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9
59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조금 전에 왔어.”
한 달도 훨씬 지나서 만나는 거였지만 두 사람은 바로 어제 본 것처럼 어색함이 없었다.
악수도 없이 자리에 앉자 정갈하게 차려입은 여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참치 정식 어때?”
“좋지.”
대답을 들은 혁권은 메뉴판을 덮으며 말했다.
“그걸로 2인분 가져다주고 사케[酒]부터 먼저 줘요.”
“네.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여직원이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각종 해산물로 만든 반찬과 함께 따뜻하게 데운 사케가 주전자에 담겨져 나왔다.
“먼저 한 잔 따라줄 테니까 받아.”
“지은 죄가 있으니 당연히 그래야지.”
연락도 없이 한국에 늦게 들어온 것에 아직도 꽁해 있는지 퉁명스러운 말투에 그는 피식 웃었다.
“하여튼 소심하다니까.”
“뭐야!”
유기백이 눈썹을 치켜 올리자 혁권은 얼른 한쪽 팔을 내저었다.
“아냐. 내가 잘못했다고.”
“쯧. 알지만 넘어간다.”
“이렇게 봤는데 짠 한번 해야지.”
“그래.”
술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친 두 사람은 적당히 데워진 사케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크.”
“회사 일은 할 만해?”
다시 잔을 채워 주며 묻자 유기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똑같지 뭐. 만날 야근에 윗대가리들은 오더를 받아 오라고 쪼아 대고, 밑에서 사고 치면 그거 수습하느라 바쁘고 알잖아.”
“하긴.”
“가뜩이나 바쁜데 영업 2부에서 사고까지 쳐 가지고 아주 죽을 맛이야.”
“사고라니?”
영업 2부라면 태일물산 영업부에서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혁권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유기백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쓰고는 이야기를 했다.
“카스피 해에 있는 바쿠 유전 지대라고 알아?”
“이야기는 들어봤어.”
카스피 해 서쪽에 위치한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나라에 위치한 무려 1870년대부터 개발된 아주 오래된 유전이었다.
벤젠이 많고 황화물의 함유량이 적은 아주 양질의 원유가 생산되는데, 대부분 파이프라인을 통해 인접한 조지아의 항구 도시인 바투미Batumi로 보내져 유럽 지역에 수출됐다.
구소련 시절부터 엄청난 양을 퍼 올렸지만 인근에서 계속 새로운 유전이 개발되며 현재도 하루 100만 배럴 이상이 생산되고 있었다.
“구소련 시절부터 쓰던 장비와 파이프라인이라 너무 낡아 대대적인 교체 작업을 하는데, 거기에 대형 강관鋼管 파이프를 납품하려고 했었나 봐.”
영업 부서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답게 혁권은 금방 머릿속으로 견적을 냈다.
“오더 금액이 엄청났겠는데.”
“계약액만 1억 6천만 달러야.”
천육백 억이 넘는 거액에 혁권은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제대로 건수를 올렸네.”
“일이 잘 풀렸다면 그렇겠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유기백이 이야기를 이었다.
“사기를 당한 거였어. 강관을 발주한 곳은 있지도 않는 유령회사였고 신용장(LC)까지 전부 위조된 가짜더라고.”
“아니, 그런 기본적인 것도 확인하지 않고 덜컥 계약을 체결한 거야?”
“그러니까 뭐에 씌었다는 거지. 고 부장님이 얼마나 꼼꼼한 성격인지 너도 잘 알잖아.”
“그렇지.”
“아무래도 정기 인사를 앞두고 부담이 컸나 봐.”
“그건 또 뭔 소리야?”
“이동철 그 인간하고 고 부장님이 입사 동시잖아.”
“그런데?”
“김인철 이사가 뒤에서 팍팍 밀어줘서 이 부장이 이번에 본부장으로 승진할지도 모른다는데, 자기는 중동 지역 정세 불안 때문에 2년 연속 영업 목표도 제대로 못 채우게 생겼다는 불안감에 조급해진 거지. 솔직히 위에서 경질 이야기까지 나오는 분위기였거든.”
이야기를 들어 보니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기에 넘어갔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그러다 보니까 무리수를 둔 거지.”
“피해액이 얼마나 되는데?”
“1차로 선적해서 보낸 강관이 2천만 달러 정도 되는데 사기꾼 놈들이 그걸 꿀꺽하고 튀었어. 문제는 그게 아니라 이미 철강 회사에서 구입한 강관들이야. 그게 한 5천만 달러가량 돼.”
“아니, 뭘 그렇게 많이 샀어?”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요즘 강관 시세가 오름세거든. 그래서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고 미리 주문을 넣은 거지.”
“허 참.”
부서는 달랐지만 그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가뜩이나 실적도 안 좋은데 이런 일까지 생겼으니 자리를 지킬 수 있겠어. 결국 어제 사표를 내고 그만뒀더라고.”
“회사 분위기가 뒤숭숭하겠네.”
“아무래도 그렇지. 하지만 어쩌겠어? 그게 샐러리맨의 비애인 걸.”
자조 섞인 이야기에 그는 가만히 술을 따라 줬다.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지난번에 가져간 중고차는 잘 처분했어?”
잔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시면서 유기백이 묻자 혁권은 히죽 웃었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야.”
“으이그. 그래 너 잘났다.”
일부러 턱을 치켜들고는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 유기백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전 때문에 모든 물품 가격이 다 비싸져서 손해를 안 보고 팔 수 있었어. 그리고 이건 네 몫이야.”
안주머니에서 돈 봉투를 하나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자 유기백이 한쪽 손을 내저었다.
“됐어. 지난번에도 받았잖아.”
“줄 만하니까 챙겨 주는 거야. 어서 받아.”
머뭇거리던 유기백은 그가 재차 권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돈 봉투를 집어 들었다.
“자꾸 이러면 내가 미안해지잖아.”
“네가 국내에서 일을 처리해 준 덕분에 내가 얼마나 편했는데 그런 소리 하지 마. 너 아니었으면 번거롭게 다시 들어왔든가 아님 따로 상사에 대행을 맡겨야 했을 거야.”
그러자 한결 마음이 편해진 얼굴로 유기백이 농담을 했다.
“이거 수입이 꽤 짭짭한데 아예 부업으로 삼을까.”
“그럼 나야 좋지. 말이 나온 김에 정말 그래 볼래?”
그가 눈까지 반짝이면서 묻자 유기백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됐어. 그냥 지금처럼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해.”
마음이 맞고 믿을 수 있는 유기백이 국내 일을 맡아 준다면 든든할 거라는 생각에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처럼만 해 줘도 큰 도움이 됐고 너무 부담을 주면 거리를 둘 수도 있었기에 혁권은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혁권은 저녁을 먹으면서 회사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했다.
“과장님, 이제 퇴근하십니까.”
서류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걸 보고 부하 직원이 말하자 호리호리한 키의 오윤태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도 일 다 끝났으면 정리하고 들어가.”
“네.”
대답을 들으면서 사무실을 나온 오윤태 과장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아침에 주차한 모습 그대로 고이 놓여 있는 중형 승용차를 보고 그는 무심결에 슬쩍 미소를 흘렸다.
얼마 전 새로 구입한 것이라 한창 애지중지할 때였으니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자태에 절로 흐뭇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시동을 걸자 부드럽게 울리는 엔진 소리를 들으며 오윤태 과장은 승용차를 몰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향하는 곳은 집이 아닌 용산 쪽이었다.
남산에 위치한 하얏트 호텔에 도착한 그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듯 헤매지 않고 곧장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갔다.
“오윤태라고 합니다만.”
예약을 했는지 묻는 여직원에게 이름을 밝히니 먼저 오신 일행이 있다며 그녀가 창가 쪽 자리로 안내했다.
커피 잔을 앞에 놓고 창유리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화려한 야경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혁권은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오윤태 과장을 맞이하는 혁권의 태도는 마치 자기 집인 양 편안하고 당당해 보였다.
“이렇게 보니 반갑군.”
홀에 흐르는 클래식 음악과 몸에 맞춘 정장, 그리고 여유 있는 미소.
그 모든 것을 태어날 때부터 갖춘 사람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회사를 다닐 때 혁권의 모습을 기억하는 오윤태 과장은 이런 그의 변화에 내심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머리는 좋으나 이해타산이 빠른 구석이 있는, 전형적인 요즘 시대의 젊은이라는 것이 그의 인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허리를 곧게 세우고 그를 바라보는 혁권의 모습은 지금 당장 비즈니스 잡지에 실려도 나무랄 데 없을 만큼 완벽했다.
대체 어디서 이런 행동거지를 배워 온 것인지.
오윤태 과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혁권을 관찰하다 제 앞에 놓인 물 잔에 손을 뻗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밥은 됐고 간단하게 마티니나 한잔 마시지.”
고개를 옆으로 돌린 혁권은 여종업원을 보며 말했다.
“마티니 두 잔.”
“알겠습니다.”
잠시 뒤 올리브를 살짝 띄운 마티니Martini 두 잔을 여종업원이 가지고 와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잔을 들어 마티니를 한 모금 마신 오윤태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혁권을 보며 먼저 말을 꺼냈다.
“리비아 지사로 전출 가고 처음 보는 것 같군. 한번 연락을 해 본다는 게 자네도 알다시피 워낙 일이 바쁘다 보니 못했네.”
“괜찮습니다.”
소속 부서는 달랐으나 김인철 이사의 뒤를 닦아 주면서 종종 함께 어울리곤 했었다.
하지만 어려울 때 옆에 있어 준 유기백과 달리 오윤태는 그가 꼬리 자르기를 당하자 바로 안면을 바꿨다.
사실 지금 이 자리도 상당히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신수가 아주 훤하군. 회사를 그만두고 뭐 다른 일이라도 하나 보지?”
아래위로 그를 훑어보며 묻는 말에 혁권은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작은 오퍼상을 하나 차렸습니다.”
“아, 그래.”
명함을 건네받은 오윤태는 대충 살펴보고는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다른 퇴직자들처럼 직원 두세 명을 데리고 현지 바이어의 주문을 받아 제품 구매를 대행하는 보따리 장사쯤으로 지레짐작한 것이다.
“아직 젊은데 뭐든 하는 것이 좋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게.”
“감사합니다.”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이야기인 걸 알았지만 그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할 이야기라는 것이 뭔가?”
“이걸 좀 봐 주겠습니까.”
혁권이 서류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오윤태는 심드렁한 얼굴로 집어 들었다.
봉투를 열자 얇은 서류 뭉치가 나왔다.
별생각 없이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오윤태는 갈수록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다 손에 쥔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그를 잡아먹을 듯이 무섭게 노려봤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애써 목소리를 낮췄지만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서 상대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걸 보며 혁권은 느긋한 태도로 앞에 놓인 마티니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재테크를 아주 잘하셨더군요. 성남에 아파트를 두 채나 가지고 계시고 강남에는 상가와 오피스텔까지 과장 월급으로 이런 걸 다 장만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무리 대기업에 다닌다고 해도 8천만 원이 채 안 되는 연봉으로 절대 이런 재산을 모을 수 없었다.
뒤가 구린 짓을 했다는 뜻이었는데 총무과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사무용품을 납품하는 업체와 청소와 경비 등 각종 용역 회사에서 뇌물을 받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