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48
448
“숫자가 얼마나 되지?”
-그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적지 않은 인원일 걸로 생각됩니다.
함단의 추측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동의했다.
화물선이 세 척이나 움직이는 데다 무엇보다 밀리고 있는 전황을 역전시키려면 용병을 한두 명 보낸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변수의 등장에 혁권은 짧게 혀를 찼다.
“미국과 유럽 쪽에서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어?”
-아직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이미 세바스토폴 항구를 떠났다면 리비아까지는 금방일 텐데 아무런 조짐이 없다는 건 그냥 방관하기로 한 걸 수도 있겠군.”
-아무래도 시리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동부 지중해에 자리를 잡고 있는 러시아 함대를 의식하는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러시아의 자랑인 항공모함 쿠즈네초프Admiral Kuznetsov와 여러 지원 함정으로 구성된 함대가 시리아 영해에서 머물며 미사일과 함재기를 이용해서 아사드 정권을 지원해 주고 있는 걸 떠올린 혁권은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물론 웬만한 중소 국가의 해군력과 공군력을 동시에 압도하는 미국의 항공모함 전단에 비교하면 상대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채 30분도 견디지 못하고 러시아 기동함대는 전부 차가운 바닷물 아래로 수장水葬되어 버릴 것이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상대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건, 자칫 양쪽 함대 사이에 충돌이 벌어질 경우 세계 3차 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시리아만으로도 벅찬 상황인데 리비아라는 또 하나의 짐 덩어리를 짊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미국 정부의 태도도 영향을 미쳤다.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면서 생각을 정리한 혁권은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일단은 화물을 차질 없이 운송하는 데 신경을 집중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뒤에도 혁권은 좀처럼 굳어 있는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만큼 러시아의 본격적인 개입은 가뜩이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 리비아 상황을 더욱 혼돈의 구렁텅이로 깊숙이 빠져들게 만들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잘못하면 제2의 시리아가 될 수도 있겠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우우우웅.
메시지가 도착한 걸 알리는 진동소리에 혁권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제 촬영 끝났으니까 조금 있다가 봐요. ♡
“참. 오늘 함께 드라마를 보기로 했지.”
함단하고 통화를 하느라 깜빡 잊고 있던 소현과의 약속을 떠올린 혁권은 얼른 앉아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음, 이만하면 됐겠지.”
거실 한복판에 선 혁권이 집 안을 크게 휙 둘러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어제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셔서 깔끔하게 청소를 해 주고 가시긴 했지만, 그래도 소현을 집으로 초대하는 날이니만큼 다시 한 번 청소기를 돌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하고 나서야 직성이 풀렸다.
적당히 쾌적할 정도로 집 안의 온도를 맞춰 놓고 슬슬 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서 시계를 확인하는 순간 인터폰이 울렸다.
-저 왔어요!
화면으로 문 앞을 확인하자 소현이 카메라가 있을 위치에 손을 붕붕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얼른 열어 달라고 재촉하는 목소리에 혁권이 버튼을 눌러 잠금장치를 풀었다.
“실례합니다.”
다른 가족이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습관인 듯 고개를 숙여 인사한 소현이 혁권을 보고 방긋 웃었다.
“짜잔. 이게 뭘까요?”
소현이 한 손에 들고 있던 비닐 봉투를 눈앞에 들이밀며 물었다.
“술이야? 와인이라면 집에도 몇 개 있는데…….”
“뭘 모르는 소리 하시네. 집에서 드라마 볼 땐 편의점 캔 맥주가 최고라고요.”
“그럼 안주는?”
“오빠한테 맡길게요. 설마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아니면 배달을 시켜도 되고, 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린 소현이 실내화로 갈아 신고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촬영장에서 바로 온 거야?”
소현은 화장을 안 하고 다녀도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평소엔 눈썹이랑 입술만 그리는 식으로 연하게 꾸미고 다니는 편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얼굴이 반짝반짝했다.
“네. 집에 들렀다 오려니까 시간이 안 맞을 것 같더라고요.”
“잘 어울려. 예쁘다.”
“헤헤, 고마워요.”
일부러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화장도 안 지우고 그대로 온 보람이 있었다.
물론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전문가의 손길을 받아서 화려하게 변신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반응이 생각했던 대로라 소현은 한껏 흥겨워하며 거실 중앙에 섰다.
“와, 거실이 너무 넓다.”
분명히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탁 트인 듯한 공간에 와 있는 느낌에 소현이 양팔을 벌리고 감탄했다.
“저번에도 와 봤잖아.”
“그래도 영 적응이 안 된다고요.”
소현이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저 그날 밤 집에 가서 불면증 걸릴 뻔한 거 알아요. 지금 사는 집이 좁다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누웠더니 천장이 너무 낮아 보여서 갑갑한 거 있죠.”
“흐음, 그런 부작용이 있었다니.”
혁권은 냉장고 문을 열어 대충 먹을 만한 게 있나 찾았다.
햇반이나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되는 즉석식품 정도야 기본으로 갖추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소현에게 그런 걸 먹일 수는 없었다.
“뭐 하고 있어요?”
“안주로 뭘 만들면 좋을까 고민 중이야.”
그러자 소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와. 직접 만들어 주게요!”
“맛은 보장 못 해.”
“전 뭐든지 잘 먹으니까 걱정 말아요.”
혁권이 가스레인지를 켜서 프라이팬을 달구는 동안 소현은 의자를 당겨 와 그가 하는 행동을 구경했다.
“8시에 시작하지? 그럼 손이 많이 안 가는 걸로 간단하게 해 볼까.”
“내가 도와줘도 되는데…….”
“손님을 부려 먹을 수야 있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사양한 혁권은 냉동실에서 꺼낸 튀김용 감자와 베이컨, 치즈 등을 준비하고 바로 요리에 들어갔다.
넉넉하게 식용유를 부은 프라이팬에 감자를 넣어 노릇노릇하게 튀기고, 기름을 뺀 다음 위에 치즈와 베이컨을 올려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손쉽게 완성이었다.
오븐을 이용해도 됐겠지만 기왕이면 바삭하게 구운 식감이 좋아 일부러 프라이팬을 사용했다.
“원래 이렇게 요리를 잘했어요?”
살짝 감자튀김을 집어 한입 먹어 본 소현이 바깥에서 파는 것보다 더 맛있는 것 같다며 감탄했다.
“뭐, 술을 마실 일이 잦으니까 안주 정도는.”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능숙한데…….”
설마 여자인 자기보다 더 잘하는 거 아니냐며 소현이 슬쩍 눈을 흘겼다.
“이거 거실 탁자에 옮겨 놓을게요.”
“응.”
힐끔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니 벌써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먼저 소파에 앉은 소현이 리모컨으로 대형 LED TV의 전원을 켜니 마침 바로 앞의 프로그램이 끝나고 한창 광고가 흘러나오는 참이었다.
혁권은 새 접시를 꺼내 얇게 썬 사과와 큐브 치즈를 세팅한 다음 소현이 사 들고 온 캔맥주를 들고 옆에 나란히 앉았다.
“이건 소현이 몫이야.”
모처럼 기분을 내는 날이라곤 하지만 아직 촬영이 한창인데 감자튀김같이 높은 칼로리의 음식을 먹었다간 내일 아침에 얼굴이 부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물론 소현이 알아서 조절하겠지만, 그래도 함께 있을 때는 마음 편하게 있었으면 해서 일부러 안주도 가벼운 것으로 따로 준비했다.
설마 혁권이 그런 배려를 해 줄지 몰랐던 소현은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면서 접시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자, 그럼 드라마 감상을 해 볼까.”
“아, 긴장돼.”
다리를 쭉 뻗고 한껏 감상할 포즈를 취한 혁권과 달리 소현은 소파 위에 몸을 동그랗게 만 상태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 완전 이상하게 나왔을지도 몰라요.”
“괜찮아. 예쁘게 찍혔을 거야.”
“그래도. 원래 TV 카메라로 찍으면 엄청 부해 보인다던데…….”
사진 촬영에는 이골이 났을 텐데 방송용 카메라는 또 다른 건지 소현은 엄청 긴장한 모습이었다.
“원래 사람들은 주인공만 보지 조연에까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
“……그거 위로라고 하는 말이에요?”
소현이 찌릿 노려보자 혁권이 웃으면서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첫 회 시청률이 대박 나기를 빌자고. 자, 건배.”
여전히 삐죽거리는 표정이긴 했으나 소현도 손을 뻗어 캔 맥주를 툭 부딪쳤다.
마침내 드라마가 시작되자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TV 화면에 집중했다.
특히 소현은 화면에 제 얼굴이 나올 때마다 숨을 멈추고 있는 바람에 간간이 혁권이 손등을 톡톡 쳐서 주의를 줘야만 할 정도였다.
그렇게 기념할 만한 첫 방송이 끝나고, 클로즈업된 여주인공의 얼굴 위로 스태프롤이 흐르면서 주제가가 나오자 소현이 지쳤다는 듯 몸을 늘어뜨렸다.
“하아, 힘들어.”
고작해야 앉아서 드라마를 본 것뿐인데 운동장을 몇 바퀴는 뛴 것처럼 온몸에 맥이 다 풀렸다.
“생각보다 꽤 재밌던데.”
평소에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혁권도 나름대로 괜찮았다며 칭찬했다.
“응, 저도 신기했어요. 대본을 봐서 스토리는 다 아는데, 영상으로 보니까 또 다른 거 있죠.”
“편집이랑 음악의 힘이 크지.”
“역시 주연 배우는 다른가 봐요. 카메라로 딱 비추니까 화면이 꽉 찬 느낌이 들던 걸요.”
“소현이 연기도 좋았어.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해 봐도 어색하지 않게 잘하던걸.”
특히 그동안 연기를 배우면서 발성에 신경을 쓴 보람이 있는지 대사가 씹히지 않고 잘 들렸다.
보통 일반인이 카메라 앞에 서면 말을 우물거리거나 발음이 명확하지 않은 경향이 있는데 소현은 그런 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아윽, 너무 칭찬하지 말아요.”
쿠션을 끌어안은 소현이 소파를 뒹굴며 괴로워했다.
“그렇게 부끄러워?”
“죽을 만큼요.”
쥐구멍이 있으면 파고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TV 화면에 제 얼굴이 비칠 때마다 머리를 박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었는데, 혁권은 또 낯간지럽게 칭찬을 해 주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분명히 촬영 들어가기 전에 완벽하게 세팅한 머린데 어째서 이마에 머리카락 한 가닥이 보기 싫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며, 카메라 감독님과 PD님은 그 꼴을 보고서도 왜 컷을 외치지 않은 것인가.
게다가 흔들리는 동공하며 자연스럽지 못한 시선 처리가 눈에 띌 때마다 그냥 TV 액정을 깨부숴 버리고 싶었다.
그런 소현의 모습에 혁권은 웃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첫 작품이잖아. 그런데 오랫동안 연기를 해 온 베테랑들처럼 하려는 건 욕심이지 않겠어.”
“하지만…….”
“너무 욕심내지 마. 그럼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야. 지금부터 차근차근 노력하다 보면 머지않아 소현이가 작품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사슴처럼 크고 예쁜 눈으로 바라보면서 묻자 혁권은 그녀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
“당연하지.”
“아이, 참. 내가 무슨 어린앤가. 왜 자꾸 머리를 쓰다듬어요.”
“소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러지.”
“그런 게 어디 있어.”
툴툴거리면서도 그의 손길이 싫지는 않은지 소현은 입술만 삐죽이며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문득 손주아의 일이 떠오른 혁권은 슬쩍 조심스럽게 물었다.
“촬영을 하면서 힘든 일 같은 건 없어?”
잠시 머뭇거리던 소현은 이내 웃으면서 대답했다.
“스태프들도 다 잘해 주고 좋아요.”
“그래? 다행이네.”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간 어두운 기색을 눈치 못 챌 혁권이 아니었지만 일부러 짐짓 모르는 척했다.
본인이 스스로 해결하고 싶다면 그 뜻을 존중해 주는 것이 맞았으니까.
물론 일이 너무 심해지거나, 도움을 청해 온다면 그땐 당연히 진심으로 나설 생각이었다.
“만약 힘든 일이 있으면 고민하지 말고 언제든지 얘기해. 이야기 들어 주는 것만은 잘할 자신 있으니까 말이야.”
“그럴게요.”
머리를 끄덕인 소현은 미소를 지은 채 캔 맥주를 들어 한 모금 마시면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신경도 써 주고, 애인이 있으니까 나쁘지 않네요.”
“당연하지. 나처럼 괜찮은 남자 찾기 어려우니까 옆에 있을 때 꽉 잡는 것이 좋을 거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말이야.”
턱을 살짝 치켜들며 혁권이 말하자 그녀는 못 말린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튼 말은 잘한다니까.”
“정말이라니까 그러네.”
“아. 예. 알았습니다.”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소현이 일어서자 혁권이 어디 가냐고 물었다.
“이제 집에 가야죠. 내일도 새벽부터 촬영이거든요.”
“스케줄이 빡빡한걸.”
“방송도 시작했으니까 더 바빠질 거예요.”
혁권이 미간을 모았다가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
“방금 맥주 마셨잖아요. 밤인데 설마 음주 운전 할 생각은 아니겠죠.”
“아, 그렇지.”
미처 거기까진 생각 못 했다는 듯 혁권이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맥주를 안 마시는 건데 그랬다.
그의 평소 주량에 비하면 맥주 한 캔 정도야 거의 마시지 않은 거나 다름없었지만, 소현의 말대로 음주 운전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아쉽지만 참기로 했다.
“그럼 콜택시라도 불러 줄게.”
“괜찮아요. 아직 시간이 얼마 안 돼서 밖에 나가면 빈 택시가 많을 거예요.”
“그래도 부르면 금방 오니까 그걸 타고 가.”
“알았어요.”
스마트폰을 꺼내 콜택시를 부른 혁권은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