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68
568
# 121부대
모든 일정이 마무리된 후, 혁권은 주정화를 불러 말했다.
“그동안 수고했소. 통역도 매우 잘해 주더군.”
“아닙니다. 제 직업인 걸요.”
“그래도 능력에 따른 대가는 받아야 하지 않겠소.”
혁권이 등 뒤의 하킴에게 손가락을 튕기자 그가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원목 탁자에 놓았다.
“이건 약속했던 보수요.”
“감사합니다.”
받기로 했던 액수보다 더 많은 것 같았지만 주정화는 일부러 입에 담지 않고 얌전히 받아 챙겼다.
핸드백에 봉투를 넣는 모습을 보면서 혁권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하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함께 다니면서 보고 들었던 일들은 절대 발설해선 안 되오.”
“예. 애초부터 그런 약속이었으니까요.”
통역 능력보다 입이 무거운 사람인 것이 중요하다는 조건을 들었을 때부터 비밀을 지킬 각오는 단단히 되어 있었다.
“다행이군. 다음번에 또 중국어 통역이 필요한 때가 오면 부르도록 하겠소.”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보수가 후할뿐더러 이렇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서 대해 주는 신사적인 고용주는 찾기 힘들었다.
쓸데없이 입만 나불거리지 않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으니, 주정화의 입장에서는 혁권이 불러 준다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고개 숙여 인사한 주정화가 방을 나가자 혁권은 부하들과 함께 귀국할 준비를 했다.
어차피 짐은 거의 다 싸 놓은 터라 잠시 호텔 방을 정리하고 남겨 둔 물건이 있지 않은지 체크만 한 후 로비로 내려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호텔 현관에 대기하고 있는 벤츠 뒷좌석에 막 올라타려던 순간, 멀리서 공기를 찢는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꺄아아악!”
고개를 돌리자 웬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젊은 여자를 양쪽에서 붙잡은 채 억지로 승용차에 태우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백주 대낮에 그것도 최고급 호텔 정문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주변에 있던 호텔 직원은 물론이고 사람들까지 놀란 얼굴로 쳐다보기만 할 뿐 끼어들려고 하지 않았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워낙 강한 데다 선의를 베풀었다가 골치 아픈 일에 엮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거였다.
이맛살을 찡그리던 혁권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는 여자의 얼굴을 보곤 자신도 모르게 눈에 힘을 줬다.
바로 아까 전에 객실에서 헤어진 주정화였다.
옆에 있던 하킴도 그걸 봤는지 혁권을 돌아봤다.
“보스.”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아는 사람이 곤경에 처해 있는 걸 그냥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기에 혁권은 짧게 지시를 내렸다.
“가서 도와줘.”
“옛.”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하킴이 눈짓을 하자 양옆에 있던 백성균과 임영식이 빠른 걸음으로 뛰어갔다.
“아악. 이거 놔! 살려 주세요!”
“이 간나가 입 다물고 빨리 안 따라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면서 한 손으로 긴 머리채를 움켜쥔 사내가 주정화를 낡은 승용차 뒷좌석에 억지로 태우려는 순간 백성균의 주먹이 날아와 사내의 얼굴을 가격했다.
빠각!
몸을 비틀거리던 사내는 백성균이 이어서 내지른 발길질에 복부를 얻어맞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새끼들 뭐야!”
주정화의 반대편 팔을 잡고 있던 동료가 눈을 부라리면서 소리를 치는 것과 동시에 임영식의 주먹이 날아갔다.
몸을 틀어서 피한 상대는 팔을 뻗어 임영식의 가슴팍을 세게 쳤다.
“크흑.”
급소를 얻어맞은 임영식이 신음을 흘리면서 주춤 뒷걸음질을 치자 상대는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권총을 본 임영식이 몸을 움찔하는 것과 동시에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격발이 되지 않도록 권총 슬라이드를 한 손으로 움켜쥔 백성균이 단단한 팔꿈치로 상대의 턱을 있는 힘껏 올려쳤다.
상대가 휘청거리면서 간격이 벌어지자 백성균이 한쪽 팔을 잡아 뒤로 꺾어 버렸다.
“끄아아악!”
그러고는 상체를 앞으로 숙인 사내의 뒤통수를 다시 한 번 팔꿈치로 내려쳤다.
권총까지 꺼내 들었기 때문에 그는 약간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인정사정없이 상대를 제압해 버렸다.
깊은 숨을 내뱉고 호흡을 고른 백성균은 그제야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주정화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소?”
“아. 예.”
주정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겨우 힘겹게 일어섰다.
곁에 나동그라져 있던 하이힐을 주워 들고 절뚝거리는 꼴이 보아하니 반항하다가 발목이라도 접지른 것 같았다.
그녀는 엉망이 된 자신의 정장과 핸드백을 보면서 속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뜯기긴 했지만 어쨌든 약간의 찰과상 말고는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이자, 백성균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남자들을 구둣발로 슬쩍 밀면서 살핀 그는 상대가 들고 있던 권총을 집어서 얼른 허리에 찔러 넣으며 물었다.
“이놈들 누구요?”
단순히 지나가는 행인을 습격하는 강도가 권총을 들고 있을 리 없다.
여기가 무슨 빈민가 뒷골목도 아니고 북경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최고급 호텔 바로 앞인데, 질 나쁜 불량배가 어슬렁거릴 것 같지도 않아 물어본 말에 주정화는 입술을 달싹거릴 뿐 선뜻 답하지를 못했다.
그 난리를 피우고 호텔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기에 혁권은 주정화를 데리고 얼른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다른 방에서 주정화가 옷매무새를 고치고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혁권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됐나?”
“……예.”
주정화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거기에 앉아.”
빈자리에 앉은 그녀는 여전히 놀란 마음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그의 눈치를 봤다.
“강도는 아닌 것 같고. 아까 놈들이 호텔 앞에서 주정화 씨를 왜 납치하려고 한 거요?”
그러자 애써 차분한 표정으로 주정화가 말했다.
“도와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제 개인적 일입니다.”
“그래서 관심을 끊으라는 건가?”
“…….”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정화를 쳐다본 혁권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는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군.”
“…….”
“내가 단순히 걱정이 돼서 귀국까지 미룬 채 이러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지?”
“그럼 왜…….”
“내 비즈니스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이상 그쪽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건 묵고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야지.”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함께 일을 하면서 주정화의 입이 무겁다는 걸 알았으나 그렇다고 중요한 비즈니스가 앞두고 약간의 불안 요소라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주정화도 분위기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기가 죽은 얼굴로 말했다.
“절대 비밀을 함부로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냥 보내 주세요.”
“그러니까 더욱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해지는군. 정 이야기하기 싫다면 일이 끝날 때까지 모처에서 보호를 하고 있는 수밖에.”
“사장님!”
반발하는 주정화를 혁권이 손을 들어 막았다.
“대신 내가 데리고 있는 동안엔 계속 업무 중인 것으로 쳐서 일당을 계산해 주겠어. 금전적인 손해는 보지 않을 거야.”
그냥 붙잡아 둘 수도 있지만 그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 데다 지금까지 통역 일을 성의껏 해 주었으므로 혁권도 나름대로 배려를 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군말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에 주정화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초조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던 그녀는 곧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체념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실은…….”
“뭐 할 말이라도 있나?”
“딱 한 가지 말씀드리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아니, 줄곧 속이고 있었어요.”
눈을 가늘게 뜬 채 가만히 쳐다보자 주정화가 힘없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사실은 조선족이 아니고 북한 출신입니다.”
“……!”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썹 끝을 치켜 올렸다.
“나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가?”
“그, 그건 절대 아닙니다.”
주정화가 양팔을 흔들면서 부정했지만 혁권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탈북을 했는데, 중국 공안한테 체포되지 않기 위해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서 조선족인 척한 겁니다. 결코 나쁜 목적을 가지고 사장님한테 접근한 것이 아닙니다.”
“흐음.”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북한을 탈출해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중국 전역을 떠도는 북한 주민이 수십만 명에 달한다는 건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아주 말이 안 되지는 않았다.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고 호텔 앞에서 납치를 하려던 놈들의 정체가 뭔지 이야기를 해 봐.”
“북한 국가보위성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국가보위성이라고?”
“……네.”
말을 들은 혁권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국가안전보위성國家安全保衛省이 정식 명칭으로 김씨 독재체제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비밀경찰 기구였다.
주민들의 사상 동향을 감시하고 반체제 사범 색출과 대간첩 업무 및 해외 공작까지 광범위한 일들을 했다.
최근에 와서는 탈북자가 대거 늘어나자 이들을 체포해 북한으로 압송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
팔짱을 낀 채 혁권은 여전히 의구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북한 국가보위성 요원들이 그쪽을 잡아가려고 했다, 이거야?”
“그렇습니다.”
“아무리 북한 국가보위성의 활동을 중국 정부가 묵인해 주고 있다지만 시내 한복판, 그것도 외국인들이 많은 최고급 호텔 앞에서 겨우 탈북자 한 명을 잡으려고 권총까지 꺼내 들고 납치를 시도했다는 걸 날 보고 믿으라는 거야?”
자칫하면 중국과 북한 양국 간에 심각한 외교 마찰까지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의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했다.
“중국 정부하고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데려갈 정도로 주정화 씨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건가?”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그럼 뭐야?”
추궁하듯 쳐다보자 주정화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절 데리고 가서 친오빠를 잡는 미끼로 쓰려는 겁니다.”
또 다른 변수의 등장에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해 봐.”
“미림군사대학을 졸업한 오빠가 121부대 소속으로 선양에 파견을 나와 있었는데, 얼마 전에 무단 탈영을 했습니다.”
“121부대가 뭘 하는 곳인데 중국에 있었던 거야?”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산하에 있는 해커 부대입니다.”
“지금 해커 부대라고 했어?”
깜짝 놀라 되묻자 주정화가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차분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보위부도 골치가 아픈데 해커 부대라니 혁권은 머리를 지끈거렸다.
“갈수록 태산이군.”
“죄송합니다.”
그녀가 잘못한 건 아니었지만 주정화는 죄인처럼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중국에 나와 외화벌이는 물론이고 해킹을 통해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르고 있었기에, 북한 당국이 혈안이 되어 잡으려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됐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냥 내버려 뒀을 때 주정화가 북한 보위부 요원들한테 끌려가는 건 시간문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럴 경우에 어떤 고초를 겪게 될지 불을 보듯 뻔히 보이는 데다 무엇보다 자신의 비밀이 북한 측에 알려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뒤에 중국 고위 인사가 있는 만큼 당장 방해 같은 건 하지 않겠지만, 이걸 가지고 나중에라도 약점으로 잡을 수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꼬투리가 잡힐 수 있는 건 남겨 두지 않는 것이 나았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혁권은 정색을 한 채 입을 열었다.
“그러면 더욱 일이 끝날 때까지 내 관리하에 있어야 되겠소.”
“그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