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15
515
눈가를 찌푸린 방준호 의원이 질책을 하듯 말했지만 핏기가 사라져 얼굴이 하얗게 된 직원은 다급한 목소리로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지금 국회 정론관에서 야당 안기헌 의원이 기자들을 불러 놓고는 의원님이 여러 이익 단체와 기업 들로부터 받은 거액의 뇌물을 조세 회피 지역인 버진 아일랜드에 숨겨 놨다는 의혹을 폭로 중이라고 합니다.”
“뭐, 뭐야!”
제 귀를 의심하는 것처럼 말을 더듬은 방준호 의원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표정으로 숨을 헉 들이켰다.
함께 있던 보좌관도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직원을 보며 다그치듯 말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딴 의혹을 제기하는 거야!”
직원은 엉거주춤 서서 슬쩍 방준호 의원을 쳐다보고는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그게 진위 여부는 아직 확인을 못 했습니다만, 버진 아일랜드에 위치한 HSBC(Hongkong & Shanghai Banking Corp) 은행 지점에 의원님과 가족분들 명의로 된 계좌 거래 내역 사본을 증거로 공개했습니다.”
“끄으응.”
눈을 치켜뜬 방준호 의원이 얼굴을 구긴 채 낮게 침음을 내뱉자, 보좌관이 그걸 보고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안기헌 의원이 폭로한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가능하면 계좌 거래 내역 사본도 구해 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한 직원이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오래된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표정이 굳어 있던 방준호 의원이 소파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려치면서 말을 내뱉었다.
“대사大事를 앞두고 이게 뭔 일이야!”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정말로 돈을 주고받은 거래 내역 사본을 가지고 있다면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제길!”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방준호 의원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뇌물을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조세 회피처에 은밀히 계좌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들통 나게 생겼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폭로가 터진 시기 역시 너무나도 안 좋았다.
빨리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행정안전부 장관 자리가 날아가는 건 물론이고 그동안 쌓은 깨끗한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터였다.
이건 유권자들한테 표를 받아야지만 계속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정치인으로서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방준호 의원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말했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어. 어떻게 해서든 상황이 악화되는 걸 막아!”
“예.”
서두르듯 보좌관이 말을 이었다.
“그러려면 우선 문제가 된 버진 아일랜드 계좌부터 급히 정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폭로를 하자마자 손을 쓴다면 오히려 더 의혹을 사지 않겠어?”
“의심을 받기는 하겠지만 계좌가 의원님 소유라는 사실이 완전히 밝혀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잠시 고심을 한 방준호 의원은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군. 계좌를 없애 버린다면 더 이상 일이 커지는 걸 막고 근거 없는 정치 공작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야.”
“맞습니다.”
“좋아. 어서 그렇게 처리하도록 해.”
자리에서 일어난 보좌관이 서둘러 방을 나가자 혼자가 된 방준호 의원은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이를 부드득 갈았다.
초선인 데다 지역구도 없이 이렇다 할 정치 기반도 부족한 안기헌 의원 따위가, 청와대에 줄을 대고 있는 자신한테 칼을 들이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니, 그가 몰래 사용하는 비밀 계좌가 버진 아일랜드 은행에 있다는 걸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할 터였다.
결국 누군가 이번 폭로를 뒤에서 조종한 배후 세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곧 있을 선거를 앞두고 여당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는 야당 지도부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대통령 측근으로 정부에 합류하는 걸 막으려는 경쟁자들의 소행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
어찌 됐건 정치 인생이 걸린 위기인 건 분명했고, 방준호 의원은 이대로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단은 어떻게 해서든 상황이 더 크게 번지지 않도록 조기에 수습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안면이 있는 주요 언론사 데스크에 전화를 걸었다.
그날 오후 안기헌 의원의 폭로가 기사화되기는 했지만, 각 신문과 방송에 그리 크게 부각이 되지 않으면서 방준호 의원이 의도한 대로 일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SNS와 주요 포탈을 중심으로 방준호 의원이 비리 의혹이 우후죽순처럼 퍼지자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정치인들 다 더러운 줄은 알았지만 진짜 방준호까지 똑같은 놈일 줄이야!
-헬조선에 뭘 기대했냐?
-이제 이 나라에 희망 따윈 없음.
-호감도 1순위였던 것도 바닥으로 떨어지겠네.
-깨끗한 정치인은 개뿔.
-장관 후보까지 올라간 것도 여기저기 뇌물 줘서 얻은 결과일 게 뻔함.
-인상은 진짜 선해 보이던데.
-↑네 안목이 구린 듯.
-야, 근데 이런 큰 스캔들이 터졌는데 주요 언론사에서 입 다물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음?
스크롤을 쭉 내리면서 훑어본 결과 방준호 의원을 비난하는 댓글이 제일 많았고, 스캔들의 규모에 비해 기사가 많이 터지지 않는 것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는 말도 종종 눈에 띄었다.
혁권은 기대한 것과 같은 반응들에 흡족한 표정으로 태블릿 PC에서 시선을 떼었다.
“이쯤 되면 언론사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겠지.”
그러자 왼쪽 소파에 앉아 있던 백성균이 얼른 대답했다.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처음과 달리 제법 비중 있는 후속 기사들이 하나둘 올라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여기서 불이 더 활활 타오르도록 장작을 넣어 줘야지.”
혁권이 입술을 비틀어서 올리며 말했다.
“지석영 변호사에게 연락해.”
짧게 끊어지는 어조로 혁권이 말하자 백성균은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찾은 후에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그에게 건넸다.
연결음이 들리고 얼마 안 있어서 지석영 변호사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연락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혹시 저보고 증거 제출을 잠시 보류하라고 했던 것이 안기헌 의원의 폭로를 기다리느라 그러신 겁니까?
역시 눈치가 빠른 사람답게 이미 어떻게 된 건지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혁권은 한쪽 손에 스마트폰을 든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용건을 이야기했다.
“마침 뇌물 스캔들이 터져 방준호 의원이 흔들리고 있는 지금이 사건을 바로 잡을 적기인 것 같은데, 지 변호사의 생각은 어떻소?”
-아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도 없을 겁니다.
“그럼 바로 일을 진행하시오. 아 참. 그리고 이왕이면 상대가 또다시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기자들을 불러서 공개적으로 증거를 제출해 버리시오.”
-제대로 카운터펀치를 날리자, 이 말씀이군요.
지석영 변호사가 약간 웃는 투로 대답했다.
“당한 만큼 배로 갚아 줘야 되지 않겠소.”
-안기헌 의원의 폭로 때문에 가뜩이나 시끄러운 때에 CCTV 영상까지 공개되면 우리가 딱히 손을 안 대도 알아서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질 겁니다.
“정확히 그게 내가 바라는 바요.”
-그럼 조치를 취한 다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변호사와의 통화를 끝낸 혁권은 허벅지에 깍지를 낀 손을 올리고는 삐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모든 준비를 다 끝마치고 있던 지석영 변호사는 혁권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곧장 사건을 담당한 검사를 찾아가 확보해 둔 CCTV 영상을 증거물로 제출했다.
그와 동시에 평소 친분이 있던 기자들한테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고는 슬쩍 영상 복사본을 보내 줬다.
한창 뇌물 스캔들로 시끄러운 상황이었기에 장남이 폭력을 써서 사람을 때린 걸 방준호 의원이 권력을 이용해서 피해자한테 죄를 거꾸로 뒤집어씌우려 했다고 하자 기자들이 아귀 떼처럼 달려들어 기사를 쏟아 냈다.
이제는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국회의원의 뇌물 스캔들보다 사회적으로 약자인 택시 기사를 상대로 벌인 갑甲질에 국민들은 더욱 크게 분노했다.
주요 포털과 SNS에 비난 글이 폭주하는 건 물론이고 방준호 의원 사무실로 전화가 쇄도해 온갖 욕설을 퍼부어 대는 바람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따르릉! 따르릉!
“방준호 의원 사무실입니다.”
-야. 이 개자식들아! 할 짓이 없어서 그런 갑질을 하냐?
상대방이 다짜고짜 욕부터 쏟아 내자 여직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애써 차분하게 변명을 늘어놨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기사 내용하고 달리 그 사건은 아직 검찰에서 수사 중이고 저희 의원님께서는 일체 관여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지랄하고 있네. 너 같은 놈들은 부자가 나란히 수갑을 차고 교도소에 들어가서 평생을 섞어 봐야 돼!
그러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침부터 이런 식으로 다짜고짜 화를 내거나 욕설을 퍼붓는 전화가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였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도중에도 바로 옆에 앉은 동료의 책상에서 또 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울려 대는 전화 때문에 반쯤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인 것은 둘째치고, 무엇보다 업무가 완전히 마비 상태였다.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한 누군가가 차라리 몇 시간만이라도 전화선을 뽑아 놓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러다가 자칫 외부에서 걸려오는 중요한 연락을 못 받을 수도 있으니 다들 힘들어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어깨에 힘이 빠져 버렸다.
책상 앞에 앉아 쉬지도 않고 계속 걸려오는 항의 전화들을 하나하나 다 받아 주고 있으니, 마치 욕받이가 된 것만 같아 직원들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따르릉! 따르릉!
또다시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여직원이 경기를 일으키면서 바로 수화기를 집어 들지 못하고 있을 때, 돌덩이처럼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선임 보좌관이 더 이상 안 되겠는지 직원들을 둘러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전화 코드를 다 빼!”
쏟아지는 비난 전화에 질려 있던 직원들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화기 뒤에 연결되어 있는 코드를 모두 뽑아 버렸다.
정신없이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일시에 사라지자 사무실 안이 절간처럼 조용해졌다.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질린 얼굴을 한 직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의자 등받이에 힘없이 몸을 기대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나절도 안 돼서 거의 천여 통이 넘는 비난 전화를 받고 온갖 욕설을 다 들어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복도에 여전히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지?”
“예.”
뇌물 스캔들이 터진 첫날부터 굶주린 하이에나 떼처럼 기자들이 잔뜩 몰려와서는 의원사무실 앞 복도를 지키고 있었다.
장남인 방종명이 친구들과 도로에서 택시 기사를 집단으로 구타한 CCTV 영상이 공개되자 숫자가 더욱 늘어나서 이제는 바깥출입을 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오죽했으면 기자들 때문에 식사도 나가지 않고 배달을 시켜서 먹을 정도였다.
“당분간 전화선을 뽑아 놓고 연락은 각자 스마트폰을 이용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불편했지만 그래도 비난 전화에 계속 시달리는 것보단 나았기에 다들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의원님 개인 SNS하고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비방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지?”
보좌관의 물음에 담당 직원이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거기도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폐쇄를 해 놔.”
“알겠습니다.”
“난 잠깐 의원님을 뵙고 나올 테니까. 그동안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체크해 보고 있어.”
약간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직원들한테 지시를 내린 보좌관은 몸을 돌려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한쪽 손에 담배를 든 채 혼자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던 방준호 의원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탁자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인 걸 힐끗 쳐다본 보좌관은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론이 좋지가 않습니다.”
오전 내내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그도 듣고 있었기에 방준호 의원은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만들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지금은 시끄럽게 떠들어 대지만 곧 다른 일이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어버릴 거야. 냄비 근성이 어디 가겠어.”
“야당에서 검찰에 버진 아일랜드 계좌와 이번 사건에 대해서 정식으로 수사를 요구할 거라고 합니다.”
“그게 사실이야!”
방준호 의원이 눈을 부릅뜨면서 쳐다보자 보좌관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것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물어뜯는 야당의 행동에 방준호 의원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검찰 조사까지 시작된다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터였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어떻게 해야 될지 고심하고 있을 때 탁자에 올려 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우우우웅.
액정에 청와대 비서실장인 오천구의 번호가 떠있자 방준호 의원은 살짝 눈가를 찡그리다가 이내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오 실장이 어쩐 일이오?”
-요즘 주변이 꽤 시끄러운 것 같아서 전화를 했습니다.
“몇 가지 오해가 있지만 금방 해결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방 의원님 문제로 각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불길한 느낌에 방준호 의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안 그래도 국정 운영이 어려운데 각하의 심기를 어지럽혀 드려서 되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안행부 장관 건은 없던 일로 해야 될 것 같으니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이, 이보시오, 오 실장!”
다급하게 붙잡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급한 일이 있어서 오래 통화를 할 수 없군요. 이만 끊겠습니다.
“오 실장!”
황급히 스마트폰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크게 불러 봤지만 툭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액정 화면엔 ‘통화가 종료되었습니다.’라는 짧은 한 줄의 말밖에 남지 않았다.
처음 겪어 보는 굴욕에 방준호 의원은 신경질적으로 스마트폰을 던져 버리고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망할 아들놈이…… 결국 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다니!”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만약 눈앞에 제 아들이 있었더라면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법한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