 빠르게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오렐리우스 매니지먼트에서 힘을 써 준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재판 기간이 단축됐으니, 서로한테 이득이 됐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역시 이미 지나간 일에 괜히 미련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어 입에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이면 협약 때문에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는 채권 지급 소송을 걸지 못할 테고 어딜 타깃으로 잡고 있다고 합니까?”
“미국 내 금융기관에 동결되어 있는 카다피 정권의 자금만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상황이니, 소송을 걸 곳은 많지요. 눈치를 보니 시티 은행과 웰스파고 측하고 이미 협상을 시작한 것 같았습니다.”
두 은행 다 미국 내에서 수위를 다투는 금융기업으로 거액의 카다피 정권 자금이 동결되어 있고 지급 요청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곳들이었다.
“상당히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군요.”
“분위기가 만들어졌을 때 쥐고 있는 채권을 전부 정리하려는 속셈이겠지요.”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여러 가지 요건이 맞아떨어져서 별다른 문제없이 채권을 지급받게 됐지만, 상황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상황이 유리할 때 빨리 채권을 처분하는 것이 나았다.
“그 때문에 오렐리우스 매니지먼트사에서 존슨 씨한테 리비아 정부로부터 채권 지급 동의서를 받는 데 도움을 좀 달라는 부탁을 해 왔습니다.”
“그런 일 정도는 그쪽에서도 충분히 알아서 할 수 있을 텐데, 나한테 왜 맡긴다는 겁니까?”
혁권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스텐저 변호사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리비아 정부에 확실한 끈을 가지고 있는 존슨 씨를 통하면 일을 더 빨리 처리할 수 있으니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재판 중간에 끼어들게 해 준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봐도 될 겁니다.”
이번 재판에서 그리 큰 액수는 아니지만 채권에 대한 지급 판정을 받아 낸다면 향후 오렐리우스 매니지먼트가 진행할 소송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얻게 될 이익을 생각하면 이 정도 배려는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돈을 챙겨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는 것 같군요.”
“그럼 승낙하시는 걸로 알고 저쪽에 이야기를 해 놓겠습니다.”
스텐저 변호사의 말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 참. 그리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자산 관리 서비스 말입니다.”
“아, 예.”
“이번에 내 몫으로 떨어지는 돈 가운데 일부를 맡겨 볼까 생각 중이니, 구체적인 운영 자료를 좀 보내 줬으면 좋겠군요.”
스텐저 변호사는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회사에 연락해서 존슨 씨께 딱 맞는 플랜을 짜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하고 있도록 하지요.”
그 뒤로도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를 끝냈다.
스텐저 변호사와 헤어져서 객실로 올라가기 위해 막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혁권은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대면서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자말입니다, 보스.
“모함메드 장관한테 가방은 잘 전해 줬나?”
-예.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문제라니?”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모함메드 장관이 자택에서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저도 현장에 함께 있었습니다.
리비아에서 그의 뒤를 봐주는 든든한 파트너였기에 혁권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괜찮은 거야?”
-격렬한 교전이 있었지만 정부군 병사들이 잘 막아 낸 덕분에 저뿐만 아니라 모함메드 장관도 무사합니다.
“정말 다행이군.”
안도한 표정을 짓던 혁권은 이내 정색을 하며 물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습격을 한 거야?”
-혁명단이 벌인 짓입니다.
“혁명단이라면 설마 자밀 의장을 따르는 무장 세력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런 미친…….”
이야기를 들은 혁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혁명단이라고 하면 그와도 악연이 있는 곳이었는데, 현재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샤라빌 대통령 쪽과 달리 친러시아 성향의 무장 단체였다.
하나의 정부라는 틀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사사건건 대립과 충돌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적정선을 넘지는 않았는데, 백주 대낮에 대놓고 정권 실세이자 샤라빌 대통령의 측근인 모함메드 장관을 습격했다는 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말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트리폴리 상황을 이야기했다.
-자밀 의장을 지지하는 혁명단 병력이 샤라빌 대통령 측 정부군과 시내 곳곳에서 충돌을 벌이면서 정부 업무가 중단되고 트리폴리에 비상령이 내려졌습니다. 대통령 궁에서도 교전이 일어났다는 소문까지 있습니다.
“으음…….”
자말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이건 단순한 주도권 다툼을 넘어서 정부가 둘러 쪼개져 유혈 충돌에 돌입한 거였다.
IS를 비롯한 이슬람 극단 세력을 겨우 밀어내고 오랜 내전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서 두 세력이 맞부딪치는 건 또 다른 혼란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낮게 침음을 흘린 혁권은 부하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붉은색 카펫이 깔린 호텔 복도를 걸어가면서 말했다.
“예전부터 조짐이 있기는 했지만, 갑자기 일을 벌인 이유가 도대체 뭐야?”
-표면적인 이유는 현 정부의 부패와 샤라빌 대통령이 자기 계파만 챙기면서 독단적인 정치를 펼치고 있다는 거지만, 실상은 원유 수출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입니다. 힘을 과시해 최근에 반군한테서 탈환한 내륙 유전 지역에 대한 지분을 요구하는 거지요.
또 석유가 문제였다.
리비아 사람들한테는 검은 황금이라고 불리는 석유가 신이 준 축복인 동시에 온갖 분란과 다툼을 일으키는 끔찍한 재앙이었다.
하킴이 열어 주는 문을 지나 객실로 들어간 혁권은 푹신한 가죽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런 거라면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겠군.”
-아직까지는 샤라빌 대통령의 힘이 큰 데다 당장 연립 정부를 깨고 나와서 자밀 의장한테 득 될 것이 없으니, 그럴 가능성이 크지만 상황이 워낙 유동적이라 어찌 될지 장담하기가 어렵습니다.
리비아 내부의 복잡한 정세를 잘 알고 있었기에 혁권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튼 당분간 트리폴리가 아주 시끄럽겠군.”
혁권은 귀에 댄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말을 이었다.
“일단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돌아가는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일이 발생하면 바로 연락하고.”
-예.
통화를 끝낸 혁권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기습처럼 튀어나온 돌발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자말에게는 일단 상황을 주시하고 있으라 했지만 실제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다.
이번 일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하면서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은 채 혁권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이틀 후 주요 외신들을 통해 혼란스러운 트리폴리 상황이 보도되는 가운데 노스캐롤라이나 주 법원에서 혁권이 낸 소송에 대한 판결이 나왔다.
예상한 대로 은행에 동결되어 있는 카다피 정권의 자금으로 리비아 정부에서 발행한 채권을 전액 상환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미리 약속되어 있는 대로 피고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 측이 상고를 하지 않고 법원의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판결이 확정됐다.
법원에서 만난 혁권과 틸러슨 뱅크 오브 아메리카 부행장은 서로 웃는 얼굴로 악수를 나눴다.
“재판이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끝나서 다행입니다.”
미소를 지은 채 혁권이 말을 꺼내자 틸러슨 부행장 역시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급을 요구한 채권은 내일 중으로 전부 다 결제가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본 틸러슨 부행장이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지난번에 약속하신 걸 확실히 지켜 줄 거라 믿습니다.”
그러자 혁권이 틸러슨 부행장과 시선을 맞추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똑같은 일로 뱅크 오브 아메리카 은행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믿도록 하지요.”
뱅크 오브 아메리카 은행 경영진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걸 과연 순순히 묻어 둘지 의심스러웠지만,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틸러슨 부행장은 끈덕지게 늘어지지 않고 말을 아꼈다.
“그럼 다음에는 조금 더 좋은 일로 볼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합니다.”
몸을 돌린 틸러슨 부행장이 일행과 함께 법원 건물 밖으로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마구 터트리면서 인터뷰를 하러 몰려들었다.
10억 달러가 넘는 거액의 소송인 데다 카다피 정권의 동결 자금이라는 자극적인 요소가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기에, 판결 전부터 언론에서 관심을 가지고 취재를 벌였다.
“보스, 후문 쪽에 차를 대기시켜 놨습니다.”
기자들한테 둘러싸여 인터뷰를 하는 틸러스 부행장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혁권은 하킴의 말에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후문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