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14
514
“사건을 유리한 상황에서 종결시키려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만 오히려 이게 악수惡手가 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자신에 찬 목소리에 그는 지석영 변호사가 뭔가 대책을 가지고 있는 걸 눈치채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봤다.
“어떻게 하려는 거요?”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면서 지석영 변호사가 옆에 놔둔 서류 가방에서 테블릿 PC를 하나 꺼냈다.
“이걸 한번 보시죠.”
“……?”
뜬금없는 행동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혁권은 일단 탁자에 올려놓은 테블릿 PC에 시선을 줬다.
지석영 변호사가 손가락으로 터치를 하자 영상이 하나 실행됐다.
화면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각도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인도와 왕복 4차선 일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오른쪽 위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해 보니 거의 자정에 가까운 늦은 밤이었다.
다행히 주변에 있는 가게들의 간판 조명이나 가로등 불빛 덕분에 사물을 식별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이걸로 뭘 하라는 건지 몰라 혁권이 슬쩍 지석영 변호사를 쳐다봤으나 그는 계속 보라는 듯 눈짓을 했다.
어쩔 수 없이 태블릿 PC로 다시 시선을 내린 혁권은 가끔씩 지나가는 차와 행인 들의 풍경만 나오고 있던 영상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카메라의 시야 바깥에서 급하게 뛰쳐나온 검은색 외제 승용차가 횡단보도 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택시 한 대가 옆 차선에 나란히 서는 것과 동시에 외제 승용차에서 젊은 사내 서너 명이 일제히 내려 택시 문을 억지로 열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화면에서 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몸짓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실랑이가 벌어지더니, 결국 반쯤 내려가 있던 차창 안으로 팔을 집어넣어 차 문의 잠금장치를 푼 사내가 택시 기사를 끌어내려 구타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혁권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들자 지석영 변호사가 하얀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이건…….”
“요즘은 일반 상점들도 방범용으로 CCTV를 한두 개씩 달아 놓는데, 보셨다시피 꽤 성능이 좋더군요. 경찰과 한울 법무 법인에서 미리 손을 써 택시에 달려 있던 블랙박스하고 교통 감시 카메라 영상을 없애 버렸지만, 미처 여기까지는 생각을 못 한 모양입니다. 뭐 덕분에 저희는 사건을 뒤집어 버릴 수 있는 결정적인 패를 쥐게 됐지요.”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누군지 얼굴을 충분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화질이 좋아서 확대를 해도 픽셀이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젊은 사내들한테 둘러싸인 채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는 모습에 누가 봐도 어느 쪽이 가해자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썩 유쾌한 영상은 아니었지만 이것보다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이 영상을 제출한다면 더 이상 이쪽에서 먼저 폭력을 가했다는 억지 주장을 펼칠 수 없을 겁니다.”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이면서 혁권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이걸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자신만만했군요. 쉽지 않았을 텐데 영상을 어떻게 찾아낸 거요?”
“그동안 사람들을 써서 주변에 있는 가게와 건물을 하나씩 모두 뒤져 CCTV를 확인했습니다.”
“역시.”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마주 앉아 있는 지석영 변호사를 보면서 말했다.
“영상은 바로 제출할 생각이오?”
“그렇습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된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영상을 증거로 제출하는 건 잠깐 보류하도록 하시오.”
“아니, 왜……?”
가능한 한 빨리 가해자가 누군지 바로 잡기를 원하던 혁권이었기에 지석영 변호사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이걸 써먹으면 사건을 유리하게 끌고 가는 걸로 끝이지 않소.”
“뭔가 다른 걸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몸을 뒤로 기대면서 그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알량한 권력을 앞세워서 사람들한테 횡포를 부리지 못하도록 만들어 줄 작정이오. 그러니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시오.”
“여당 2선 의원인 데다 차기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거론되는 거물인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이미 다 계획이 세워져 있으니 날 믿으시오.”
“…….”
지석영 변호사는 도통 그의 속내를 모르겠다는 듯 팔짱을 낀 자세로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가 폈다.
어차피 변호사라는 직업이 의뢰인의 의향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니만큼 그가 여기서 이러쿵저러쿵 해 봤자 별 쓸모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혁권의 태도가 어지간히 자신 있어 보이니 한번 믿어 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지요.”
지석영 변호사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혁권의 스마트폰이 작게 진동했다.
“잠시 실례하겠소.”
혁권은 지석영 변호사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곤 전화를 받았다.
-김 전무입니다, 사장님.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혁권의 물음에 김덕현 전무가 상당히 다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큰일 났습니다. 오늘 아침에 세무서 직원들이 들이닥쳐서 회사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갑자기 세무조사라니?”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면서 내뱉은 말에 마주 앉아 있던 지석영 변호사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세무조사를 받을 때가 아닌데 사전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벌어진 일이라 저도 어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보통은 조사 일주일 전에 미리 사전 통보를 해 주거나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정기 검사가 아닌 이상 솔 루시두스처럼 작은 회사는 면제를 해 주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불시에 세무조사가 실시된다는 건 누군가 뒤에서 손을 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압박을 한다 이거지.”
-뭐 때문인지 짐작되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눈치 빠른 김덕현 전무가 바로 그렇게 물어보자 혁권은 대강 말끝을 얼버무리며 스마트폰을 고쳐 쥐었다.
“전화로는 좀 그러니까 나중에 회사에서 만나 얘기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세무서에 꼬투리를 잡힐 만한 건 없겠지?”
-처음부터 회계 서류 정리를 철저히 해 뒀으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걸릴 만한 것이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해.”
-네. 그러겠습니다.
통화를 끝내자 지석영 변호사가 그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사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러자 혁권이 정색을 한 채 대답했다.
“저쪽에서 압박을 시작한 것 같소.”
“아까 세무조사가 나왔다고 하신 것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이 한쪽 뺨을 실룩이면서 말했다.
“사업을 접기 싫으면 고분고분 이야기를 들어라 이거 아니겠소.”
세무조사는 사업을 하는 사람한테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였기에 상당한 압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지석영 변호사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혁권은 이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는 입을 열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쪽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진실이 밝혀지면 가해자들을 확실히 처벌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볼일을 다 끝낸 지석영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을 나가자 그는 싸늘한 얼굴로 팔걸이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다음 날 아침.
평상시대로 일어나 등원登院할 준비를 하던 방준호 의원은 와이셔츠 소매 단추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하곤 미간을 찡그렸다.
“쯧.”
그는 혀를 차고서 옆에 있는 아내에게 짜증을 냈다.
“이게 뭐야? 단추 하나 떨어진 것도 제대로 관리 못 해?”
“어머. 죄송해요. 새로 산 건데 왜 그렇지?”
“이런 건 미리미리 확인해야지.”
쏘아붙이는 말투에 당황한 아내가 연신 미안하다고 했지만, 방준호 의원은 영 기분이 풀리질 않았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
그는 입었던 셔츠를 바로 벗어 던지고 아내가 갖다준 다른 것으로 갈아입었다.
값비싼 명품 넥타이를 목에 매고 윗도리까지 걸친 방준호 의원은 몸을 뒤로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종명이 놈 학교에 휴학계는 제출했어?”
그러자 아내가 그의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한 학기만 더 하면 졸업이고 많이 반성하는 것 같은데, 그냥 학교를 다 마치게 하고 유학을 보내면 안 돼요?”
눈썹을 찌푸린 방준호 의원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면서 화를 냈다.
“그놈이 사고 친 게 한두 번이야! 저번에도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해 놓고 한 달도 안 돼서 일을 저질렀잖아.”
“그래도…….”
성년이 되고도 철없이 설치는 아들놈도 그렇고 이렇게 상황 파악을 못 하고 투정이나 부리는 아내의 모습에 짜증이 난 방준호 의원은 얼굴을 구기면서 말했다.
“곧 있을 개각에 내가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거 알지? 이런 중요한 시기에 괜히 야당에 꼬투리를 잡힐 일이 생기면 그동안 쌓은 것이 한순간에 허사가 되는 걸 왜 몰라!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명색이 정치인 아내인데 그 정도는 생각을 하고 있어야지.”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은데 아침부터 아내까지 신경을 긁자 화가 난 방준호 의원은 인상을 쓰면서 방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당신이 안 하면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까. 알아서 해!”
대기하고 있던 국산 대형 승용차를 타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옆에 위치한 의원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방준호 의원은 화가 다 풀리지 않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의원 사무실로 들어가자 남녀 보좌진 네 명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나오셨습니까, 의원님.”
“별일 없지.”
한쪽 팔을 가볍게 들어 인사를 받으면서 방준호 의원이 말하자 오래전부터 그를 보필한 보좌관이 안쪽 방으로 따라 들어가며 대답했다.
“박성현 의원님이 이번에 새로 제출하는 법안에 서명을 해 달라고 서류를 보내왔습니다.”
“무슨 법안이라고 했지?”
윗도리를 단추를 풀고 소파에 앉으면서 묻자 보좌관이 얼른 대답했다.
“소비 활성화를 위해서 기존에 시행되고 있던 개별소비세 인하 기간을 2년 더 연장하는 내용입니다.”
“아, 이제 기억이 나는군.”
내수활성화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세금을 줄여서 매출 하락에 허덕이고 있는 자동차를 비롯한 가전업체들을 지원하는 성격이 강했다.
물론 소비자들이 보다 싼 가격에 필요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기업이 얻는 이득이 더 컸다.
법안에 이름을 올리는 대신 관련 업체에서 거액의 정치 후원금을 직원들 이름으로 쪼개서 보내 주기로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있었다.
“이번 회기에 제출할 거라고 그랬지?”
“그렇습니다.”
“그건가?”
“예.”
방준호 의원의 물음에 보좌관은 가지고 있던 서류철을 얼른 탁자에 내려놨다.
만년필로 종이에 사인을 한 방준호 의원은 탁 소리 나게 덮으면서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어딘지 기분이 나빠 보이는 태도에 보좌관은 서류철을 도로 가져가면서 조심히 물었다.
“의원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왜?”
한쪽 팔을 팔걸이에 괴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던 방준호 의원이 불퉁하게 되물었다.
“내 어디가 이상해 보이기라도 하나?”
“아뇨, 그저 평소와는 좀 다르신 것 같아서…….”
아무리 그래도 면전에서 대놓고 신경이 날카로워 보인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지라 보좌관이 슬쩍 말끝을 흐렸다.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아. 예.”
문득 생각났다는 듯 방준호 의원이 고개를 들면서 물었다.
“참. 종명이 놈 문제로 내가 지시했던 건 어떻게 됐어?”
“어제 해당 회사에 특별 세무조사가 실시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배 청장이 일을 제대로 해 줬구먼.”
“이미 경찰에서 이야기해 놓은 대로 수사를 마무리 짓고 검찰로 넘겼다고 하니까 사건이 곧 마무리될 겁니다.”
“그래야지.”
혹시라도 문제가 될까 봐 계속 신경이 쓰였던 방준호 의원은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살짝 마음을 내려놨다.
이대로 있다가 얼마 전 청와대 비서실에서 미리 언질을 받은 대로 개각改閣이 발표되면 행정안전부 장관직에 오를 준비를 차분히 하고 있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할 때, 의원실 직원 한 명이 노크도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의원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