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2
52
* 발레타 특급
지중해 특유의 코발트빛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 부두는 혼잡스러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자말이 구한 창고는 부두에서도 약간 외곽에 위치했는데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지 상당히 오래된 건물이었다.
승용차에서 내리자 미리 연락을 해 둔 관리인이 나와 자물쇠를 채워 둔 문을 열어 줬다.
끼이이익.
안으로 들어가자 어두컴컴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자말이 이야기한대로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는데 화물을 다 넣어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공간이 아주 넓었다.
“많이 낡았군.”
군데군데 세워진 벽돌 기둥을 보며 종일이 중얼거리자 옆에서 안내를 하던 관리인이 이야기를 했다.
“1910년에 세워진 겁니다. 2차 대전 때 이탈리아군의 공습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틴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지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요즘 지은 창고들 못지않게 아주 튼튼합니다.”
낡고 회칠이 벗겨진 모습이 보였지만 그동안 관리가 잘됐는지 건물은 괜찮은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가자 창고 왼편 펜스 너머로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제법 커다란 체육관 건물이 있었다.
“저기가 말씀드린 난민 수용소입니다.”
유심히 살펴보자 경찰차가 몇 대 세워져 있고 공터에는 행색이 남루한 난민들이 할 일 없이 서성거렸다.
“생각보다 통제가 느슨한 모양이군.”
“도망쳐 봤자 좁은 섬인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리고 여기서 간단한 검사를 받은 후에 난민 인정을 받으면 다른 유럽 국가로 갈 수 있으니 다들 꼼짝도 안 하고 여기서 죽치고 있는 거지요.”
하긴 자신이라도 중요한 심사를 앞두고 경거망동해서 일을 망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상황이 마냥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도 몰타 경찰보다 훨씬 많은 난민들을 수용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숫자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몇 곱절로 더 늘어나고 있었다.
당장 체육관만으로 부족해 공터에 대형 천막들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자칫 분위기가 바뀌면 언제든 감당 못 할 상황이 벌어질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건 둘째치더라도 바로 옆에 돈이 되는 물건이 잔뜩 쌓여 있으면 파리가 꼬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분간은 현지에서 경비원을 고용해 쓰고 첫 항해를 다녀오면서 트리폴리에 있는 인원 가운데 둘을 데려와 여길 지키도록 하자고.”
“알겠습니다.”
현재 혁권이 가장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자말과 그 부하들이었다.
조금 더 창고를 둘러본 뒤 바로 임대를 하기로 결정했다.
소유주를 만나 약간의 협상을 벌인 끝에 선금을 조금 더 주는 대신 월 2,500달러에 1년간 창고를 빌리기로 계약했다.
그리고 경비원도 네 명을 채용해 둘씩 짝을 지어 돌아가면서 창고를 지키도록 했다.
사흘 뒤 예정대로 밀가루와 휘발유를 가득 실은 화물선이 부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포세이돈 함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발레타 항구에 들어왔다.
“어머.”
크루즈 난간에 기대있던 젊은 여자가 포세이돈 함을 발견하고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게 뭐죠?”
“특이하게 생겼군요.”
“바다에 떠 있으니 배는 맞겠죠, 설마.”
마침 관광객을 실은 대형 크루즈가 어제부터 부두에 정박해 있는 상태였다.
승객들 대부분은 시내 관광에 한창일 때였지만, 그녀처럼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직까지 크루즈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이제부터 무엇을 할까 책자를 뒤적거리던 참이었다.
포세이돈 함의 뒷부분에 달린 커다란 동력기 같은 것이 풍차처럼 생겼다는 생각을 하며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양옆을 둘러보니 난간 주변은 물론이고 저 아래 부두에서도 어느새 구경꾼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녀는 미니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자신의 얼굴이 함께 나오도록 한껏 손을 뻗은 상태로 브이를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SNS에 올린 사진에 금방 추천수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이제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포세이돈 함을 다시 구경했다.
천천히 속력을 줄인 포세이돈 함은 바다가 아니라 그대로 육지 위로 올라와 부두 한쪽에 위치한 공터에 멈춰 섰다.
위이이잉.
바닥의 에어쿠션에서 바람이 빠지며 선체가 가라앉자 이내 앞쪽 화물 램프가 내려졌다.
미리 나와서 기다리던 혁권이 자말과 함께 다가가자 작업복을 입은 선원이 그를 알아보고는 차렷 자세로 경례를 했다.
머리를 끄덕인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영어로 말했다.
“케노스 함장은 어디에 있지?”
“함교에 계십니다. 안내해 드릴 테니 절 따라오십시오.”
“그래.”
좁은 통로를 따라 위로 올라가자 배를 움직이는 운항 장비들이 설치된 함교가 나왔다.
선원들한테 뭐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던 케노스 함장은 혁권이 들어오자 하던 걸 멈추고 앞으로 다가왔다.
“보스 오셨습니까?”
“오는 동안 별일은 없었지.”
“예.”
“이제 막 도착했는데 미안한 말이지만 바로 화물을 선적해서 오늘 밤 다시 출항했으면 하는데 가능하겠나?”
혁권의 말에 케노스 함장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연료와 보급품만 보충하면 언제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좋아. 그럼 화물을 선적할 준비를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잠시 뒤 지개차를 이용해서 밀가루 포대와 휘발유가 든 드럼통들이 포세이돈 함 화물칸으로 옮겨졌다.
전부 합쳐서 무려 500톤이나 됐는데 최대한 많은 화물을 실어 나르기 위해 적재 용량을 꽉 채웠다.
그와 동시에 연료와 항해에 필요한 물자 보충도 함께 이루어졌다.
서둘러 작업을 진행하느라 보급품과 화물들이 얽히고설켜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제노폰이 목에 핏대를 세운 채 고함을 질러 대며 감독을 했다.
“그쪽으로만 화물을 쌓으면 균형이 안 맞잖아. 배를 침몰시킬 작정이야!”
수시로 욕이 튀어 나왔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게 줄을 더 단단히 묶어. 운항 중에 풀어지면 어쩔 거야!”
“예.”
“으싸!”
인부뿐만 아니라 선원들까지 달려들어 쉬지 않고 움직인 덕분에 저녁쯤 되자 작업이 얼추 마무리가 됐다.
휘발유 드럼통 8개가 놓인 파레트Pallet를 마지막으로 선적이 모두 끝났을 때는 시계가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혁권은 함교에서 작업을 하느라 조명을 환하게 밝힌 부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업이 완료됐습니다.”
제노폰이 올라와 보고를 하자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옆에 선 케노스 함장을 보며 말했다.
“지금 출항하면 자정쯤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겠군.”
“얼추 그쯤 될 겁니다.”
“좋아. 바로 움직이지.”
“옛.”
짧게 대답한 케노스 함장은 몸을 돌려 함교에 있는 선원들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화물 램프 폐쇄하고 선체를 착수시키도록!”
“램프 폐쇄!”
그러자 선원들은 명령을 크게 복창하고는 일사불란하게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삐이이익.
항해등이 밝게 켜지고 화물 램프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에어쿠션으로 공기가 가득 들어갔다.
선체가 부상되자 포세이돈 함은 선미에 붙어 있는 세 대의 대형 덕트 프로펠러를 이용해 천천히 회전을 한 뒤 바다로 들어갔다.
촤아아아.
거센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포세이돈 함이 착수하자 케노스 함장은 방풍창으로 전방을 확인하며 말했다.
“출항!”
쿠르르릉.
방파제를 지나 외항으로 나온 포세이돈 함은 서서히 출력을 올리는가 싶더니 이내 최고 속력을 내며 날듯이 바다 위를 질주했다.
“엔진 출력 정상!”
“각부 이상 무.”
꼿꼿한 자세로 서서 보고를 받은 케노스 함장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는 다시 지시를 내렸다.
“목적지는 트리폴리다. 침로를 남동쪽으로 잡아.”
“남동쪽으로!”
복창과 함께 조타수가 손에 쥔 키를 돌렸다.
뒤편에 서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혁권은 바쁘게 움직이는 함교를 나와 갑판으로 나갔다.
밖에 나오자 만 마력에 달하는 엔진 5개가 힘차게 돌아가면서 내는 소리가 귀청을 시끄럽게 울렸다.
60노트에 이르는 고속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수면 위를 살짝 떠서 움직였기에 진동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대신 하얗게 피어 오른 물보라가 마치 비가 내리듯 쏟아져 그의 몸을 적셨다.
하지만 그는 함교로 돌아가지 않고 상갑판에 우뚝 서서 주위를 바라봤다.
칠흑같이 어두운 가운데 머리 위로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며 떠 있었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끼면서 혁권은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며 흥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정말 멋지군. 이제 트리폴리 암시장은 우리 것이나 마찬가지야!”
“맞습니다.”
웬만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자말도 약간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는 가운데 혁권은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며 어둠의 세계로 한발 더 들어섰다.
전날 오후 연락을 받은 압둘라흐만은 부하와 차량을 잔뜩 데리고 트리폴리에서 동쪽으로 5킬로미터쯤 떨어진 해안에 도착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사방이 어두웠다.
시가를 입에 문 압둘라흐만은 파도만 칠 뿐 고요한 해변을 바라보면서 연신 감탄성을 내뱉었다.
“공기부양정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역시 대단해.”
자신만만해하는 태도에 뭔가 방법을 찾아냈다는 건 눈치챘지만 이런 식으로 화물을 가져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지난번에 수송기를 이용한 것도 그렇고 역시 자신이 사람을 잘 봤다는 생각에 그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도착한다고 했지?”
압둘라흐만이 고개를 돌리며 묻자 약간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함단이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 하고는 대답했다.
“이제 곧 올 겁니다.”
“이거 조바심이 나는군.”
눈을 반짝이면서 압둘라흐만은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따라 잔뜩 낀 구름이 달빛을 가려 더욱 어두운 가운데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핫산이 한쪽 팔을 들어 바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수평선에 불빛이 보입니다!”
“어디?”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핫산이 가리킨 곳에 정말 작지만 선명한 불빛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함단이 들고 있던 위성 전화기 벨이 울렸다.
띠리리리.
“여보세요.”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보스!”
함단이 반색을 하는 가운데 혁권의 말이 이어졌다.
-이쪽 불빛이 보이나?
“방금 봤습니다.”
-그럼 신호를 올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위성 전화기를 든 채 함단이 팔을 좌우로 크게 흔들자 대기하던 하킴과 라미 등이 해변가에 쌓아 둔 나무 무더기에 불을 붙였다.
화르르륵!
미리 휘발유를 흠뻑 뿌려 둔 나무 무더기를 금방 활활 타오르면서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해안선을 망원경으로 살피던 혁권은 약속한 대로 불빛이 생겨나자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케노스 함장한테 말했다.
“저기가 상륙 지점이야.”
“확인했습니다.”
육지와 가까워지자 속력을 줄인 포세이돈 함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전투태세를 갖춘 채 해안으로 천천히 접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