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34
434
“경호를 좀 더 강화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던 혁권은 이내 리비아에서만 벌써 두 번이나 저격을 당할 뻔한 걸 떠올리고는 그냥 내버려 뒀다.
“알아서 하도록 해.”
그때 탁자에 올려 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혁권이 함단을 보며 말했다.
“더 보고할 것이 없으면 그만 나가 봐.”
“예.”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한 함단이 소파에서 일어나자 그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나야. 최필성.
“목소리가 밝은 걸 보니 좋은 소식이 있나 봅니다.”
-하여튼 눈치는 빠르다니까. 맞아. 윗선에서 계약을 해도 좋다고 결재가 떨어졌어.
상대편에서 이면계약까지 요구했던 만큼 무난하게 계약이 이루어질 거라 예상했던 혁권은 비교적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잘됐군요.”
-뭐야? 엄청나게 큰 계약을 하게 됐는데 반응이 왜 이렇게 뜨뜻미지근해?
“아직 제 주머니에 돈이 들어온 건 아니니까요.”
-하긴 아직 계약이 다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설레발을 치는 것도 조금 그러네.
“그렇기는 해도 일이 잘 진행될 수 있었던 건 다 선배님이 애써 주신 덕분입니다.”
-말로만 그러고 입 닦는 건 아니겠지?
“제가 설마 그러겠습니까.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벌써부터 궁금해지는데.
조금 속물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지만 앞에서만 점잔을 빼고 뒤로 커미션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편했다.
피식 웃은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럼 계약은 지난번에 이야기한 대로 직접 여기로 와서 쓸 겁니까?”
-안 그래도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내일 본사 전무님하고 비행기를 타고 아테네로 날아갈 예정이야.
“전무가 직접 온다는 겁니까?”
-아무래도 계약 금액이 크니까 임원급이 나서는 거지.
“그렇군요.”
액수도 크지만 따로 이야기한 이면 계약 때문에 전무가 오는 걸 그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럼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겠군요. 그땐 술이나 한잔하죠.”
-하하, 그럴까.
인사치례처럼 이야기를 나눈 혁권은 잠시 뒤 통화를 끝내고 스마트폰을 내려놨다.
이틀 뒤 새벽 일찍 깨어나 있던 혁권은 라스라누프에서 걸려 온 자말의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됐어?”
-무사히 정박해서 지금 파이프를 통해 원유를 실고 있는 중입니다.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은지 자말의 목소리가 활기에 차 있었다.
원유를 만재滿載하고 항구를 벗어날 때까지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렀지만, 일단 시작이 좋다는 것에 혁권은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가지고 간 화물은 잘 전달했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아부카 여단을 지원해 주고 원유를 넘겨받는 걸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컨테이너 4대 분량의 탄약과 각종 보급품을 유조선에 실어서 보냈었다.
-생각지도 않은 선물에 후세인 대령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상대로 보급 사정이 그리 여의치 않은지 지원을 해 주면 원유 운송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뜻을 슬쩍 내비쳤습니다.
자말의 말에 그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원유만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지. 후세인 대령한테 뭐가 필요한지 물어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아부카 여단을 지원해 주려면 작지 않은 돈이 들어가겠지만, 원유를 팔아서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현재 트리폴리 정부와 떨어져서 라스라누프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후세인 대령과 잘 이야기한다면, 물량을 몰래 잘 조절해서 더 큰 이득을 가져갈 수도 있었다.
“작업이 다 끝날 때까지 긴장 풀지 말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해.”
-예. 그러겠습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았지만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
테라스 난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혁권은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총알 모양 그대로 구멍이 뚫린 상태였지만 그래도 따로 새것을 살 마음은 안 들었다.
한 번은 목숨을 구해 준 물건이기도 했으니 행운의 상징과도 같은 의미로 그냥 가지고 다니기로 했다.
그는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어슴푸레하니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현에게는 절대 이 꼴을 보이면 안 되겠군.’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이렇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 추궁해 오면 설명하기 매우 곤란하다.
혁권은 맑은 새벽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면서 소현을 생각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바른 어린이 같은 생활을 하는 소현이니 지금쯤 꿈나라를 헤매고 있으려나.
기왕이면 좋은 꿈을 꾸길 바라며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간 혁권은 소파에 앉아 자말한테서 다시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원유 선적이 순조롭게 끝나자 혁권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 아침에 도착한 DK 정유 인사들을 만나러 아테네 시내로 나갔다.
피로가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호텔을 나온 류부영 전무는 함께 온 직원들과 함께 렌트한 차량에 올라탔다.
자리가 불편한지 살짝 몸을 뒤척거린 류부영 전무는 옆에 타고 있던 최필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거래하기로 한 회사 이름이 뭐라고 했지?”
“솔 루시두스입니다.”
“그래. 이제 기억이 나는군. 지난번 거래도 자네가 만들어 왔다고 들었는데, 맞나?”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던 최필성은 이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처음 그쪽하고 어떻게 연결이 된 건가?”
대학교 선후배 사이라도 하면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기에 최필성은 적당히 둘러댔다.
“기존에 거래를 하던 원유 브로커Broker를 통해 우연히 소개를 받았습니다. 국제 시세보다 저렴한 데다 대금 지급도 원유를 다 인도받은 후에 하는 조건이라서 손해 볼 것이 없다는 판단에 첫 거래를 트게 됐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괜찮은 조건이었기에 류부영 전무는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난 이번 거래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업체인데, 원래 원유를 취급하던 곳이야?”
“그건 아니고 리비아 쪽에 줄이 닿아 거기서 나오는 물량을 대거 확보하게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리비아라…… 거긴 지금 한참 내전 중인 곳이잖아.”
“맞습니다.”
류부영 전무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우려를 나타냈다.
“이거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거 아냐?”
“국제사회에서 유일하게 인정한 트리폴리 정부의 승인을 받아 반출하는 것이고, 선금도 유조선에 원유를 실어서 출발하면 지급하는 걸로 계약서에 기재되어 있으니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흐음.”
조금 찝찝하기는 했지만 저렴하게 원유를 매입하기 위해서는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는 데다 나름 안전조치를 취해 놨기에 그냥 넘어갔다.
그러는 사이 일행을 태운 승용차는 시내에 위치한 솔 루시두스 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원래는 이름만 걸어 둔 페이퍼 컴퍼니였지만, 의류 공장이 제법 자리를 잡고 다른 부수적인 업무들이 많아지자, 얼마 전부터 사무실을 빌려 운영하고 있었다.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아테네 중심가 빌딩에 번듯한 사무실이 있는 걸 본 류부영 전무는 신뢰감이 조금은 높아졌다.
이마를 드러내고 히잡Hijab으로 머리카락만 살짝 가린 여직원이 류부영 전무 일행을 안내한 곳은, 한쪽 벽이 통유리로 만들어져 바깥 풍경을 훤히 보이는 회의실이었다.
화려하거나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불필요한 장식품 없이 필요한 것만 갖춰 놔 아주 깔끔한 느낌이었다.
회의실 안에는 혁권이 함단과 이번 계약을 위해서 고용한 변호사와 함께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급 맞춤 정장에 명품 넥타이를 맨 혁권은 웃는 얼굴로 먼저 다가가서 류부영 전무 일행을 반겼다.
“이렇게 만나 반갑습니다. 솔 루시두스 대표인 김혁권입니다.”
당연히 외국인일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던 류부영 전무는 교포도 아니고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인 혁권이 대표라고 하자, 약간 얼떨떨한 얼굴로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나눴다.
“흠흠. 류부영입니다.”
잠시 양측은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최필성하고도 악수를 했지만 의도적으로 사적인 친분 관계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최 과장님은 오랜만이군요. 이렇게 또다시 거래를 하게 되다니 저희가 인연이 있나 봅니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능청스러운 혁권의 행동에 최필성은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 어색하지 않게 장단을 맞춰 줬다.
긴 회의용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양측이 마주 앉자, 그는 길게 시간을 끌 생각이 없다는 듯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보내 주신 계약서를 검토해 보니 몇 가지 사소한 부분을 빼고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더군요.”
그러자 류부영 전무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맞은편에 있는 혁권을 바라봤다.
“어떤 부분이 걸리시는지 말씀해 보시죠.”
“계약된 날짜에 원유를 내리지 못하면 하루에 10만 달러의 지체 보상금을 낸다고 되어 있는데, 이건 저희 쪽에 너무 불리한 조항 같군요.”
“정유 공장의 특성상 한순간이라도 공정을 멈추게 되면 그 피해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원료를 원활하게 수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이런 조항이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납기일을 어기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에 그는 머리를 좌우로 내저으면서 말했다.
“물론 납기일을 맞추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저희가 문제라고 하는 건 여기 적힌 문구입니다.”
DK 정유에서 보내 준 계약서 초안을 꺼낸 혁권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류부영 전무를 보며 계속 설명을 이어 갔다.
“이 문구대로라면 제때 유조선이 도착해 있어도 DK 정유의 사정으로 인해서 원유를 내리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저희가 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듣고 보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 달라는 겁니까?”
“원유를 내리는 것 대신 목적지에 유조선이 도착하는 걸로 바꿔 주시면 됩니다.”
손바닥으로 입을 살짝 가린 채 함께 온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눈 류부영 전무는 이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바꾸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나머지 변경했으면 하는 부분을 정리한 겁니다.”
준비해 놓은 서류를 한 장 내밀자 류부영 전무는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받아 들었다.
꽤 많은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대부분 앞서 거론했던 것처럼 불리하게 적용될 수도 있는 문구를 바꾸는 거였다.
“보기와 달리 상당히 꼼꼼한 성격인가 보군요.”
약간 비아냥거리듯 류부영 전무가 말하자 혁권은 웃으며 받아넘겼다.
“사소한 부분에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 미리 확실히 해 두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딱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류부영 전무도 더 이상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고 서류를 변호사와 최필성한테 줘서 살펴보도록 했다.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기에 약간의 조율을 거친 뒤 바로 그 자리에서 계약서 내용을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