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88
488
병실 침대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도정인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실형을 받아 교도소에 갇히는 건 물론이고 어렵게 키운 회사가 그대로 다 날아가게 생겼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도정인은 손에 든 담배를 비벼서 끄고는 고동욱 실장의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한참 뒤에야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고 실장님, 접니다.”
-당분간 연락을 하지 말라고 분명히 이야기를 했을 텐데, 내 말을 잊었소?
현재 그가 처한 상황을 보여 주듯 퉁명스러운 상대의 말투에 도정인은 한쪽 뺨을 실룩였다.
며칠 전 몰래 병실로 찾아온 고동욱 실장은 경찰 조사에서 김성균 사장의 이름이 거론된다면 뒷일을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며 협박을 하고 갔었다.
뒤를 봐주는 가장 큰 스폰서였기에 입을 열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자꾸만 구석으로 몰리면서 상황이 안 좋아지자 마음이 바뀌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연락을 드렸습니다.”
-뭔지 말해 보시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태도에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당장 아쉬운 건 이쪽이었기에 도정인은 차분히 용건을 말했다.
“이번 일을 넘기는 데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아주 질척거리는군.
도정인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질척거린다는 말까지 듣고 나니 자존심이고 뭐고 깡그리 다 뭉개진 기분이었다.
그는 속으로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 손에 든 스마트폰을 다시 고쳐 쥐었다.
“제가 경찰 수사를 받다가 입을 잘못 놀리면 고 실장님이 모시고 계신 분한테도 좋은 일은 아닐 텐데요.”
-지금 협박하는 건가?
“설마 제가 그러겠습니까. 다만 수사 과정에서 심하게 압박을 받는다면 저라도 버틸 재간이 없다는 뜻이죠.”
-…….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고동욱 실장이 무겁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키우던 개가 주인을 물면 어찌 되는지 아시오?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서 죽을 때까지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거요.
“오죽했으면 제가 이러겠습니까. 그러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다시 연락을 하겠소.
“좋은 소식이 있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대답 없이 툭 끊겨 버린 전화를 잠시 노려보던 도정인은 스마트폰을 침대에 던져 버리곤 자기도 몸을 뒤로 기댔다.
고동욱 실장의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번 일 때문에 태일그룹과 사이가 틀어지더라도 일시적인 일일 뿐, 상황이 잘 해결되기만 하면 다시 관계를 잘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혁권은 마침 복도 맞은편에서 오던 정빛나 실장과 딱 마주쳤다.
“사장님!”
오늘은 허벅지까지 길게 슬릿이 파여 있는 펜슬 스커트에 화이트 셔츠를 매치한 차림새였다.
하이힐 굽 소리를 내면서 급히 다가온 정빛나 실장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드디어 작업을 다 끝냈습니다.”
비장의 한 수를 꺼내듯이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내뱉는 그녀의 말에 혁권도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안 그래도 연락 받고 온 참이네. 지금 볼 수 있나?”
“예. 물론이지요.”
혁권과 함께 나란히 사장실로 이동하면서 정빛나 실장은 계속 흥분에 겨워했다.
“보시면 아주 만족하실 겁니다. 이번 작품은 제가 주얼리 디자이너로서 활동하는 동안 만들었던 다른 것들 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아요. 사장님께서 주신 다이아몬드의 등급도 높았고, 제약 없이 마음껏 가공할 수 있어서 상상 이상으로 좋은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대단한가?”
“제 포트폴리오의 첫 번째 페이지에 싣고 싶을 정도라고 해 두죠.”
“너무 기대를 하게 만드는군. 그러다 실망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정빛나 실장의 확신에 찬 얼굴을 보니 혁권 또한 꽤 기대가 되었다.
과연 얼마나 괜찮은 디자인을 뽑아냈기에 저 정도로 자신만만해하는지 호기심까지 생겼다.
혁권이 사장실에 있는 제일 큰 소파에 앉자 정빛나 실장이 뒤에 따라온 팀원에게서 사각형의 주얼리 케이스를 받아 들었다.
“보십시오.”
그러면서 정빛나 실장이 뚜껑을 연 채로 케이스를 테이블에 올려놓자, 자연히 실내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군데로 모였다.
“이건……!”
푸른빛을 띠는 검은 벨벳 위에 놀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운 보석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정중앙에는 깊은 심해를 닮은 커다란 블루 다이아몬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빨려들 것만 같아 무섭기도 하지만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을 가졌다.
섬세하게 세공된 각각의 커팅 면은 각도에 따라 아주 작은 빛도 반사해 내며 다이아몬드 특유의 광채를 발산했고,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된 수십 개의 투명한 보석들이 여왕을 모시는 신하처럼 블루 다이아몬드를 몇 겹으로 감싸고 있어 기품마저 느껴졌다.
완벽한 비율로 완성된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보는 순간 혁권은 바로 이거다라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군그래.”
이 정도면 인생 최고의 작품이라고 스스로 자화자찬해도 인정할 수 있을 법했다.
“어떠십니까. 이거라면 까르띠에, 불가리, 티파니 같은 글로벌 브랜드의 디자인과 비교해 봐도 전혀 뒤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혁권은 천천히 정빛나 실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왼편에 앉아 있는 김덕현 전무를 바라봤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솔직히 주얼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남자인 제가 봐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작품 같습니다.”
“무뚝뚝한 김 전무까지 홀릴 정도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군.”
“하하하!”
약간 긴장감이 감돌던 실내는 혁권의 농담에 웃음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풀렸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은 그는 정빛나 실장에게 시선을 주면서 물었다.
“이름은 정했나?”
“코델리아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바다의 보석이라는 라틴어입니다.”
“코델리아라…….”
앞에 있는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쳐다보면서 나직이 이름을 중얼거린 혁권은 머리를 끄덕였다.
“딱 어울리는 이름이군. 최 과장.”
“예.”
“함께 선보일 다른 작품들도 준비가 모두 다 끝났겠지.”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예정대로 행사를 진행시키도록 해.”
지시를 받은 최정욱 과장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정 실장, 그동안 고생했어. 역시 최고답게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냈어.”
“이런 멋진 다이아몬드로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오히려 제가 더 즐거웠습니다.”
가감이 없는 솔직한 대답에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앞으로 더 귀하고 아름다운 보석들을 만질 수 있을 거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미리내의 상징이 될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준비되자 잠시 미루어 놨던 브랜드 론칭이 다시 빠르게 진행됐다.
이런 가운데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의 새 보금자리가 될 건물 계약도 혁권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주변 시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었지만 조폭들이 엮인 유치권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건물주와 은행에서는 이번에도 계약이 무산될까 봐 서둘러 18억에 도장을 찍었다.
그 자리에서 계약금 없이 매매 대금을 전액 현금으로 송금하는 걸로 건물 소유권이 바로 혁권한테 넘어왔다.
다음 날 오후.
“형님 계시냐?”
벌컥 문을 열고 나타난 건장한 덩치의 말에 험악한 인상의 사내 두 명이 소파에 앉아 있다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대답했다.
“사장실 안에 계십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성덕호가 노크를 하고는 사장실로 들어갔다.
레슬링 선수 출신으로 전국체전에 나가 메달을 따기도 한 성덕호는, 강남 일대 유흥가에서 사채 장사를 하는 작은 폭력 조직 두목인 정웅철의 오른팔이었다.
“형님.”
가죽 소파에 앉아 있던 정웅철이 손에 든 신문을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들어 허리를 직각으로 숙인 성덕호를 봤다.
“수금을 간다더니 벌써 끝난 거야?”
“급히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중간에 들어왔습니다.”
“뭔데 그래?”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면서 성덕호가 용건을 이야기했다.
“압구정역 뒤편에 위치한 건물 있잖습니까?”
“그게 어쨌는데?”
“건물 소유주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정웅철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확실한 거야?”
“예. 이걸 보십시오.”
성덕호가 안주머니에서 여러 번 접힌 서류를 하나 꺼내 내밀었는데, 바로 해당 건물에 대한 등기부등본이었다.
쭉 내용을 훑어 본 정웅철은 어제 날짜로 소유권자 이름이 바뀌어 있는 걸 확인하고는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것들이!”
이제 조금만 더 압박을 가해서 가격을 10억 아래로 후려쳐서 건물을 집어삼키려는 찰나에 일에 차질이 생겼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건물을 매입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줘야지. 당장 애들을 보내서 현장을 점거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성덕호가 일어서려고 할 때 바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고함과 비명 그리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에 정웅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가 봐!”
“예.”
성덕호가 몸을 돌려 움직이려고 할 때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면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사내 한 명이 들어와 바닥에 엎어졌다.
아까 사장실로 들어올 때 성덕호한테 인사를 했던 부하 조직원이었다.
“이게 무슨……?”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손에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낀 백성균이 느린 걸음으로 들어왔다.
“네가 정웅철이냐?”
그러자 성덕호가 눈을 부라리면서 말을 받았다.
“너 이 자식 누가 보내서 왔어!”
“내가 먼저 질문을 한 것 같은데.”
“이게 여기가 어디라고!”
성덕호가 탁자에 있던 크리스털 재떨이를 한 손에 집어 들고는 성큼 앞으로 걸어가면서 휘둘렀다.
상체를 뒤로 젖혀서 여유롭게 공격을 피한 백성균의 오른쪽 주먹이 상대의 턱을 쳐올렸다.
퍼억!
“러고는 휘청대면서 뒷걸음질을 치는 성덕호의 가랑이 사이를 구둣발로 있는 힘껏 걷어찼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성덕호는 양손으로 사타구니를 움켜쥐고는 눈을 부릅뜬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죽어!”
뒤에 있던 정웅철이 고함을 내지르면서 어느새 챙겨 든 골프채를 손에 들고 그를 향해 휘둘렀다.
간발의 차이로 몸을 틀어서 피한 백성균은 지체 없이 정웅철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으윽.”
허리를 숙인 상대의 머리카락을 한쪽 손으로 움켜쥔 백성균은 그대로 얼굴에다가 무릎을 찍어 올렸다.
코가 부러졌는지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골프채를 떨어뜨리면서 뒤로 쓰러졌다.
두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백성균이 가볍게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임영식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 끝났습니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백성균은 머리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