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72
572
다음 날.
“평양에 도착하면 직접 뵙고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도청이 어렵도록 비화기祕話機가 설치된 수화기를 내려놓은 오백천은 의자에 앉은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
평소하던 것보다 더 많은 뇌물을 상납하게 됐지만 일단 상황이 더 커지지 않도록 윗선에서 막아 주기로 이야기가 됐다.
이걸로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는데, 이제는 달아난 주성철을 하루라도 빨리 붙잡는 일만 남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면서 심복인 박재남 대위가 한쪽 손에 검은색 가방을 하나 쥔 채 안으로 들어왔다.
“소좌님,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어디 봐.”
책상에 가방을 올리고 잠금장치를 풀자 100달러짜리 신권 뭉치가 가득 들어 있었다.
“모두 80만 달러입니다.”
“금고 안에 있는 것까지 합치면 딱 1천만 달러군.”
“그렇습니다.”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며 오백천 소좌가 말했다.
“지금이 10시니까 평양에 도착하면 늦은 밤이 되겠군.”
“옮겨야 될 돈이 많은데, 호위 병력을 조금 더 데려가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여섯이면 돼. 동행이 너무 많으면 괜히 이목만 끌 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적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본인이 극구 싫다는 데야 억지로 호위 병력을 붙여 줄 방법이 없었다.
“지금 바로 출발할 테니까 금고에서 돈을 꺼내 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박재남은 방 한쪽에 있는 금고를 열고 보스턴백에 돈다발들을 옮겼다.
위안화와 유로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이 미국 달러였다.
미국을 주적으로 여기며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북한 정권은 물론이고 고위층들까지 달러에 목을 매니, 정말 아니러니한 일이었다.
금고를 거의 다 비웠을 즈음에는 돈으로 꽉 찬 보스턴백이 세 개나 나올 정도로 꽤 많은 양이었다.
그가 그러고 있는 동안 오백천 소좌는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내 책상 서랍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안에는 만년필을 비롯한 필기구와 파일에 담긴 서류 들이 몇 개 있었으나, 그의 목적은 안쪽 제일 깊은 구석에 숨겨져 있는 USB였다.
USB에는 이번에 상납해야 될 충성의 자금 가운데 미처 현금화시키지 못한 수백만 달러의 값어치를 가진 비트 코인이 들어 있었다.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USB를 꺼낸 오백천 소좌는 혹시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칠보산 호텔 맞은편 건물 옥상에 있던 알아바디는 쌍안경을 눈에서 떼고는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봤다.
큰길을 사이에 두고 바로 코앞에 위치해 있어서 주변 상황을 한눈에 다 살펴볼 수 있었는데, 이른 새벽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간이 상당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오백천 소좌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약간 초조해졌다.
혹시나 다른 쪽으로 나갔거나 정보가 잘못된 건 아닌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젠장. 나오려면 빨리 모습을 보일 것이지 더럽게 애를 태우네.”
혼잣말을 내뱉고는 다시 쌍안경으로 호텔 입구를 감시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알아바디는 무엇가를 발견하곤 눈을 번득였다.
바로 검은색 승용차 두 대가 로비 앞으로 와서 멈춰 서더니 오백천 소좌가 부하들과 함께 호텔에서 나와 트렁크에 묵직한 가방을 여러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가방을 실은 승용차 뒷좌석에 오백천 소좌가 타자 곧장 호텔을 떠났다.
그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지켜본 알아바디는 쌍안경을 아래로 내리면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빙고. 제대로 걸려들었군.”
알아바디는 지체없이 주머니에서 선불폰을 꺼내 엄지손가락으로 번호를 눌렀다.
-말해.
“방금 오백천이 물건을 실고 칠보산 호텔을 떠났습니다. 보스. 차량 두 대에 호위는 운전사까지 합쳐서 여섯이고 놈이 탄 승용차는 외교관 번호판이 달린 벤츠입니다.”
-수고했어. 대기하고 있다가 이쪽 작업이 끝나면 계획대로 움직이도록 해.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알아바디는 주변을 깨끗이 정리해 흔적을 지우고는 녹이 잔뜩 슬어 있는 철문을 열고 옥상에서 내려갔다.
선양 단둥간 고속도로 톨게이트 한쪽에 세워져 있는 차량 뒷좌석에 탄 혁권이 구형 폴더폰을 귀에서 떼고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목표가 움직였다니까 다들 준비를 하고 있어. 외교관 번호판을 단 벤츠 승용차야.”
“옛.”
몸을 뒤로 돌리면서 대답한 백성균은 평소와 다른 옷을 입고 있었는데 바로 중국 공안 제복이었다.
백성균뿐만 아니라 다른 부하들은 물론이고 혁권도 공안 복장을 하고 있었고 탑승한 차량도 중국 공안 순찰차였다.
무릎에 올려 두었던 모자를 깊게 눌러쓴 혁권은 잠시 후를 기다리면서 눈꺼풀 아래로 예리한 눈동자를 감췄다.
평일 낮인 데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고속도로는 한적하니 차량 통행이 거의 없었다.
그 덕분에 오백천 소좌가 탄 차량 행렬은 제한 속도를 한참 넘겨 쭉 뻗은 고속도로를 빠르게 내달렸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운전대를 잡고 있던 사내가 힐끗 백미러를 쳐다보고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입을 열었다.
“소좌 동지.”
“무슨 일이야?”
팔짱을 낀 채 뒷좌석에 앉아 있던 오백천 소좌가 퉁명스럽게 묻자 운전수가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공안 순찰차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습니다.”
“뭐야?”
고개를 돌리자 정말 뒷유리창 너머로 공안 순찰차가 경관등을 켠 채 따라오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야!”
“아무래도 속도를 위반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거 같습니다.”
“바쁜데 별게 다 귀찮게 만드는군.”
“갓길로 서라고 신호를 보내는데 어떻게 할까요?”
인상을 쓰며 오백천 소좌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당히 몇십 달러 쥐여 보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중국 내에서 상당한 위세를 자랑하는 공안公安은 외교관 차량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는 데다 괜히 꼬투리를 잡아 귀찮게 하면 한도 끝도 없었기에 적당히 뇌물을 찔러 주고 가는 것이 제일 좋았다.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꾼 벤츠가 호위 차량과 함께 갓길로 빠져 천천히 속도를 줄이면서 멈추자 공안 순찰차도 약간 거리를 두고 섰다.
공안으로 위장한 혁권과 부하들이 천천히 다가갔다.
운전석 옆으로 걸어간 혁권이 연습한 중국말을 크게 외쳤다.
“다들 내려!”
그러자 벤츠 운전수가 혼자 차 문을 열고 내려서는 10달러짜리 지폐 세 장을 접어 앞으로 내밀면서 능숙하게 중국 말을 했다.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러니 한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뒷좌석에 혼자 앉아 있는 오백천 소좌를 본 혁권은 고개를 들며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하긴 평양까지 가려면 시간이 촉박하겠지.”
“……!”
혁권의 입에서 나온 한국말에 운전수가 눈을 부릅뜨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총성이 터졌다.
타앙!
“으윽.”
피가 튀며 가슴에 총을 맞은 운전수가 옆으로 쓰러졌다.
조수석에 탄 사내가 화들짝 놀라 윗저고리 안에 있는 권총을 빼 들려고 했지만 혁권이 더 빨랐다.
타탕! 탕!
총탄이 목과 심장을 관통하자 사내는 피를 분수처럼 뿜으면서 시트에 앉은 채 힘없이 축 늘어졌다.
앞쪽 호위 차량에 있던 인원들도 방심하고 있다가 제대로 대응조차 못 해 보고 백성균과 라미가 난사한 총탄에 벌집이 되어 버렸다.
어느새 차 문을 열고 들어간 하킴이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오백천 소좌의 관자놀이에 차가운 총구를 들이댔다.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을 거야.”
“이익.”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아 붙이며 오백천이 분노를 드러냈지만, 섣불리 반항을 하지 못하고 몸에서 힘을 뺐다.
“저쪽은 깔끔하게 다 처리했습니다.”
백성균의 말에 혁권은 권총을 허리에 차고 있는 홀더에 집어넣으면서 지시를 내렸다.
“시체를 치우고 트렁크에 있는 돈 가방을 옮겨 싣도록 해.”
“예.”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한 백성균은 라미와 함께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는 운전수를 앞뒤로 들어서 호위 차량에 아무렇게나 우겨 넣었다.
그러고는 벤츠 승용차 트렁크에 실려 있던 돈 가방을 꺼내 자신들이 타고 온 공안 순찰차로 가져갔다.
혁권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빠른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다른 차들을 흘긋 바라보았다.
여러 대의 차량이 갓길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혹시 차라도 고장 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일 뿐 굳이 관심을 두려고 하진 않는다.
덕분에 여유롭게 일을 처리한 혁권은 차 문을 열고 오백천의 옆에 앉았다.
당연히 하킴의 총구는 아직도 상대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상태였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오백천의 눈동자가 옆얼굴을 향하자 혁권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비껴 내고는 안주머니를 뒤져 마치 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USB를 꺼냈다.
“뭣……!”
오백천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단순히 돈만 가져갈 거라고 생각했지 설마 USB의 존재까지도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짐작 못 한 탓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알고 함정을 파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오백천은 이를 악물며 말을 내뱉었다.
“이러고도 네놈들이 무사할 것 같아!”
하지만 혁권은 심드렁한 얼굴로 상대를 마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 협박이 무서웠으면 애초에 일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
“쓸데없이 힘을 빼지 말고 쉽게 가자고. USB에 비트코인만 달랑 넣어 놓지는 않았을 테고 보안장치를 해제할 수 있는 비밀번호가 뭔지 말해 봐.”
“흥. 내가 그걸 말해 줄 것 같아!”
날 선 대답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굳이 일을 어렵게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혁권의 말에 가만히 있던 하킴이 머리를 겨누고 있던 권총을 아래로 내려서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오백천의 무릎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시뻘건 피가 튀며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살을 마구 후벼 파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오백천은 크게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려는 오백천의 어깨를 하킴이 한쪽 손으로 거칠게 붙잡아 시트 등받이에 밀어 붙였다.
“헉헉. 이게 무슨 짓이야!”
금방 바지 한쪽이 끈적한 피로 물들었고 오백천은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남은 무릎 하나도 작살나고 싶지 않으면 어서 말해.”
신음을 참으면서 씨근덕거리던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설마 죽일까 싶으면서도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머리 한쪽이 마비된 듯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아직 참을 만한가 보군. 어디 그럼 얼마나 버티는지 한번 볼까.”
하킴이 진하게 화약 냄새를 풍기는 총구로 반대편 무릎을 겨누자 황급히 오백천이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방금 전의 끔찍한 아픔을 떠올리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다급하게 손을 내밀어 쏘지 말라며 제지한 오백천은 창백해진 낯빛으로 말했다.
“비밀번호를 알려 주겠어.”
“잘 생각했어. 진즉에 그랬으면 무릎도 괜찮았을 거잖아.”
“…….”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오백천은 꾹 눌러 참았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말해 봐.”
“날 살려 준다고 약속해 주시오.”
“좋아. 그러지.”
너무 쉽게 대답을 하자 의심이 갔지만 오백천은 달리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