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21
521
미소를 띤 얼굴로 혁권은 은신영이 내민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나눴다.
“우리와 함께하게 된 걸 환영합니다. 이렇게 직접 만나니 텔레비전으로 보던 것보다 더 아름다우신 것 같군요.”
“호호호. 칭찬으로 들을게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인사를 하고 있는데 문득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은신영의 어깨 너머로 소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흘겨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분위기에 맞춰 입은 빙그레 미소 짓고 있는데, 눈은 하나도 웃고 있지 않은 것이 절로 간담이 서늘했다.
혁권은 자연스럽게 악수를 하던 손을 빼고 은신영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도록 적절한 간격을 유지했다.
이런 것도 모른 채 정동식 이사는 새롭게 뽑은 직원들을 한 명씩 인사시켰다.
특A급 한우와 특수 부위들은 비싼 값을 하는지 입안에 넣으면 바로 사르르 녹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불판에 고기를 올려놓자마자 바로 없어질 정도였는데, 오죽했으면 직원들은 물론이고 소현을 비롯한 소속 연예인들도 젓가락을 놀리느라 바빴다.
술도 한 잔씩 들어가고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쯤 정동식 이사가 혁권의 눈치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흠흠. 다들 잠시 주목!”
한참 고기를 먹고 있던 사람들은 의아한 얼굴로 정동식 이사를 쳐다봤다.
“오늘 이렇게 모인 김에 중요한 발표를 하나 하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거지?”
“글쎄.”
“조용히 하고 들어 봐.”
웅성거림이 작게 퍼져 나가는 가운데 유일하게 소현만이 침착한 표정을 했다.
“대표님께서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냥 정 이사가 하도록 해요.”
자세를 바로 한 정동식 이사는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입을 뗐다.
“내년 2월 KBN에서 방송되는 아침 일일 드라마를 우리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에서 제작하게 됐습니다.”
“……!”
이야기를 듣자마자 모두 입을 크게 벌린 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우가 좋아지고 꽤 이름 있는 배우인 은신영하고 계약을 하는 등 회사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드라마 제작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정말로 우리 회사에서 드라마를 만든다는 거예요?”
윤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조심스럽게 묻자 상석에 있던 혁권이 정동식 이사 대신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이미 편성을 받았고 촬영할 작품 선정까지 다 끝난 상태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한 번 크게 술렁거렸다.
“저, 정말인가 봐.”
“언제 일을 그렇게까지 진행시킨 거지?”
기존 외주 제작사들도 붙잡기가 어려운 방송 편성을 받아 냈다고 하자, 다들 감탄과 함께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아직 확정이 된 건 아니지만, 여기 있는 은신영 씨가 여주인공을 맡고 소현 씨와 다른 소속 연예인들 모두 비중 있는 배역으로 출연을 하게 될 겁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에서 직접 제작하는 드라마이니 배역을 받는 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서히 상황을 파악한 은신영의 얼굴에 벅찬 기쁨이 떠올랐다.
배우로서 데뷔를 한 지 연차가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연만 전전할 뿐, 여주인공 역할은 한 번도 하지 못한 채 이대로 서서히 밀려나는 건 아닐까 남 몰래 불안해하고 있던 그녀로서는, 그야말로 정말 뜻밖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제가 여주인공이에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양볼을 감싸 쥔 은신영이 급기야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벅차올라 울먹거리기까지 하자 양옆에 있던 박보미와 윤세아가 황급히 그녀를 달랬다.
“이 언니 좀 봐, 무슨 이런 일로 울기까지 해요.”
“미, 미안해.”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겨우 충격에서 벗어난 듯 대번에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댔다.
“세상에, 드라마 제작이라니!”
“게다가 공중파에서요? 와, 진짜 이러다가 우리 진짜 대박 치는 거 아닌가 몰라.”
“어쩐지 대표님 능력이라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때 박보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상석에 앉아 있는 혁권을 보며 꾸벅 머리를 숙였다.
“대표님 저희들한테까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절대 실망을 시켜 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윤세아도 덩달아 몸을 일으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저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연기 공부를 할게요.”
은신영도 그렇고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행동에 혁권은 내심 살짝 당황스러웠다.
사실 드라마를 제작하게 된 건 처음부터 그의 의지였다기보다는 어쩌다 보니까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간 거였다.
그리고 거액을 투자하고 소속사 연예인들의 배역을 챙기는 것도 사귀고 있는 소현을 위한 일이었다.
순전히 사적인 계기로 시작한 일인데 이렇게까지 감사 인사를 받게 되자, 혁권은 어쩐지 굉장히 머쓱해짐과 동시에 책임감을 느꼈다.
안 그래도 무거운 어깨에 더욱 짐을 짊어지게 된 꼴이었지만, 진심으로 기뻐서 좋아하는 얼굴들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혁권은 기꺼운 마음으로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다들 잘해 주리라고 믿어요.”
흐뭇하게 주변을 둘러본 그는 술잔을 치켜들고 말했다.
“앞으로 만들 드라마가 대박이 나길 기대하면서, 자 건배할까요?”
“좋아요!”
“파이팅입니다, 여러분!”
“시청률 20%를 한번 찍어 보자고요.”
‘에이, 그건 너무했다.’, ‘아니다 꿈은 크게 꿔야 한다.’ 하면서 옥신각신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가 소리 높여 건배를 외쳤다.
드라마 제작 발표로 회식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고 다들 설레는 마음과 기대를 감추지 못한 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후식으로 나온 냉면까지 먹고 나자 다들 불뚝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면서 길었던 식사를 끝냈다.
“대표님, 2차는 노래방으로 가요!”
성격이 활발한 윤세아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서는 귀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자 혁권은 슬쩍 소현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다들 술을 꽤 마셨는데, 괜찮겠어요?”
“에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보미야, 안 그래?”
고개를 돌리면서 묻자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박보미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보세요, 괜찮다고 하잖아요.”
“저도 찬성이에요. 이렇게 먹었으니 노래라도 불러서 칼로리를 소비해야죠.”
은신영까지 은근슬쩍 끼어들며 말을 보태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한쪽에 서 있는 소현의 의견을 물었다.
“소현 씨는 어때요?”
“저도 좋아요.”
“그럼 노래방으로 갑시다.”
그러자 윤세아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우와. 내가 가자고 할 때는 머뭇거리시더니 소현이가 말을 하니까 바로 가자시네. 아무리 둘이 사귀는 사이라고 하지만, 대표님 너무하신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지 은신영이 큰 눈을 깜빡이면서 묻자 소현이 난감해할까 봐 그가 얼른 말을 끊으면서 나섰다.
“그럼 다들 일어납시다.”
혁권의 말에 모두들 자리를 정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구두를 신고 밖으로 나온 혁권이 카운터로 가자 고깃집 사장이 미소가 입에 걸린 채 계산서를 내밀었다.
“620만 원입니다.”
비싼 한우인 데다 소속 연예인들까지 합쳐서 이제 20명 가까이 되는 대식구이다 보니 적지 않은 가격이 나왔다.
순간 멈칫할 만한 액수였지만 혁권한테는 그리 부담스러운 돈은 아니었다.
“끝자리 7만 원은 빼 드렸습니다.”
고깃집 사장의 말에 그는 웃으면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다른 일반 카드들과 달리 색깔이 검었는데 VVIP 회원용으로 만들어진 한도 무제한의 블랙카드였다.
“할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일시불로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삑, 시원하게 신용카드를 긁는 소리가 나고 고깃집 사장이 영수증을 주면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십쇼.”
술자리에서 주정도 안 부리고 얌전하게 회식만 하고 돌아가는 단체 손님은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듯 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꽃피었다.
가게 앞까지 나와 인사하는 고깃집 사장님을 안으로 들여보내는 사이, 다들 신발을 찾아 신고 길가에 모이느라 한동안 입구가 북적거렸다.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벽 쪽에 달라붙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빨리 정리하고 2차 갑시다.’ 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소지품 잊어버리지 않게 조심해요!”
“그건 그렇고 우리 어디 간다고요?”
“노래방!”
와아, 하면서 제일 가까이에 있는 노래방으로 우르르 몰려가자 갑작스러운 단체 손님에 당황한 아르바이트생이 그들을 맞이했다.
“사람이 많으니까 제일 큰 방으로 줘요.”
다행히 고기 냄새는 풀풀 풍겨도 술에 떡이 되어 진상을 부리는 종류는 아닌 것 같았기에 안도한 기색이 역력한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일행을 커다란 룸으로 안내했다.
마른 목을 축일 탄산음료와 과자를 적당히 주문하고 대충 자리를 잡고 앉자 마이크가 제일 먼저 혁권의 앞에 놓였다.
“역시 스타트는 대표님이 끊으셔야죠~!”
“한 곡 부탁드립니다!”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직원들이 큰 소리를 내면서 부추기니, 옆에 있던 소속 연예인들도 덩달아 박수를 치고 그를 응원했다.
덕분에 사양하기가 힘들어진 혁권은 어깨를 으쓱거리곤 마이크를 들고 일어섰다.
정동식 이사가 노래방 책자를 내밀었지만 그가 필요 없다는 것처럼 손을 흔들고 번호를 딱딱 누르니 오오, 하고 감탄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익숙한 전주와 함께 록발라드의 멜로디가 흐르자 이상하게 박수 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막 탬버린을 들고 흥을 돋우려던 남자 직원 역시 생각했던 것하곤 다른 분위기에, 엉덩이를 어정쩡하게 든 포즈 그대로 어어, 하면서 멈춰 섰다.
한편 음악에 한껏 심취한 혁권은 주변에 흐르는 어색한 공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착 깔린 목소리로 첫 소절을 불렀다.
후렴구를 향해 달리면서 혁권의 열창 또한 절정을 향해 갔으나 폼을 잡느라 미간에 깊게 파인 주름만큼 직원들의 시름도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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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짝짝, 하고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박수와 팡파르 소리를 들으며 혁권이 감았던 눈을 뜨자 그제야 다들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음?”
혁권이 의문스러운 얼굴을 하니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정동식 이사가 먼저 박수를 치면서 이러났다.
“아, 하하, 역시 대표님~! 노래도 잘하십니다!”
“와아~!”
어쩐지 아까와는 달리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김빠진 환호성이었으나, 간만에 좋은 노래를 불렀다는 만족감에 혁권은 전혀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자, 그럼 누가 다음 타자야?”
“제가 할게요!”
윤세아가 비장한 얼굴로 손을 들고 나섰다.
바닥을 뚫고 지구 내핵까지 파고 들어간 듯한 분위기를 자기가 반드시 띄워 주겠다는 사명감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그, 그래, 세아 씨! 부탁해요.”
부탁한다는 말을 한다는 정동식 이사의 표정 역시 절실함이 느껴졌다.
‘너만이 희망이다.’
‘맡겨 줘요.’
입 하나 벙긋하지 않고 눈으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올림픽 성화 봉송을 하는 것보다 더한 긴장감으로 마이크를 주고받았다.
“갑니다~! 트와이스의 Cheer UP!”
“와아아!”
경쾌한 전주가 흐르자마자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함성이 터졌다.
그걸 보고 요즘 인기 있는 곡인가 보다, 하며 한가롭게 딴생각을 한 혁권은 어느새 옆에 가까이 와 있는 소현을 보고선 테이블 밑에서 슬쩍 손을 잡았다.
흥이 난 박보미와 김수나가 앞으로 나가서 아이돌이라도 되는 양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을 보는 눈이 아무도 없었다.
“재밌게 놀고 있어?”
그러자 소현은 아주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빠, 일만 하지 말고 나랑 클럽도 좀 같이 가고 그래요…….”
“응?”
무슨 뜻인지 몰라 혁권이 되물었지만, 소현은 애잔한 시선만 던질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