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16
516
# 드라마 제작
짙은 어둠이 깔린 저녁, 인적이 끊긴 한강 다리 아래로 캐딜락 에스컬레이터 한 대가 전조등 불빛을 환하게 밝히면서 다가와 멈추어 섰다.
차 문을 열고 내린 혁권은 부하들을 남겨 두고는 고수부지 한쪽에 주차되어 있는 국산 중형차 조수석에 탔다.
“어서 오시오.”
심인성 팀장의 말에 그는 한쪽 손으로 구겨진 옷깃을 펴면서 입을 열었다.
“할 말이라는 것이 뭐요?”
바로 용건을 묻자 심인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다가 이내 정색을 하고는 말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복수가 됐으니 이제 그만 손을 뗐으면 좋겠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고개를 돌린 심인성이 혁권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방준호 의원 말이오.”
“…….”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심인성은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건 탓도 있으니 지금까지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이 이상 일을 크게 만들면 우리도 곤란하단 말이오.”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는 듯한 상대의 말에 혁권은 불쾌한 것처럼 찡그린 미간으로 답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라도 하겠다는 뜻입니까?”
“나도 두 사람 사이에 괜히 끼어들어서 간섭을 하긴 싫소. 하지만 문제는 윗분들이란 말이오. 그분들의 심기가 불편해져서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흘러나왔다간 꼼짝없이 우리가 움직이는 수밖에 없소.”
거기까지 들은 혁권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차갑게 변했다.
예전에 비해 위상이 많이 하락했다는 해도 여전히 무시 못 할 힘과 영향력을 가진 곳이 바로 국정원이었다.
국정원이 나선다면 방준호 의원을 상대하는 것하곤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담배를 한 개비 꺼낸 심인성이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켜자 차 안이 밝아졌다가 금방 다시 어두워졌다.
“피우겠소?”
그가 가볍게 머리를 흔들자 심인성은 담뱃갑을 안주머니에 넣고는 말을 계속했다.
“처음부터 CIA 말고 우리 쪽에 이야기를 하지 그랬소. 그러면 지금보다 원만하게 일이 해결됐을 텐데 말이오.”
CIA를 통해 버진 아일랜드에 숨겨져 있던 방준호 의원의 비밀 계좌 내역을 입수한 것까지 알고 있다는 걸 슬쩍 내비치면서 은근히 그를 압박했다.
혁권이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요?”
그러자 심인성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능청스럽게 말을 돌렸다.
“아쉬운 마음에 한 이야기니까 오해는 하지 마시오. 하지만 이번 일로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진 건 사실이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통령의 측근에 장관 후보자를 거꾸러뜨린 거니까, 여당은 물론이고 청와대까지 발칵 뒤집혔단 말이오.”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이 없는 그를 쳐다보면서 심인성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더 이상 일을 키워 봤자 좋을 것이 없으니 여기서 그만 마무리를 짓는 걸로 합시다.”
“방준호 의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심인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직 언론에 안 알려졌지만 안행부 장관 자리는 날아갔고 여당에서도 보호를 해 주지 않을 거요.”
뇌물과 갑질 스캔들이 커질 것 같자 도마뱀의 꼬리처럼 버려진 것이다.
매정해 보였지만 그게 정치판의 냉혹한 현실이었다.
성에 다 차지는 않아도 그 정도면 방준호 의원의 정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데다 무엇보다 국정원하고 척져서 득 될 것이 없었기에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방 의원의 아들 말고 나머지 가해자 두 명도 확실히 죗값을 치르게 해 준다면 제안을 받아들이죠.”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심인성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면서 웃었다.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요. 그리고 세무조사도 깔끔하게 처리해 줄 테니 신경 쓰지 마시오.”
나름 철저하게 대비를 해 뒀지만 그래도 혹시 또 몰랐기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더 할 말이 없다면 난 이만 가 보겠소.”
차 문을 열고 내린 혁권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힐끗 쳐다본 심인성은 반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껐다.
며칠 뒤 검찰에서 전격적으로 방준호 의원의 뇌물 스캔들에 대해 수사를 착수했고, 혁권의 아버지와 관련된 폭행 사건도 재조사에 들어갔다.
결정적인 증거인 CCTV 영상이 있었기에 사건의 진실은 금방 드러났다.
방준호 의원의 아들과 친구들은 오래지 않아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뀌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건 당시 음주 측정에서 가해자들의 혈중알코올농도가 만취에 해당하는 0.2% 이상이었다는 사실이 언론사를 통해 밝혀지면서 더욱 여론이 안 좋아졌다.
특히 음주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가해자 측 주장만 듣고 일방적으로 사건을 처리한 경찰에 대해서도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자 여론의 뭇매를 피하고 수사권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경찰의 기를 꺾으려는 의도로 검찰은 바로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서로까지 조사를 확대시켰다.
애초부터 무리하게 사건을 꾸민 거였기에 조금만 파고들자 곳곳에서 의도적으로 가해자를 조작한 증거들이 쏟아졌다.
이렇게 되자 가뜩이나 여론이 안 좋은 상황에서 자신들한테 불똥이 튀는 걸 두려워한 경찰 수뇌부는 즉각 이철성 강남경찰서장과 사건 조작에 가담한 인원들을 모두 대기 발령 시키고 자체 감사를 벌였다.
이런 가운데 심인성이 약속한 대로 솔 루시두스 한국 지사에 대한 특별세무조사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로 흐지부지 종료됐다.
며칠 뒤, 혁권은 서초동에 위치한 자택 응접실 소파에 앉아 대형 LED 텔레비전으로 소환장을 받고 검찰청에 출두하는 방준호 의원의 모습을 시청하고 있었다.
-의원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번 뇌물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해명하실 건가요?
-혐의를 인정하십니까!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물밀듯이 밀려드는 기자들의 고함과 물러나라고 외치는 수행원들의 목소리가 서로 겹치면서 검찰청 로비는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선 카메라맨들이 쉴 새 없이 플래시를 터트리며 셔터를 눌러 대고 있는 가운데, 방준호 의원은 검찰수사관과 수행원 들한테 둘러싸인 채 입술을 한 일자로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사이를 헤치고 나아갈 뿐이었다.
전에는 사내답게 시원한 웃음이라는 평을 받던 미소도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뒤였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약간 흐트러진 머리칼과 거칠해지는 피부가 꽤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검찰에 불려 가는 재벌가 회장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일종의 쇼겠지만, 그만큼 방준호 의원이 수세에 몰렸다는 증거였다.
-의원님! 의원님!
애타게 외치는 기자들을 뒤로하고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은 방준호 의원이 검찰청 안으로 사라지자, 화면은 현장을 떠나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아나운서의 얼굴을 비췄다.
-이번 방준호 의원의 비리 사건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실 전문가분을 모셨습니다…….
그 이상은 필요 없는 정보였기에 혁권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꺼 버렸다.
그러자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지석영 변호사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정기국회가 열려서 조사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설마 여당까지 검찰이 낸 체포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질 줄은 몰랐습니다.”
심인성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던 혁권은 그리 놀라울 것이 없다는 얼굴로 소파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여론이 안 좋으니 안고 가 봤자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겠지요.”
“도마뱀 꼬리 자르기라 이거군요.”
씁쓸한 얼굴로 지석영 변호사가 말하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국회의원한테는 현행범이 아닌 경우에는 회기 중에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불체포특권不逮捕特權이 있었다.
설사 회기 전에 체포가 되더라도 국회의 요구가 있다면 풀어 줘야 될 정도로 큰 특권이었다.
여당이 국회 의석을 과반수 차지하고 있었기에 항상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검찰에 낸 체포 동의안을 거부해 방탄 국회가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깨고 체포 동의안이 제출되자마자 별다른 마찰 없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 방준호 의원이 평소 친분이 있는 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도움을 구하고 국회에서 결백함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건 여당 지도부와 청와대에서 방준호 의원을 버리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인 방종명도 친구들과 함께 구속되어 있으니, 잘못하면 정말 부자가 나란히 구치소에 들어가는 일이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
“다 자업자득 아니겠소.”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작게 머리를 끄덕인 지석영 변호사는 자연스럽게 오늘 혁권을 찾아온 용건으로 넘어갔다.
“가해자 측에서 한울 법무 법인을 통해 합의를 제안해 왔습니다.”
그가 무릎에 양손을 올린 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며 지석영 변호사가 말을 계속 이었다.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치료비는 물론이고 보상까지 충분히 해 주겠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하고는 완전히 딴판이군요.”
“상황이 불리해졌다는 걸 아는 거죠. 여론이 안 좋기는 하지만 일단 합의가 되면 집행유예 정도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을 겁니다.”
“흥.”
혁권이 가소롭다는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반응이 좋지 않았지만 변호사로서 상대편의 제안을 알려 줄 의무가 있었기에 지석영은 그를 보며 말했다.
“저쪽에서 합의금으로 제안한 금액이 치료비를 포함해서 5천만 원입니다.”
일반적인 폭력 사건 합의금치고는 적지 않은 액수였지만 혁권의 성에 차지 않았다.
아니, 1억을 부른다고 해도 아버지한테 폭력을 가한 것도 부족해서 죄까지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놈들을 용서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 돈으로는 병실값도 안 되겠군.”
“합의를 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지석영 변호사의 물음에 그는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합의는 없으니까 죗값을 확실히 치를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한 번쯤 더 설득해 볼 수도 있었지만 혁권의 뜻이 확고하다는 걸 알기에 지석영 변호사는 두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검찰 조사가 마무리 단계라 늦어도 다음 주 안에는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갈 겁니다.”
“형량이 얼마나 나올 것 같소?”
“글쎄요. 판사의 판단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1년 이하의 징역이나 집행유예가 선고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전치 6주나 되는 중상을 입었는데 그것밖에 형량이 안 나온단 거요?”
“세 명 다 초범인 데다 외국과 달리 만취 상태였다는 것이 오히려 재판에서 이롭게 작용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증거를 조작하려고 한 것이 있어서 집행유예보다는 실형이 나올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쯧.”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법이 그랬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온실 속에서 곱게만 자라온 도련님들이라 교도소에 갇혀 몇 달을 보내는 건 지옥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겠군요.”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수고해 주시오.”
가볍게 악수를 나눈 지석영 변호사가 한쪽에 서 있던 하킴의 안내를 받아 밖으로 나가자 그는 다시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이 정도면 아버지가 당한 수모를 되갚아 줬다고 할 수는 있었다.
그렇게 애써 스스로를 자위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우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