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91
491
-대표님. 회사를 키우시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만 드라마 제작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괜찮은 대본이 있어야 되고 그걸 영상으로 찍어 낼 감독과 스태프들이 다 갖춰져야 되는데, 저희한테는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즘은 드라마 제작비도 크게 올라 잘은 모르지만, 못해도 편당 20~30억은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이런 큰돈을 투자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 문제들만 해결되면 드라마를 제작할 수 있다는 거군.”
예상과 다른 반응에 정동식은 잠깐 주춤하며 대답했다.
-다른 것들도 있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는 그렇습니다.
머리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을 한 혁권은 이내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말했다.
“정 이사가 말한 것들은 내가 해결해 보도록 할 테니까. 일단 그렇게 알고 나머지 두 명도 미리 연기 연습을 시켜 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떨떠름한 대답이 거슬렸지만 혁권은 그냥 넘어갔다.
대본과 감독, 스태프는 물론이고 아무런 경험도 없이 갑자기 드라마를 제작하겠다고 하니까 정동식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고 어처구니가 없을 터였다.
사실 그 역시 예상에 없던 일이었기에 아직 어떻게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제작비를 충분히 투자한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데다 애초에 국정원에서 먼저 제안을 한 것이니, 가능한 한 모든 걸 다 받아 낼 생각이었다.
며칠 뒤 서울을 떠난 혁권은 터키 이스탄불을 거쳐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Kiev에 도착했다.
잠시 휴전 중이라고 해도 내전 상태인 국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키예프의 첫인상은 아주 평화로웠다.
입국장을 나온 혁권은 미리 준비해 둔 차량을 타고 곧장 공항을 빠져나와 키예프 시내로 향했다.
“그럼 전 밖에 있겠습니다.”
“그래.”
짐을 한쪽에 놔둔 하킴이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문을 닫고 나가자, 혁권은 얼굴에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침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중앙에는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는 아름다운 정원과 분수대를 그린 풍경화가 화려한 액자에 감싸여 벽을 장식했다.
발코니 쪽으로 걸어간 혁권은 푸른 드니프로 강을 가운데 두고 펼쳐져 있는 키예프 시가지의 풍경이 아름다웠지만, 힐끔 시선을 한번 주고는 바로 커튼을 쳤다.
순식간에 방 안이 어두컴컴해졌다.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빛 덕분에 사물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까진 아니었으나, 낮인데도 불구하고 실내등을 켜야만 했다.
혁권의 이런 버릇은 예전에 호텔 객실에서 저격수의 공격에 당할 뻔한 이후로 생겨난 것이었다.
손에 든 선글라스를 탁자에 올려둔 혁권은 소파에 파묻듯이 몸을 기대고 앉았다.
전용기를 타고 편하게 날아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피곤함이 하나도 없지는 않았다.
특히나 10시간이 훌쩍 넘는 장거리 비행은 더욱 그랬다.
그렇게 소파에 늘어져 있을 때 짐 가방에 넣어 둔 위성전화기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삐리리릭. 삐리리릭.
혁권은 이미 앉았는데 또 일어나야 하는 것이 귀찮아 끄응 소리를 내면서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여전히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벨소리에 인상을 찡그린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키예프에는 잘 도착했나?
위성전화기를 타고 들리는 압둘라흐만의 목소리에 그는 반색을 했다.
“방금 호텔에 들어왔습니다.”
-이런, 많이 피곤할 텐데 내가 시간을 잘못 잡은 것 같구먼.
“아닙니다. 그것보다 어쩐 일이십니까?”
-야몰렌코는 언제 만나기로 했나?
다시 소파로 가서 앉으면서 혁권이 대답했다.
“내일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렇구먼.
잠시 뜸을 들이던 압둘라흐만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꼭 필요하다고 해서 소개를 시켜 주기는 했지만, 야몰렌코는 거래 상대로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은 인물일세.
“알고 있습니다.”
-만난다면 대비를 확실히 하고 가야 될 걸세.
“저도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테니 너무 염려 하지 마십시오.”
-하긴 자네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방심하지 말고 만약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도록 하게.
“그러겠습니다.”
-참.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에서 야몰렌코를 추적 중이라고 하니까 참고하게.
처음 듣는 정보에 혁권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일명 SBU로 불리는 보안국은 한국의 국정원과 같은 역할을 하는 우크라이나 최상급 정보기관이었다.
그리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구소련 KGB가 기반이 된 만큼 역내에서는 상당한 실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곳과 마찰이 있다면 자칫 거래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기에 혁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일인지 이유는 모르십니까?”
-우리가 하는 사업이 원래 위험한 일이지 않나. 야몰렌코가 한 거래가 보안국의 신경을 건드린 거겠지. 소문에 의하면 유즈노야 설계국(KB Yuzhnoye)에서 민감한 전략 물자와 기술이 유출됐는데 거기에 관련됐다는 의심을 받는 모양이야.
“……!”
혁권이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말했다.
“야몰렌코가 한 짓이 맞는 겁니까?”
-그것까지는 모르겠네.
CIA도 아니고 압둘라흐만이 멀리 떨어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속속들이 다 파악하고 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이 정도까지 알고 있는 것도 대단한 거였다.
-필요하다면 좀 더 알아봐 줄 수는 있네.
“제가 괜히 번거롭게 해 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압둘라흐만이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게. 자네한테 빚을 지울 수 있다면 오히려 내가 더 덕을 보는 격이지.
그렇게 압둘라흐만과의 통화를 끝낸 혁권은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팔걸이를 톡, 톡 두드렸다.
“이거 참…… 일이 묘하게 됐군.”
유즈노야 설계국에서 훔쳐 낼 거라고는 로켓 엔진과 관련 기술밖에 없었다.
자신이 RD-250 로켓 엔진을 구하려고 왔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의 등장에 혁권이 이번 거래를 계속 진행해야 될지 아니면 잠시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봐야 될지 고민했다.
같은 시각.
시내에 위치한 보안국 본부 건물 5층에 있는 부쉬코프 방첩부장의 방에 부하인 아놉카 대위가 들어섰다.
“부장님, 적색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인물이 오늘 오전에 보리스필 국제공항을 통해서 입국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놉카 대위가 공항 CCTV 영상에서 뽑아 온 걸로 보이는 사진을 몇 장 책상에 올려놨다.
거기에는 선글라스를 낀 채 부하들과 출국장을 나서는 혁권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뭐 하는 놈이야?”
“존슨이라는 이름으로 최근 리비아와 중동 지역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밀거래상입니다.”
사진을 살펴보던 부쉬코프 부장인 이맛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었다.
“밀거래상이라고?”
“그렇습니다.”
“여긴 왜 온 거지?”
“그것까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내려놓은 부쉬코프 부장이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면서 말을 내뱉었다.
“키예프에 관광을 하러 온 건 아닐 테니까. 그렇겠지.”
아놉카 대위가 얼른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자 몸을 뒤로 기댄 부쉬코프 부장은 담배를 몇 모금 빨고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혹시 야몰렌코하고 관련이 있는 걸까?”
“그럴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습니다.”
“벌써부터 날파리들이 여기저기서 꼬이는 것 같군. 놈의 행방은 아직도 못 찾았나?”
시선을 받은 아놉카 대위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계속 추적 중입니다.”
짧게 혀를 찬 부쉬코프 부장은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벌써 며칠째인데 아직 그딴 소리나 하고 있는 거야!”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요원들이 뒤를 바짝 쫓고 있으니 곧 꼬리가 잡힐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가뜩이나 상황이 안 좋은데 민감한 로켓 기술이 외부로 유출된 것이 알려진다면 일이 아주 골치 아파진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옛.”
“그러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이 빼 간 로켓 엔진과 자료를 회수해 오란 말이야!”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책상을 세게 내려치면서 목소리를 높이자 긴장한 얼굴로 아놉카 대위가 몸을 굳혔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반쯤 피운 담배를 크리스털 재떨이에 비벼서 끈 부쉬코프 부장은 손가락 끝으로 사진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야몰렌코하고 거래를 하러 왔을지 모르니까 요원들을 붙여서 감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으면서 의자에 등을 붙인 부쉬코프 부장은 사진에 찍혀 있는 혁권의 얼굴을 지그시 노려봤다.
“보미야!”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박보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세아?”
“설마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네.”
윤세아가 푹 눌러쓴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면서 살갑게 웃었다.
청바지에 품이 넓은 후드 티, 그리고 야구 모자를 쓴 평범한 옷차림이었는데, 윤세아가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동그란 링 귀걸이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박보미 역시 구두만 신었을 뿐 티셔츠에 재킷만 걸친 가벼운 차림새라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다만 평범한 여대생 같은 복장임에도 불구하고 둘 다 모델답게 키가 크고 비율이 월등하게 좋아서 눈길을 끄는 구석이 있긴 했다.
“너도 정 이사님 보러?”
“응. 그런 말 하는 거 보니까 똑같은 용건인가 보네.”
보미가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타서 사무실이 있는 층수를 눌렀다.
“수나 언니가 연락했거든. 뭐 때문에 부르는 건지 말은 안 해 줬는데 또 저번처럼 큰일이 터진 건 아니겠지?”
“설마. 나도 전화 받았었는데 목소리가 밝았으니까 그렇진 않을 거야.”
큰 풍파가 한번 지나간 뒤라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수나 언니!”
제 책상 앞에 앉아 한가득 모인 영수증을 정리하고 있던 김수나가 고개를 들어 둘을 환영했다.
“어서 와. 이사님 뵈러 왔지?”
“네. 지금 바로 들어가도 돼요.”
“잠깐만 기다려.”
김수나는 사무실 한쪽에 따로 위치한 이사실 문을 똑똑 두드린 뒤 두 사람이 왔다는 것을 알리고 다시 나왔다.
“이사님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들어가 봐.”
“감사합니다.”
박보미와 윤세아는 나란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와. 시간 딱 맞춰 왔군.”
“안녕하세요.”
박보미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이사실을 둘러보았다.
자주 들어와 본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전보다 뭐가 많이 바뀐 느낌이었다.
인테리어를 바꿨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가구의 배치도 그대로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드나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옆에 나란히 앉은 윤세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사님, 전보다 방이 많이 더러워졌네요.”
“그래?”
정동식은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서류들과 펜으로 어지럽혀져 있는 책상을 대강 치우는 척을 했다.
“일이 바빠서 통 정리 정돈 따위 할 여유가 없어.”
박보미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뜻으로 윤세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가끔 보면 얘는 말이 뇌를 안 거치고 나오는 것처럼 굴 때가 있단 말이야.
왜, 하고 쳐다보는 윤세아에게 열심히 눈치를 준 박보미는 타이밍 좋게 김수나가 마실 거리를 들고 들어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