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0
60
봉투에 든 서류에는 그동안 오윤태가 뒷돈을 챙겨 마련한 재산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한쪽 손으로 서류를 와락 구기면서 그를 한참 동안 노려보던 오윤태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한테 원하는 것이 뭔가?”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혁권은 마티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요즘도 김 이사와 해외 출장을 자주 나가십니까?”
혁권의 이야기에 오윤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그건 왜 묻는 거지!”
총무부 소속인 오윤태는 회사 일로 외국에 나갈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인철 이사를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빈번하게 해외 출장을 다녔는데, 말이 회사 업무지 실제로는 라스베이거스나 마카오로 원정 도박을 가는 거였다.
혁권도 이들을 따라 몇 번 출장(?)을 다녀왔었기에 속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난달에도 라스베이거스를 다녀오셨더군요. 김 이사는 요즘도 포커판에 푹 빠져 있는가 봅니다.”
“자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
잔뜩 경계하는 시선에 혁권은 느긋한 태도로 이야기를 이었다.
“다음에 또 출장을 가실 때는 마카오로 가십시오.”
눈치가 빠른 사람답게 오윤태는 금방 그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슨 꿍꿍이야!”
“시키는 대로 하신다면 이건 모르는 걸로 하겠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에 놓여 있는 서류를 툭툭 두드리자 오윤태는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정색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김 이사님이 선택을 하시는 거라서 내가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장소는 물론이고 자금까지 오 과장님이 다 세팅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거 왜 이러십니까.”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오윤태가 딱 잡아떼자 혁권 역시 표정을 굳혔다.
“정말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뒷돈을 받았다고 감사실에 투서라도 넣으려고? 흥. 그 정도로는 눈도 깜짝 안 하니까 마음대로 해!”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오윤태는 혁권이 툭 던지듯 내뱉은 말에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김 이사가 비자금에 손을 댄 걸 알고도 과장님을 감싸 줄까요?”
“……!”
등을 뒤로 기댄 혁권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계속했다.
“재작년인가 태일 중공업이 주문한 공작 기계를 수입할 때 버진아일랜드에 위치한 골드 게이트사가 중계 업무를 맡았었죠. 물론 포장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수입 대금 명목으로 거액의 비자금을 국외로 빼돌리려는 작업이었지요. 실제 기계 가격이 1천만 달러 정도밖에 안 됐으니, 한 5천만 달러 이상이 비자금으로 빠져나갔겠군요.”
“으음.”
액수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자 오윤태는 눈가를 파르르 떨면서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 모습을 보며 혁권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위로 말아 올렸다.
사실 아무리 돈을 써서 뒷조사를 한다고 해도 비자금 자체가 아주 은밀하게 극소수의 사람들만 아는 가운데 조성되는 거였기에 파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혁권도 한때 김인철 이사 쪽 라인으로 비자금 조성을 위한 거래에 조금이나마 끼어 있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오윤태 과장이 비자금 중 일부를 유용했다는 것도 그때 이동철 부장의 지시로 관련 서류를 폐기 조작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거였다.
“그중에 150만 달러 정도가 오 과장님한테 흘러들어 갔더군요.”
“다른데 쓸 곳이 있어서 그랬던 거야!”
변명하듯 말하는 오윤태 과장을 보면서 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김인철 이사가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 진 도박 빚을 정리하는데 사용하셨지요. 그런데 제가 알아보니 변제한 액수가 120만 달러밖에 안 되더군요.”
“그건…….”
말문이 막힌 오윤태 과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 사실이 김인철 이사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도 오 과장님을 용서해 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혁권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오윤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탐욕스럽고 냉혹한 성격의 김인철 이사라면 비자금에 손을 댄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경우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제가 좋은 본보기지 않습니까. 김인철 이사한테 우리 같은 것들은 그저 실컷 부려 먹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그냥 갖다 버리고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할 겁니다.”
그는 오윤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걸 놓치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를 계속 설득했다.
“어차피 도박판에서 흥청망청 날려 버릴 돈이니 다른 놈들만 좋은 일을 시키지 말고 저희가 챙기자는 겁니다.”
뭘 노리는지 알아차린 오윤태는 기겁을 했다.
“그러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제가 그렇게 허술해 보입니까. 김인철 이사는 절대 자신이 당한 걸 알지 못할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이미 모든 세팅이 다 끝나 있으니까, 오 과장님은 그저 김 이사를 마카오로 데려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혁권은 상대가 거절하기 어려운 카드를 내밀었다.
“그동안 나이도 어린 김 이사 성질을 맞춰 가며 온갖 구린 일을 다 처리한다고 고생했는데, 이럴 때 한몫 단단히 챙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회사에서 몰래 빼돌려 뒤로 챙긴 비자금이니 조금 털어 간다고 해도 양심에 꺼릴 것이 없고요. 도와주신다면 일이 다 끝나고 큰 거 한 장을 챙겨 드리겠습니다.”
“1억을 준단 말인가?”
오윤태가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며 묻자 그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고작 그거 벌자고 이런 판을 깔겠습니까.”
“그럼?”
눈을 껌뻑이는 오윤태에게 혁권은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였다.
“끝에 공을 하나 더 붙이십시오.”
“10, 10억을 주겠다고!”
깜짝 놀란 오윤태가 눈을 크게 뜨자 그는 확인을 해 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눈 한번 질끈 감고 10억이면 괜찮은 거래지 않습니까?”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월급만 받는다면 꼬박 10년을 쉬지 않고 회사를 다녀도 손에 쥐기 힘든 돈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그는 재촉하지 않고 말했다.
“내일까지 시간을 드리죠. 결정을 내리면 전화를 주십시오.”
그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먼저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겨진 오윤태는 머릿속이 복잡한 듯 얼굴을 굳힌 채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어머니께서 정성껏 차려 주신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선 혁권은 하킴이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인천으로 갔다.
중고차 매매단지 근처에 위치한 카페로 들어가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배도환이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이쪽입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배도환이 반갑게 손을 잡았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지요.”
100대나 되는 중고차를 한꺼번에 구입해 매매단지를 한바탕 뒤집어 놓은 이후로 거의 두 달 만이었다.
“네. 그런데 그새 얼굴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그냥 빈말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어깨도 쳐졌던 예전 모습과 달리 지금은 얼굴에 미소 가득했다.
그러자 배도환은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다 김 사장님 덕분입니다.”
“예?”
“솔직히 그동안 제대로 차를 팔지 못해서 계속 일을 해야 되는지 고민했었는데 사장님 덕분에 마음을 고쳐먹게 되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짐을 덜고 나니 일도 잘 풀리고 요즘은 아주 세상 살 맛이 납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자세를 바로 한 배도환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혁권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는 살짝 당황했다.
“왜 이러십니까?”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이런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아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모습에 혁권도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 배도환 씨가 남을 속이지 않고 성실하게 일한 보답을 받은 겁니다.”
“아닙니다.”
혁권의 말에 배도환은 부끄러은 듯 양손을 흔들었다.
“하하하. 이제 일 이야기를 할까요.”
“어이쿠. 제가 바쁘신 분을 모셔두고 말이 길었습니다.”
“지난번에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됐습니까?”
배도환이 옆자리에 놔둔 서류 봉투를 조심스럽게 들어 테이블에 올려놨다.
“오늘까지 확보한 물품 수량과 목록입니다.”
봉투에서 서류를 꺼낸 혁권은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그러고는 흡족한 표정을 고개를 끄덕였다.
“물량을 다 채웠군요.”
“다행히 도매상에 재고로 남겨진 것이 많았습니다.”
서류를 보니 생산 연도가 다 1, 2년씩 된 재고품들 이었다.
전부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과 소모품으로 시가로 거의 10억 원어치나 됐는데 트리폴리를 포함해 인근 지역 암시장에 넘길 물건들이었다.
원래 배도환은 중고차 딜러였지만 성실함과 정직한 성격을 눈여겨보고는 이번에 일을 한번 맡겨 봤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잘해 줬다.
잠깐 머뭇거리는 배도환은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저, 사장님.”
“말씀하세요.”
“전부 재고에다가 순정품純正品이 아닌 일반품들인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서류를 내려놓은 혁권은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말이 좋아 순정품이지 그저 제품에 자동차 회사 인증 마크 하나 달랑 붙여 놓은 것이 다지 않습니까. 그래 놓고 훨씬 더 비싼 가격에 파는 걸 구매하기보다 품질만 동일하면 일반품이 더 경제적이지요. 설마 매입가를 낮추려고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산 건 아니겠지요?”
그가 장난스레 묻자 배도환은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인증 마크만 없다뿐이지 정품을 제작하는 업체에서 만든 동일한 제품입니다. 아니면 제가 받기로 한 수수료를 안 주셔도 됩니다.”
“믿습니다.”
신뢰를 보인 혁권은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쪽지를 하나 꺼내 배도환에게 내밀었다.
“화물을 보낼 곳입니다. 오늘 오후에 나머지 대금을 넣어 드릴 테니 최대한 빨리 발송을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배도환은 쪽지를 집어 소중하게 챙겼다.
“아. 그리고 중고차를 몇 대 구입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럼 지난번처럼 상태가 괜찮은 차량들로 100대 정도 준비해서 화물들과 함께 보내 주십시오.”
“100대나요?”
생각보다 많은 수량에 배도환이 깜짝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어렵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충분히 준비할 수 있습니다.”
행여나 다른 사람을 찾을까 싶어 배도환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본 혁권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요구 조건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SUV와 함께 화물차도 20대 정도 필요합니다.”
“화물차면 어떤 걸로 말씀입니까?”
“1톤 차량이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배도환은 수첩을 꺼내 혁권의 말을 그대로 적었다.
그 많은 차량을 한꺼번에 준비하려면 당분간은 똥줄 빠지게 뛰어다녀야겠지만 어쨌든 그런 고생을 자처할 만큼 보상은 짭짤했으니 충분히 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