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89
489
# 제안
잠시 후 정웅철과 조직원들이 끌려 들어와 좁은 사장실 안이 가득 찼다.
다들 제 발로 들어왔지만 한 명은 정신을 완전히 잃고 늘어져 있어 질질 끌고 와 한쪽에 놔뒀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하나같이 온몸에 멍이 들고 피투성이였다.
푹신한 가죽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대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백성균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놈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뗐다.
“저거 병원에 보내야 되는 거 아냐?”
그러자 한 대 맞았는지 입술이 살짝 터진 임영식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백성균은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그냥 바닥에 비벼서 끄고는 꿇어 앉아 있는 사내들을 봤다.
그러다가 정웅철에 이르러서 그의 시선이 멈췄다.
안면을 가격당한 탓에 콧대가 이상한 모양으로 내려앉아 있었고, 인중 부근에는 아직 덜 마른 핏자국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숨쉬기가 힘든 듯 연신 입으로 가쁜 숨을 내쉬는 모습이었다.
“어이.”
“예.”
백성균이 턱짓으로 정웅철을 가리켰다.
“그래도 명색이 대가린데 저런 꼴로 놔둬서 되냐. 이리 데리고 와.”
눈을 부라리면서 꿇어앉아 있는 이들을 노려보던 지병하가 꾸벅 고개를 숙이곤 정웅철의 팔을 붙잡고 일으켰다.
어깨를 꾹 누르면서 소파 빈자리에 앉히자, 통증이 올라오는지 정웅철이 낮게 신음성을 흘렸다.
그걸 본 백성균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엄살은, 그러게 그냥 고분고분 이야기를 들을 것이지, 왜 덤비고 지랄이야.”
“…….”
가만히 있다가 영문도 모른 채 습격을 당한 정웅철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힘에서 졌기에 속으로만 욕을 할 뿐 잠자코 있었다.
“압구정 역 뒤쪽에 공사 중인 7층짜리 건물 알지?”
“……예.”
“우리가 그 건물을 인수했는데 서류가 지저분해서 정리를 좀 하려고 왔지.”
그때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차린 정웅철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그거 가져와.”
임영식이 제법 묵직한 보스톤 백을 하나 들고 와서는 탁자에 올려놨다.
“1억이야. 피차 서로 얼굴을 다시 봐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이걸로 깔끔하게 끝내자고.”
“받아야 될 채권이 15억인데…….”
“이 새끼야! 그건 네놈이 작업 치려고 뻥튀기한 거고, 누굴 지금 호구로 보는 거야?”
버럭 고함을 내지르면서 백성균이 사납게 노려보자 이미 기가 꺾인 정웅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쯧.”
짧게 혀를 찬 백성균은 안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정웅철 앞에 내려놨다.
“입 아프니까 여기다가 지장指章이나 찍어.”
돈을 받았다는 영수증이었는데 액수란에 15억이라고 적혀 있었다.
선뜻 지장을 찍지 못하고 상대가 미적거리자 백성균이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큰소리로 다그쳤다.
“뭐 해!”
또 맞을 것이 두려운 듯 흠칫 몸을 떤 정웅철은 마지못해 엄지에 인주를 묻혔다.
날카로운 백성균의 눈앞에서 차마 내키지 않는 손길로 겨우 지장까지 찍는 과정이 끝나자 임영식이 영수증을 가져왔다.
지장이 제대로 찍힌 것을 확인한 백성균은 영수증을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우리 앞으로 다시 얼굴 보는 일은 없도록 하자고.”
만나서 반가울 일도 없잖아, 하고 돌아선 백성균이 부하들을 향해 말했다.
“볼일 다 끝났으니 이제 가자.”
“예, 형님!”
부하들은 잔뜩 움츠려 있는 사내들을 향해 일부러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곤 백성균의 뒤를 따라 떠났다.
그렇게 유치권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한 혁권은 바로 시공사를 선정해서 건물 공사를 재개시켰다.
주얼리 브랜드인 미리내의 출시 준비도 차질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첫 신문과 잡지 광고가 나갔다.
거실 가죽 소파에 몸을 파묻듯이 기댄 혁권은 호텔 옥상에서 트리폴리 시가지를 배경으로 백인 기자가 영어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뉴스를 보면서 리비아에 있는 자말과 위성 전화기로 통화를 했다.
“그러면 정부군이 타주라를 완전히 탈환한 거야?”
-그렇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자밀 의장 세력이 시가지를 탈출해서 벵가지로 후퇴 중이라고 합니다.
“자위야 쪽으로 압박해 오던 ADDI는 어떻게 됐어?”
-아직 정부군하고 대치 중이지만 자밀 의장 병력이 타주라에서 패퇴한 이상 계속해서 공세로 나오지는 못할 겁니다.
수긍하듯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주와라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ADDI의 기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블랙워터와 정부군을 홀로 맞서 싸우기는 어려웠다.
분명히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자위야에서 빠져나와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가거나 트리폴리 정부와 휴전 협상을 벌이려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평화 협정을 깨고 뒤통수를 친 ADDI의 행동에 이가 갈리겠지만 자밀 의장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샤라빌 대통령으로서는 일단을 그냥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앞으로 정부군이 어떻게 움직일 것 같나?”
-이번 전투로 입은 피해가 워낙 커서 당장 다른 행동을 취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정부군 사상자가 1천 명이 넘는다고 그랬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략 그 정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트리폴리 정부군 숫자가 7천 명이 안 되는 걸 생각하면 거의 20%가 훌쩍 넘는 피해가 발생한 거였다.
거기다가 이 숫자는 라스라누프에 있는 여단까지 포함한 거였기에 손실이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었다.
사실상 블랙워터 용병들이 아니라면 자밀 의장과 ADDI를 격퇴시키는 건 고사하고 본거지인 트리폴리를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트리폴리 정부군이 섣불리 벵가지로 진격하지 못하는 건 이미 오래전에 전장을 빠져나간 자밀 의장이 동부 지역에 세력을 확고하게 구축해 놓고 있기 때문이었다.
괜히 성급하게 군대를 움직였다가는 겨우 되찾은 주도권을 다시 빼앗길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혁권은 귀에 댄 위성 전화기를 고쳐 쥐면서 말했다.
“당분간은 양측 다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하니 큰 전투 없이 소강상태에 들어가겠군.”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리고 에프칸 중위가 귀띔해 준 정보에 의하면 샤라빌 대통령이 자위야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ADDI 병력 격퇴 작전을 블랙워터 용병들한테 맡길 거라고 합니다.
혁권은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비싼 돈을 주고 있는 만큼 최대한 써먹으려고 하겠지.”
매주 트리폴리 정부를 대신해서 그가 블랙워터에 지급하는 원유 판매 대금이 무려 1천만 달러가 넘었으니, 샤라빌 대통령 입장에서는 용병들을 그냥 놀려 두려고 하지 않으려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그런 것도 있겠습니다만 부족한 병력과 무기를 새로 보충해 군대를 재정비하려는 목적이 클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군.”
당장은 부족한 전력을 블랙워터가 메워 주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용병들만 전적으로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샤라빌 대통령과 측근들이 아무리 욕심이 많다고 해도 정권이 무너지면 지금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이 함께 사라진다는 걸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후세인 대령에게 트리폴리로 오라는 소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상체를 살짝 일으키면서 혁권이 미간을 좁혔다.
“그게 사실이야?”
-예. 명분은 라스라누프를 잘 지켜 냈고 그동안의 전공을 인정해 준장으로 진급을 시켜 준다는 겁니다만 아무래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봐도 찝찝한 기분이 드는군. 혹시 샤라빌 대통령 몰래 원유를 빼돌리고 있는 걸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재할 수는 없지만, 제가 보기에 그것보다는 이번에 트리폴리로 병력을 이끌고 오라는 명령을 어기자 충성심에 의심을 품은 샤라빌 대통령이 후세인 대령의 힘을 빼 놓으려는 수작인 걸로 보입니다.
혁권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말했다.
“후세인 대령을 제거했다가는 아부카 여단 병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 전에도 끈끈한 관계로 엮여 있던 아부카 여단이었지만, 몰래 빼돌린 원유를 통해 자체적으로 보급을 해결할 수 있게 되면서 이제는 거의 후세인 대령의 사병 집단으로 변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후세인 대령한테 위해를 가한다면 곧바로 아부카 여단 병사들이 반기를 들 가능성이 컸다.
가뜩이나 정부군의 전력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정예 부대인 아부타 여단의 이탈은 치명적이었다.
거기다가 원유 수출에 필요한 시설과 유전이 있는 라스라누프 지역을 함께 잃어버릴 수 있었기에 최악의 선택이 될 터였다.
-그래서 계급장에 별을 달아 주려는 것 같습니다.
말뜻을 알아차린 혁권은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렇군. 진급을 시켜서 자연스럽게 아부카 여단 병사들하고 떼어 놓으려는 속셈이군.”
-바로 그겁니다. 손발을 다 묶어 신뢰를 잃은 후세인 대령을 옆에 놔두며 감시하고 새로운 여단장을 임명해서 아부카 여단을 다시 장악하려는 수작이지요.
“이제 트리폴리 정부의 행동이 모두 이해가 되는군.”
샤라빌 대통령은 아닐 테고 아마도 측근인 모함메드 석유부 장관이 낸 잔꾀일 터였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진급시켜 준다는 거였기에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후세인 대령이 아부카 여단과 라스라누프 지역의 통제권을 잃게 된다면, 그동안 몰래 원유를 추가로 반출해서 짭짤한 수익을 올리던 걸 더 이상 못하게 될 거였기에 혁권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후세인 대령의 반응은 어때?”
-측근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이슬람 형제단의 위협이 완전히 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핑계로 트리폴리행을 거부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샤라빌 대통령의 의심이 더욱 짙어질 텐데?”
-어차피 트리폴리로 가면 모든 권한을 잃고 허수아비로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제거될 걸 아니까. 최악의 경우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시를 따른다면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꼴이 될 테니 당연한 행동이겠지.”
사실 이런 후세인 대령의 행동은 라스라누프 지역 외곽에 위치한 유전을 일부 복구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몰래 혁권과 거래를 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후세인 대령이 보급품과 무기를 추가로 더 주문했습니다.
“샤라빌 대통령과 충돌을 대비하려는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것 참 난감하군.”
트리폴리 정부와 후세인 대령 양쪽하고 다 거래를 하는 혁권 입장에서는 지금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물량이 얼마나 돼?”
-평소 주문하던 것보다 2배 정도 더 많습니다. 그리고 T-72 전차 10대를 구해 달라는 요구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전차는 꽤 많이 가지고 있잖아?”
전투력은 뛰어났지만 보급과 정비가 꾸준히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전차를 운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트리폴리 정부에 고용되어 있는 블랙워터 용병들을 의식하는 것 같습니다.
아부카 여단이 리비아 내에서는 알아주는 최정예 부대지만 뛰어난 장비와 실력을 갖춘 블랙워터 용병들하고 부딪치면 밀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고심한 혁권은 이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다고 해. 그리고 변동 상황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옛.
혁권은 위성 전화기를 내려놓고 흐음, 하면서 팔짱을 꼈다.
“이걸 어떻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