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73
573
혁권의 눈짓을 받은 하킴이 돈 가방을 다 옮기고 바깥에 서 있던 백성균을 시켜 순찰차에 있던 태블릿을 가지고 왔다.
“자, USB에 걸려 있는 암호를 풀어 주시지.”
USB를 꽂은 태블릿을 오백천에게 내밀며 말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오백천은 소매로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 내고는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으로 USB 드라이브를 터치하자 바로 암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가 액정에 떴다.
잠시 머뭇거린 오백천은 이내 숨을 들이마시고는 8 자리로 된 암호를 쳐 넣었다.
마지막 숫자를 누르자마자 화면이 바뀌면서 USB 안의 내용물이 드러났다.
빼앗듯이 태블릿을 가져간 혁권은 그 자리에서 비트코인을 미리 만들어 둔 다른 계좌로 옮겼다.
잠시 뒤 거래 체결 메시지가 뜨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비트코인도 넘겼으니까 이제 날 풀어 주시오.”
“약속을 했으니까 죽이지 않고 살려 주도록 하지.”
눈짓을 하자 하킴이 권총을 오백천의 머리에서 뗐다.
약속은 받았지만 꼭 지켜야 될 이유는 없었기에 불안해하던 오백천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블릿을 백성균한테 넘겨준 혁권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복귀를 한다고 해도 그 목이 얼마나 붙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요령껏 잘해 보라고.”
출혈 부위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던 까무잡잡한 오백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혁권의 말처럼 이대로 평양에 간다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주석궁 금고에 들어갈 충성의 자금을 몽땅 다 빼앗겼으니, 이건 변명의 여지도 없이 바로 총살감이었다.
일을 무마시키려고 해도 지난번과 달리 시간이 너무 촉박한 데다 무엇보다 액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뇌물로 상납할 돈까지 잃어버렸기에 뒤를 봐주기로 한 인민무력부 부부장한테도 기대기가 어려웠다.
아니, 상황을 알게 되면 자신이 살기 위해서 관계를 끊고 제일 먼저 안면을 몰수할 것이 분명했다.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처벌을 받으러 평양에 들어갈 만큼의 충성심은 없었기에, 결국 오백천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바로 일이 잘못된 걸 평양에서 알기 전에 살길을 찾아 도망치는 거였다.
딱딱하게 얼굴이 굳어진 오백천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리고는 벤츠에서 내린 혁권은 하킴과 함께 뒤에 세워져 있는 순찰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시각.
칠보산 호텔 6층에 위치한 객실에서는 121부대 해커들이 평상시와 똑같이 해킹과 불법 프로그램 제작을 통한 외화벌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침대와 테이블 같은 원래 호텔 방에 있어야 할 가구들은 모조리 다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객실을 채우고 있는 건 철제 책상에 주르륵 늘어선 모니터, 그리고 팬 돌아가는 소리를 내는 컴퓨터 본체들뿐이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기계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서은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모니터 너머로 주위를 살폈다.
동료들은 다들 제 할 일을 하느라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고, 이들을 감시하는 군관이 등 뒤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지만,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서은하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위로 비죽 튀어나온 머리통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잠시 아무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그녀는 제발 자연스럽게 보이기만을 기도하며 조심스런 손짓으로 주정화에게서 받은 USB를 꺼냈다.
모니터에 연결 화면이 뜨자 일단 첫 번째 관문은 넘었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올 뻔했다.
서은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마우스를 움직여 미리 찾아 놓은 자료 파일을 USB로 옮겼다.
조금씩 올라가는 퍼센테이지를 보면서 그녀는 속으로 빨리,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속을 새카맣게 태우면서 초조하게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속이 덜컥 내려앉았다.
“은하 동무, 밥 먹으러 내려갑시다.”
황급히 복사 창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동료가 고개를 쑥 들이밀며 말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다.
“이것만 끝내고 갈게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일생일대의 연기력을 발휘해 침착한 표정을 지은 서은하가 그리 대꾸하자 동료가 귀찮다는 얼굴을 했다.
“오래 걸리오?”
“아뇨, 몇 분이면 돼요. 중간에 일어나기가 좀 그래서…….”
항상 자기가 맡은 일은 반드시 다 끝내 놓고 자리를 비우라는 지침이 있었기에, 서은하의 행동은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테니 얼른 정리하고 오시오.”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인 서은하는 멀어지는 동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내렸다.
자기도 모르게 긴장해서 힘을 주고 있었는지 마우스를 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풀면서 아래로 내려놓았던 창을 다시 띄웠다.
아직 절반 밖에 파일이 옮겨지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느리고 시간이 안 가는지 입안이 바싹 말랐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 얼마쯤 있었을까 마침내 전송이 모두 다 끝나자 서은하는 누가 볼세라 얼른 USB를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왔어.”
임영식의 말에 로비 소파에 앉아 있던 지병하가 손에 든 신문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막 남자 동료 두 명과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북한 식당 쪽으로 걸어가는 서은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자연스럽게 서은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평일인 데다 점심시간도 지나서 그런지 다행히 북한 식당으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본 임영식과 지병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거리를 좁히면서 앞서가는 상대를 불렀다.
“어이!”
상대가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은 어느새 빼 들고 있던 전기 충격기를 몸에 갖다 댔다.
지지지직.
“끄아악.”
“허억!”
수만 볼트의 전기에 순간적으로 노출된 상대는 눈을 부릅뜬 채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입에 거품을 문 채 통나무처럼 복도에 쓰러졌다.
삽시간에 제압을 끝낸 임영식은 깜짝 놀라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서은하를 보며 말했다.
“주성철 씨가 보내서 왔습니다 물건은 가지고 있습니까?”
“예. 옛.”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면서 서은하가 대답하자 임영식은 머리를 끄덕였다.
“밖에 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갑시다.”
그러자 서은하가 바로 발걸음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동료들을 쳐다봤다.
“저 사람들은 죽은 건가요?”
서로서로 감시하는 사이였지만 그래도 한솥밥은 먹고 지낸 동료여서 그런지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단순히 기절한 것뿐이니까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예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는 서은하를 보며 임영식이 다시 한 번 재촉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까 이제 갑시다.”
“예.”
머리를 끄덕인 서은하는 얼른 두 사람을 따라 움직였다.
로비에는 중국인으로 보이는 손님 몇 명만 있을 뿐 한적했는데, 안내데스크에 서 있던 보위부 대원이 세 사람한테 시선을 줬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으나 서은하는 눈을 피한 채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통유리로 된 입구에 거의 다 왔을 때 회색 정장을 입은 보위부 대원이 투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잠깐만!”
창백해진 서은하가 그 자리에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옆의 임영식이 보니 낯빛이 파리한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이 상태로는 누가 봐도 의심을 살 만한 모양새였기에 대신 임영식이 뒤를 돌아서 대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짧은 중국어로 그리 말하자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보위부 대원이 임영식과 지병하를 번갈아 보았다.
서은하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였고, 임영식이 그녀를 슬쩍 가리듯이 선 자세였는데 옆으로 내려온 머리칼 덕분에 표정은 가까스로 감출 수 있었으나, 자연스럽게 넘어가기엔 이미 그른 듯했다.
“거기 있는 여성 동무, 잠깐 나 좀 봅시다.”
오랫동안 호텔에서 머물며 얼굴을 마주쳤기에 아무래도 보위부 대원이 서은하를 알아본 것 같았다.
일촉즉발의 순간, 커다란 폭음이 울리면서 로비 한쪽에 있는 기계실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꽈앙!
만약을 대비해서 몰래 설치해 둔 시한폭탄을 지병하가 주머니 속에 넣어 둔 구형 폴더폰으로 전화를 걸어 몰래 터트린 거였다.
“꺄아아악!”
“뭐, 뭐야!”
따르르르릉~!
시끄럽게 고막을 때리는 비상벨과 비명에 로비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보위부 대원 역시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돌리자 임영식이 틈을 놓치지 않고 주먹으로 상대의 관자놀이를 세게 가격했다.
뻑!
“으윽.”
급소를 제대로 얻어맞은 보위부 대원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임영식이 서은하의 손을 잡아끌면서 외쳤다.
“뛰어요, 빨리!”
난데없이 벌어진 소동에 서은하는 뭐가 뭔지도 몰랐지만 일단 임영식이 말하는 대로 곧장 앞을 향해 달음박질 쳤다.
줄곧 책상 앞에서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던 탓인지 자꾸만 발이 꼬여 넘어지려고 할 때마다 임영식과 지병하가 양옆에서 도와주었다.
호텔 건물 밖으로 나오자 흰색 미니밴이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를 내면서 세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여기야! 어서 타.”
옆문을 열며 얼굴을 보인 주성철이 다급하게 소리를 치자 세 사람은 얼른 미니밴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알아바디가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는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부아아앙!
그러자 거친 엔진음을 토해 내면서 미니밴이 호텔 입구를 벗어나 대로로 나갔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승용차하고 부딪칠 뻔했지만 알아바디는 능숙하게 운전대를 끝까지 옆으로 돌려 범퍼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피해 갔다.
끼이이익.
타이어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면서 크게 휘청거린 미니밴 안에 고무 타는 냄새가 온통 진동했다.
운전대를 풀며 다시 한번 가속페달을 꽉 밟자 미니밴은 앞으로 뻗은 도로를 빠르게 내달렸다.
일단 호텔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자 옆문 쪽에 앉아 있던 주성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서은하를 꼭 안아 줬다.
“고생했어.”
“아니에요. 저보다는 성철 씨가 더 힘들었지요.”
연인의 품에 안겨 벅찬 상봉의 기쁨을 누리는 서은하의 목소리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 바로 옆자리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주정화가 크흠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저기, 만나서 좋은 건 알겠는데 나중에 둘만 있을 때 하지?”
그제야 상황도 장소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이 황급히 떨어졌다.
주성철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고, 서은하는 부끄러워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지만 꼭 부여잡은 손만은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히 헛기침하며 주성철은 얼른 화제를 바꿨다.
“내가 이야기한 건 가지고 왔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서은하가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자 주성철은 눈을 반짝였다.
“잘했어. 이게 우릴 살리는 생명줄이 되어 줄 거야.”
USB 안에는 121부대가 칠보산 호텔을 거점으로 해서 그동안 벌였던 온갖 불법적인 일들에 대한 증거 자료가 들어 있었다.
컴퓨터를 이용한 범죄의 특성상 범인이 누구라고 특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으나, 이것만 있으면 북한 정권이 한 짓이라는 걸 명백하게 밝힐 수 있었다.
때문에 해킹을 통한 북한 정권의 외화벌이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추악한 민낯을 전 세계에 까발릴 수 있는 열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