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90
490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한참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혁권은 살짝 미간을 좁히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심인성이오.
“알고 있습니다.”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시간이 괜찮겠소?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로 엮여 있는 일이 많았기에 혁권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난번 그 가게에서 보도록 하지요.”
-그럽시다.
전화를 끊은 혁권은 상대가 무슨 용건으로 자신을 보자고 하는지 잠시 고심하다가 이내 혼잣말을 내뱉었다.
“만나 보면 알겠지.”
그럭저럭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웬만하면 원하는 걸 들어주겠지만, 아니다 싶을 때는 거절하면 됐다.
몇 시간 뒤 이태원에 위치한 바인 샹그릴라에 혁권이 혼자 앉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끈적끈적한 재즈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이번에도 벽 쪽에 붙은 박스 석이었는데 입구를 마주 보고 있어 누가 들어갔다가 나가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앞에 놓인 병맥주를 반쯤 마셨을 때 문이 열리면서 기다리던 상대가 가게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마주친 심인성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와서는 비어 있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런, 벌써 한 잔 마시고 있었소?”
“뭐로 드시겠습니까?”
“나도 같은 걸로 하겠소.”
한쪽 팔을 든 혁권이 술을 주문하자 얼마 있지 않아서 종업원이 차가운 병맥주를 가져왔다.
뚜껑을 손으로 돌려서 딴 심인성은 그대로 몇 모금을 마신 뒤 내려놨다.
“용건은?”
“성격 한번 급하군.”
심인성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야기가 빨라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 뜻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이 앉은 곳을 흘끔거리거나 훔쳐듣는 이가 없는지 확인하는 눈매가 날카로웠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심인성은 몸을 앞으로 당겨 앉고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나한테 넘겨줬던 북한 ICBM 로켓엔진에 대한 정보가 전부 사실인 걸로 확인됐소.”
이미 다 확인을 해 보고 건넸던 거였기에 혁권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북한군이 고성능의 액체로켓 엔진을 확보했다면 국가 안보에 엄청난 위협이 아닐 수 없소. 상대가 가진 탄도 로켓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서 유즈마슈Yuzhmash사가 제작한 RD-250 로켓 엔진을 구해 줬으면 좋겠소.”
혁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나보고 로켓엔진 가져오라는 겁니까?”
“그렇소.”
당연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는 모습에 혁권은 눈가를 찌푸렸다.
“그 정도는 그쪽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왜 이 일을 맡아야 되는지 모르겠군요.”
까칠한 반응에 심인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차분히 이야기를 했다.
“물론 우리 쪽에서 엔진을 구하지 못하는 건 아니요.”
“그럼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하지만 알다시피 탄도 미사일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고출력 로켓엔진의 획득에 대해서는 각국이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함부로 나서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오. 특히 중국이나 일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절 중간에 내세운다고 해서 각국 정보기관들이 눈치를 못 챌 것 같습니까?”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뒤에 우리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겠지요.”
“그렇다면 굳이 이런 식으로 귀찮게 일을 진행할 필요가 없을 텐데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중간에 제3자가 끼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김 사장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오. 아무리 형편없는 명분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과 같지.”
어디에나 약간의 겉치레와 허식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간단 말입니까. 대충 알겠군요.”
“그럼 일을 맡아 주는 거요?”
“솔직히 그다지 내키지 않는군요. 미안하지만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 싫었던 혁권이 바로 거절하자 상대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지 말고 좀 도와주시오.”
“왜 꼭 제가 해야 된다는 겁니까?”
“암시장 쪽에 발이 넓으니 원하는 물건을 구하기 쉬운 데다 무엇보다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지 않겠소.”
“…….”
딱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그는 반박을 하지 않은 채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팔짱 낀 채 잠시 고심하던 혁권은 이내 심인성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떨어지는 건? 설마 알량한 애국심으로 다 해 달라는 소리는 마십시오. 그럼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 테니.”
승낙할 것 같은 모습을 보이자 심인성은 행여 마음이 바뀔까 봐 얼른 대답했다.
“그렇게 염치가 없지는 않소. 당연히 대가를 지불하는 건 물론이고 수용 가능한 범위라면 뭐든지 부탁을 들어줄 용의가 있소이다.”
심인성은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얼마 전에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인수했다고 들었소. 소소한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정도쯤은 간단하게 해결해 줄 수도 있소. 소속 연예인들이 방송에 출연할 수 있도록 손을 써 주는 것도 가능하고.”
그의 근황을 심인성이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혁권은 미미하게 표정을 굳혔다.
어쩌면 더욱 개인적인 정보까지 파악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예를 들면 소현과의 관계라던가.
물론 심인성이 알고자 하면 캐내지 못할 정보는 아니었으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혁권은 아주 불쾌해졌다.
“남의 사생활을 파고드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닌데…….”
“귀가 있으니 소문이 자연스럽게 들린 것뿐이오.”
능구렁이 같은 대답에 그는 내심 혀를 찼다.
하지만 바꿔서 생각하면 국정원에서 특별 관리 대상에 올라가 있을 그의 동정을 파악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어떻게 활성화시킬지 고민 중이던 상황에서 딱히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려 본 혁권은 몸을 뒤로 살짝 기대며 입을 뗐다.
“지상파 드라마에 주조연 배역 세 개를 준다면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이야기를 들은 심인성이 빙긋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지 말고 편성을 하나 빼 줄 테니까 아예 드라마를 하나 제작해 보는 것이 어떻소?”
“…….”
뜬금없는 말에 혁권은 뭔 헛소리냐는 얼굴로 상대를 쳐다봤다.
“그러면 이것저것 신경 쓸 필요 없이 소속 연예인들을 확실히 밀어줄 수 있지 않겠소. 더불어 투자금 명목으로 외국에 있는 돈을 한국으로 가져오기도 좋을 거요. 국세청은 신경 쓰지 마시오. 귀찮게 굴지 않도록 손을 써 둘 테니.”
조건으로 내세운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제안이었다.
그리고 심인성의 말대로 외국 계좌에 묵혀 놨던 돈을 합법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출처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돈세탁을 하지 않으면 당장 국세청에서 덤벼들 것이 분명했기에, 지금까지는 돈을 쓰는 데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금 들은 제안한 대로 한다면 그 모든 걸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게 혁권의 구미를 당겼다.
‘절대 거절하지 못할 미끼를 가져왔군.’
이 정도로 편의를 봐준다는데 더 이상 밀고 당기기를 하며 기력을 소모할 이유가 없었다.
“꽤나 머리를 굴리신 것 같군요.”
혁권의 입가에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오자 심인성이 어떠냐는 듯 테이블에 몸을 가까이 기댔다.
“오래 갈 사이인데 이 정도 배려는 해야 되지 않겠소.”
상대편 의도대로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혁권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었기에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로켓엔진은 언제까지 가져다주면 되는 겁니까?”
심인성이 눈에 이채를 띠며 대답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알겠습니다. 물건이 구해지면 다시 연락하지요.”
“기다리고 있겠소.”
이야기를 끝낸 혁권은 지갑에서 1만 원짜리 지폐를 두 장 꺼내 반쯤 남은 병맥주 밑에 놔두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밖으로 나온 그는 미끄러지듯 다가와서 멈춘 검은색 벤츠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집으로 가.”
“예.”
운전대를 잡은 지병하가 짧게 대답하곤 앞을 바라봤다.
푹신한 가죽 시트에 기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혁권은 스마트폰을 꺼내 정동식한테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통화 가능한가?”
-말씀하십시오.
“지난번에 지시한 영입 건은 어떻게 되고 있어?”
-그러지 않아도 내일 보고를 드리려고 했는데 은신영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글쎄, 잘 모르겠군.”
혁권은 들어 본 적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런데 왜?”
-아마 얼굴을 보면 아실 텐데…… 이 바닥에선 연기를 제법 잘하는 걸로 소문난 배우입니다. 다만 소속사의 푸시가 모자라서 예상보다 못 뜬 탓에 조연만 전전하고 있지요.
“칭찬을 늘어놓는 걸 보니 그 여배우를 영입하려는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마침 다음 달에 소속사하고 계약 기간이 끝난다고 하니 시기도 딱 맞아떨어지고 은신영 씨를 영입하면 저희 회사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쪽하고는 조율이 다 된 거겠지?”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름이 있는 배우인 만큼 요구하는 계약금이 꽤 높습니다.
“원하는 액수가 얼만데.”
-2억 원입니다.
특A급 연예인들에 비하면 낮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계약을 진행해.”
시원스러운 대답에 정동식 이사가 오히려 당황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꼭 필요한 배우라고 생각해서 영입을 하려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지난번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돈에 구애받지 말고 회사를 키우는 것만 신경을 쓰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항상 예산이 부족하던 예전과 달리 뒤를 팍팍 밀어주자 든든한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이래도 되는지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참. 그리고 드라마를 하나 제작해야 될 것 같으니까 제반 상황을 알아봐.”
-지금 드라마를 직접 제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진 정동식과 달리 혁권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지상파 방송국에 편성을 받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아마 조만간 회사로 연락이 올 거야.”
-그게 무슨……?
정동식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쟁쟁한 드라마 제작사들도 따내기가 어려운 것이 바로 지상파 방송국 편성이었다.
그런데 그걸 이쪽 바닥하고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혁권이 마치 동네 마트에 가서 담배라도 사 오듯 받아 냈다고 하니 황당하고 쉽게 믿기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당장 욕을 한 사발 퍼부어 줬겠지만, 상대가 회사 대표였기에 정동식은 혁권이 언짢아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어느 방송국에서 편성을 받으셨다는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아직 몰라.”
-…….
편성을 받았는데 어떤 방송국인지 모른다니 정동식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뭔가 크게 착각하고 이러는 거라 생각한 정동식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