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9
49
자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혁권은 바로 공항 청사를 나와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타고 출발했다.
직접 차를 운전하면서 혁권이 조수석에 앉은 자말을 보며 물었다.
“트리폴리 분위기는 어때?”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는 ADDI가 트리폴리로 가는 물자를 모두 차단하고 국경을 봉쇄해 버리는 바람에 물가가 순식간에 몇 배나 폭등해 버렸습니다.”
혁권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바닷길이 기뢰로 막힌 상태에서 그나마 숨통을 틔워 주던 육로까지 끊겨 버렸다면 트리폴리는 말 그대로 사방이 다 막힌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처지가 되는 거였다.
“리비아 정부에서 그걸 그냥 보고만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바로 강력하게 비난을 하며 당장 국경 봉쇄를 풀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문제는 ADDI가 콧방귀도 안 뀐다는 거지요.”
잠시 말을 멈춘 자말은 정색을 한 채 이야기를 이었다.
“그 때문에 트리폴리에서는 리비아 정부군과 ADDI가 곧 전면전을 벌일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설마 전쟁을 한다고?”
깜짝 놀란 혁권이 되물었다.
“예. 실제로 이리 오면서 접경 지역에 양측 병력이 집결해 긴장 상태로 대치하고 있는 걸 목격했습니다.”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군.”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까지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던 리비아 정부로서는 이례적으로 강경하게 맞대응하는 거였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취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사방이 고립된 상태에서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물가가 폭등하고 주민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한다면 정부 자체가 붕괴되어 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ADDI와 싸움을 벌여 돌파구를 찾고 주민들의 분노를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정부군과 ADDI가 정면충돌한다면 사실상 여러 개로 갈라진 채 각자 독립된 세력권을 유지하며 나름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던 리비아 내전이 다시 큰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 가능성이 아주 컸다.
내전이 격화될수록 그에게는 이득이 되겠지만 전화에 휩쓸려 고통받게 될 리비아 국민들을 생각하니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 묵묵히 운전만 하던 혁권은 이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이야기를 했다.
“둘 중 누가 이길 것 같아?”
“글쎄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생각을 해 보던 자말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방 국가들의 지원이 없다면 단기전에서는 정부군이 우세할 수 있어도 전투가 길어질 경우 보급선이 확보된 ADDI가 승리할 가능성이 큽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인 그는 약간 굳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트리폴리에 연락해서 돌아가는 양측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일이 생기면 즉시 보고하라고 해.”
“옛.”
자말의 대답을 들으며 혁권은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생각했다.
자연스레 말이 없어진 가운데, 자말도 그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창밖에 흐르는 경치에 눈을 돌렸다.
호텔로 돌아온 혁권은 안내 데스크에 남겨진 쪽지를 확인하고는 카이로 지사로 전화를 걸었다.
-네. 태일물산 카이로 지사입니다.
배동주가 전화를 받자 그는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배동주 씨, 나 김혁권이야.”
-김 대리님.
“과장님 계시지?”
-예.
“좀 바꿔 주겠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김윤구 과장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나타났다.
-어딜 돌아다니기에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첫마디부터 시비조로 나오자 혁권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맞상대를 해 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대충 말을 둘러댔다.
“바이어를 만나고 왔습니다.”
-그래서, 성과가 좀 있었나? 벌써 출장을 간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간다는 건 알고 있겠지.
마치 네깟 놈이 무슨 성과를 내겠냐며 김윤구 과장이 비아냥거리자 혁권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다.
“계약이 다 잘 끝났습니다. 내일 중으로 사본을 보내 드릴 테니까 밀가루와 휘발유를 각 3만 톤씩 기한 안에 확보해 주십시오.”
-뭐, 뭐라고?
김윤구 과장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왜요, 못 들으셨습니까? 다시 말해 드릴까요?”
-아, 아닐세.
혁권은 다리를 쭉 뻗어 테이블에 올린 자세로 허리를 폈다.
“기한 내에 물품을 다 준비하지 못하면 계약이 취소될 뿐만 아니라 위약금까지 물어내는 조건입니다. 그러니 진행하는 데 실수 없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떨떠름했다.
지금쯤 사정없이 구겨져 있을 그의 얼굴을 상상하며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린 혁권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세부적으로 조율해야 할 것이 몇 개 더 있어서 아무래도 며칠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말인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끄응.
사후통보에 가까운 애매모호한 대답을 들은 김윤구 과장의 입에서 못마땅한 신음성이 뒤따랐다.
-그래. 알았네.
마지못해 허락하는 기색이 가득 담긴 어투였다.
“그럼 끊겠습니다.”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수화기를 내려 전화를 끊은 혁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를 폄하하던 김윤구 과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지.”
혁권의 입에서 나온 것 치고는 드물게 냉소가 가득한 말이었다.
계속 한국말로만 전화를 한 덕분에 대화 내용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냥 얌전히 앉아 있던 자말이 움찔 반응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혁권은 손을 내저으며 가볍게 얼버무렸다.
자세히 설명해 줄 마음이 없어 보이는 그 태도에 자말은 그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어지간히도 상대하기 싫은 사람이었나 보다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통화에 신경을 끊고 하던 이야기를 마저 계속했다.
“별다른 접안 시설 없이 아무 곳이나 상륙이 가능한 공기부양정을 이용해 물자를 공급하겠다니 정말 기발한 생각이십니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말은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사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리비아 서부 국경이 봉쇄되고 정부군과 ADDI 반군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지자 자말은 물자 수송이 불가능할 거라 낙담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이집트 쪽 국경이 열려 있었으나 트리폴리까지 거리가 너무 먼 데다 중간에 반군 세력과 무장 강도 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어 대규모 물자를 이동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상식을 완전히 깨는 방법을 써서 대량의 물자를 그것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으니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한번에 200톤 정도의 물량밖에 수송할 수 없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해.”
그러자 자말이 한쪽 팔을 내저으며 말을 받았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200톤을 육로로 수송하려면 트럭 수십 대를 움직여야 되는 데다 훨씬 더 위험해 트리폴리까지 절반도 가져가기 어려울 겁니다. 거기다가 수송비는 몇 곱절로 비싸고 일정 또한 길어질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공기부양정은 그런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
공기부양정을 운항하게 되면 더 이상 거친 사막 모래를 씹어 가며 습격의 위험이 도사리는 육로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가 비싼 돈을 들여 가면서 어렵게 공기부양정을 매입한 거였다.
“그럼 물자는 그리스에서 가져가는 겁니까?”
자말의 물음에 그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리스도 나쁘지 않지만 아무리 지중해가 잔잔한 바다라고 해도 공기부양정으로 트리폴리까지 계속 왕복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아.”
“그러면 어디를 출발지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몰타Malta야.”
말을 듣자마자 자말은 무릎을 쳤다.
“몰타가 있었군요.”
“직선거리로 150킬로미터쯤 되니까 배를 띄우면 2시간 안으로 트리폴리에 도착할 수 있는 거야. 거기다가 주브르급 공기부양정의 항속 거리를 생각하면 중간에 아무런 보급을 하지 않고 왕복이 가능하지.”
“그렇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요.”
재보급이 필요 없다는 건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다.
당장 예비 연료를 실을 공간에 화물을 더 채울 수 있고 아무래도 위험한 트리폴리 해안에 상륙해서 머무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선원들만 구하면 되겠군요.”
일반 선박과 공기부양정은 서로 운용하는 방식이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기술을 가진 선원이 꼭 필요했으며, 까다로운 부분이기도 했다.
“그건 따로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혁권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테네로 들어가는 바다 관문인 피레우스Piraeus 항구 한쪽에는 그리스 해군이 쓰는 군용 부두가 위치해 있다.
수도를 지키는 중요한 요충지인 만큼 평상시에도 크고 작은 군한 수척이 정박해 있었는데, 그중에 특이한 형태의 배가 하나 있었다.
주브르급 공기부양정 4번함 아테네.
그리스 해군이 보유한 동급 함정 중에서 가장 최근에 건조된 것으로 함령艦齡이 5년밖에 되지 않았다.
거기다 바로 작년에 대규모 오버홀Overhaul과 개량을 실시하고 재취역한 지 채 몇 달이 되지 않아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물건이다.
그리스 해군은 오랜 적대국인 터키를 겨누는 날카로운 비수가 될 것이라 잔뜩 기대를 걸었지만 갑작스레 덮쳐 온 재정 위기는 그 모든 것을 허물어 버렸다.
아테나 함 함장인 케노스 소령은 착잡한 얼굴로 함장실에 있는 개인 물품을 하나씩 상자에 담아 정리하고 있었다.
매각 대상에 오른 것은 알고 있었어도 그동안 설마하며 한 가닥 기대를 걸었는데, 얼마 전 내려온 퇴선 명령을 받아 들었을 땐 허무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특히 케노스 소령은 처음 중위 계급장을 달고 아테네 함이 건조되어 취역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여기서 근무를 하다가 함장직까지 맡았던지라 더욱 상실감이 컸다.
다른 수병들 역시 대부분 3년 이상 장기 근무를 한 경력자가 많아 함에 대한 애착이 크기는 마찬가지였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케노스 소령은 아내와 아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찍혀 있는 사진을 집어 들고는 안타까운 듯이 엄지손가락으로 액자를 쓸어내렸다.
육지에 있는 제 집보다도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함장실을 비워 주려니 마치 억지로 쫓겨나는 명예퇴직자 같은 심정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랬는데 긴축의 매서운 칼바람이 군대에도 불어와 그를 비롯한 많은 군인들이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조만간 군복을 벗어야 될 처지였다.
휑한 속살을 드러낸 빈 책장과 서랍들을 보면서 우울해하고 있는데,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기관장인 제노폰 상사였다.
작달막한 키에 후덕한 인상의 그는 아테네 함의 살림꾼이자 케노스 함장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짐을 정리하고 계셨군요.”
“오늘부로 퇴역을 하고 민간에 넘어갔으니 응당 자리를 비켜 줘야지.”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얼굴 가득 묻어 있는 씁쓸함을 지우기는 못했다.
제노폰 상사도 그런 상관의 마음과 같은지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처음 조선소에서 만들어진 걸 인수받아 지금까지 수년을 함께 보냈는데 이렇게 떠나보내야 된다니 정말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