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15
415
행사가 진행될 홀로 가고 있을 때 옆에서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정 실장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소현 씨, 저것 좀 봐.”
무심코 고개를 돌린 소현은 정 실장이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에 있는 화환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화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아주 화려하게 장식된 화환에는 ‘정소현 파이팅!’, ‘드라마 대박 나세요.’라는 글귀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소현의 화보 사진을 프린트한 배너 입간판까지 세워져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나도 보고 깜짝 놀랐는데 아무래도 선물을 보내 준 팬클럽에서 준비한 것 같아.”
“아…….”
낮게 탄성을 흘린 소현은 그녀의 기를 제대로 살려 주는 혁권의 선물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런 것까지 갖다 놓다니 팬클럽에서 소현 씨를 정말 세심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러게요.”
“앞으로 연예계 생활을 하는 데 든든한 지원군이 될 수 있으니까. 나중에 팬클럽 운영진을 찾아내 만나 봐야 되겠어.”
혁권을 생각하면서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던 소현은 정 실장의 이야기에 내심 크게 당황했다.
“연락처도 없는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거야 수소문을 해 봐야지. 안 그래도 드라마가 잘되는 걸 보고 팬클럽을 모아 볼까 하고 있었는데, 계획을 조금 앞당긴다고 생각하지, 뭐.”
그녀는 애써 속마음을 숨기면서 말했다.
“이제 드라마 첫 데뷔인데 너무 빠르지 않아요?”
“그냥 가볍게 접촉해 보는 건데, 뭘. 그리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는 팬들이 있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잖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기에 소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다가 혁권의 존재가 들통나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이 무슨 톱스타도 아니고 남자를 사귀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성인인데, 연예를 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노심초사해야 될 일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서운해할 팬도 아직 그리 많지 않은 데다 정 실장 역시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애인이 있다고 하면 앞으로 연예계 생활을 하며 인기를 모으는 데 조금 불편함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일부러 드러낼 생각은 없었지만 정 실장과 주변에서 알게 되면 부정하지 않고 혁권을 만날 생각이었다.
마음을 편하게 먹자 소현의 얼굴이 다시 평온해졌다.
홀 안으로 들어간 소현은 이제 제법 친분이 생긴 출연 배우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사회자의 소개말에 따라 무대로 올라갔다.
“자! 새로 시작하는 DBC 주말 연속극 스타일 출연진들을 소개합니다!”
짝짝짝!
초대된 기자와 관계자 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무대에 선 소현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신인 연기자로 첫선을 보였다.
성황리에 드라마 제작 발표회가 끝나고 올림픽파도 어느 정도 정리되자 혁권은 잠시 미루어 뒀던 일을 실행했다.
바로 새로 부모님 집에서 나가 독립을 하는 거였다.
말은 거창하지만 막상 짐을 챙겨 보니 캐리어 하나 분량밖에 안 되는지라 그냥 외출 나가듯 몸만 움직이면 되었다.
“그것 가지고 되겠니?”
캐리어를 질질 끌고 방에서 나오자 현관에서 배웅하려고 기다리던 어머니가 미간을 좁혔다.
“어차피 필요한 건 거기 다 있는 데요, 뭘.”
“그래도…….”
“가구뿐만 아니고 당장 써야 될 생필품도 다 사 놓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옷은 지금 계절에 입을 것 몇 개만 챙겼고 스마트폰이나 충전기, 노트북같이 매일 사용하는 것만 가져가면 되었다.
“먹을 건? 다른 건 몰라도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을 텐데.”
“오늘 하루는 시켜서 먹을 생각이에요. 그리고 나머지는 천천히 채워 가면 되죠.”
“전에도 말했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하렴. 어차피 네 아버지랑 둘이서만 먹으면 반찬 같은 건 항상 남으니까.”
“예.”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언제까지고 문 앞에 서서 걱정 섞인 잔소리를 끝도 없이 계속할 기세라 혁권은 서둘러 움직였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가는 건 아쉽지만, 어차피 멀리 이사하는 것도 아니고 어제저녁에 인사를 다 끝냈으니 나중에라도 다시 찾아뵈면 될 일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자 기다리던 하킴이 얼른 그가 잡고 있던 캐리어 손잡이를 건네받았다.
“알아바디하고 라미는?”
낮은 목소리로 묻자 하킴이 눈짓으로 맞은편 주차 구역에 세워져 있는 승용차 한 대를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대기 중입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승용차를 확인한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힘들더라도 당분간만 참으라고 해.”
“예.”
위협이 되던 올림픽파를 박살 냈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몰랐기에 혁권은 당분간 부하들을 시켜 부모님을 몰래 지켜 드리도록 했다.
마찬가지로 소현한테도 이번에 새로 받아들인 임영식과 지병하를 붙여 뒀다.
뒷좌석에 혁권을 태운 벤츠 승용차는 엔진 소리를 내면서 부드럽게 출발해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에 진동이 왔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혁권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대고는 영어로 말했다.
“스텐저 씨가 이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모든 공판Trial이 다 끝나고 마지막 선고 일이 확정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기에 혁권은 시트에서 몸을 살짝 떼며 말했다.
“언제입니까?”
-일주일 뒤인 이번 달 29일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원래 성급하게 말을 잘하지 않지만 원하시는 대로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신중한 성격의 스텐저 변호사가 이 정도로 확신을 가진다면 승소할 확률이 90% 이상이라는 뜻이었기에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 측 하고 상고를 하지 않고 1심에서 재판을 끝내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기에 판결이 나오면 그걸로 리비아 채권 회수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렇군요. 수고하셨습니다.”
-감사 인사는 판결이 확정되면 듣도록 하지요.
이미 결과가 정해졌다고 믿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법정에 오실 겁니까? 오셔서 눈으로 보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요.
“중요한 날인데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도착하시면 연락 주십시오. 제일 앞좌석으로 자리를 마련해 놓도록 하지요.
“그럼 나중에 미국에서 보도록 합시다.”
스텐저 변호사와의 통화를 끝낸 혁권은 흡족한 얼굴로 스마트폰의 액정을 껐다.
재판이 마무리되면 큰돈이 손아귀에 들어오니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이스라 모함메드 장관의 저택은 막강한 권력과 금전金錢이 오가는 석유부 수장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웅장하고 화려했다.
사막 기후에서 보기 힘든 푸른 잔디가 깔린 정원과 뒤편에는 물이 가득 채워진 수영장이 있었다.
그리고 실내에는 멋들어진 조각상과 그림 등 온갖 예술품들이 저택을 장식하고 있었다.
건물에서 한참 떨어진 정문에는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병사 두 명이 눈을 번득이며 저택을 지켰다.
리비아 정규군 병사들을 저택 경비로 쓰는 것만 봐도 모함메드 장관의 위세가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었다.
모함메드 장관을 태운 벤츠 G클래스 AMG이 앞뒤로 경호 차량의 호위를 받으면서 정문으로 다가가자 병사들이 황급히 철문을 양쪽 열고는 경례를 붙였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벤츠 G클래스 AMG는 정원 옆에 나 있는 아스팔트길로 저택 현관 앞에 멈추어 섰다.
짙은 색 선글라스를 쓴 모람메드 장관이 차문을 열고 내리자 미리 연락을 받고 나와 있던 제이드 집사가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주인님.”
“나가 있는 동안 별일 없었지.”
“예. 그리고 미스터 존슨이 보낸 손님이 한 분 와 계십니다.”
존슨은 혁권이 사업을 할 때 쓰는 여러 개의 가명 중에 하나였다.
“지금 어디 있지?”
“응접실에 모셨습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모함메드 장관은 활짝 열린 현관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값비싼 이탈리아 산 대리석이 깔린 바닥은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반질거리며 윤이 났다.
저택 로비를 지나 응접실로 들어가자 가죽 소파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던 사내 한 명이 그를 발견하곤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로 혁권의 최측근인 자말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혁권과 함께 몇 번 본 기억이 있었기에 모함메드 장관은 가볍게 인사를 받고는 상석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앉게.”
“감사합니다.”
하인 한 명이 은쟁반에 시원한 음료를 가져와 탁자에 내려놓고 물러났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유리컵을 들어 음료를 한 모금 마신 모함메드 장관이 몸을 등받이에 기대면서 입을 열었다.
“어제도 날 만나러 왔었다고?”
“그렇습니다.”
“와파 지역에 있는 유전들을 시찰하고 오느라 잠시 트리폴리를 비웠었네.”
“집사님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리 장관님 일정을 알지 못하고 온 제 잘못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건가?”
자말이 밑에 내려놨던 은색 알루미늄 가방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으면서 대답했다.
“보스께서 전해 드리라고 하신 물건입니다.”
잠금장치를 풀고 자말이 가방을 열어 모함메드 장관 쪽으로 돌리자 고액권 달러 뭉치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리비아에서 사업을 도와주시고 계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달러 뭉치를 본 모함메드 장관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내가 이래서 존슨을 좋아한다니까. 잘 쓰겠다고 전해 주게.”
“알겠습니다.”
가방을 들어서 자신의 발아래에 내려놓은 모함메드 장관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얼굴로 말했다.
“존슨은 많이 바쁜 모양이지.”
“네. 직접 오시려고 했는데, 일이 많으셔서 절 대신 보내셨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니 바쁜 것이 좋지. 참. 미국에서 일이 잘 마무리되어 간다고 하던데…….”
모함메드 장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지금 미국에 가 계십니다. 1심 판결이 나오고 묶여 있던 자금이 풀리면 바로 약속된 금액이 스위스 계좌로 입금될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해결하려고 해도 풀리지 않던 난제難題를 이처럼 쉽게 처리하다니 역시 능력이 대단해.”
카다피 정권에서 발행한 채권 회수를 도와주는 대신 거액의 커미션을 받기로 했기에 모함메드 장관은 얼굴 가득 탐욕에 찬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갑자기 바깥쪽에서 요란한 폭음이 터졌다.
꽈아아앙!
소스라치게 놀란 무하메드 장관이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고 자말 역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서너 번의 폭음이 연달아 계속 울렸고 그 사이로 비명도 섞여서 들려왔다.
“이게 무슨…….”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제이드가 다급한 얼굴로 다가왔다.
“주인님, 습격입니다!”
“뭣이!”
눈을 부릅뜬 모하메드 장관이 분노에 찬 얼굴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대체 어떤 놈들이야!”
“그건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저택 경비들이 막고 있으니 이대로 계십시오.”
타타탕! 탕! 탕!
모하메드 장관은 석고처럼 굳어진 얼굴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요란하게 들리는 총성에 자말은 응접실로 들어오면서 권총을 맡겨 놔 자신이 빈손이라는 걸 떠올리곤 미간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