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98
598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됐을 때 누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아버님, 저 인철이입니다.”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김인철이 약간 긴장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김종원 회장을 보며 머리를 숙였다.
“공항에서 바로 오는 길이냐?”
“예.”
다른 사람도 아닌 김종원 회장의 앞이니 바깥에서는 제아무리 철없이 날뛰는 김인철이라도 말과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 머리를 숙이는 막내아들의 모습에 김종원 회장은 별다른 표정 없이 손가락을 들어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그래, 일단 앉아 봐라.”
“회장님, 그럼 전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이 다 끝나면 따로 보고를 하도록 하게.”
“네.”
부자지간에 편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눈치 좋게 박상빈 실장이 일어섰다.
원목 탁자에 펼쳐 놓았던 서류들을 챙긴 그는 김인철을 지나쳐 가면서 살짝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김인철 역시 제 아버지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박상빈 실장을 무시할 수는 없는 위치였기에, 나름 정중한 낯으로 응대하고는 김종원 회장의 맞은편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허, 녀석.”
김종원 회장은 몸을 뒤척여 편한 자세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아들놈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평생 그런 말은 입에 담지도 않던 놈이 외국 나가서 고생 좀 하고 돌아왔다고 이제야 제 아비 건강을 챙길 마음이 든 모양이구나.”
어차피 잘 보이겠다고 알랑방귀를 뀌는 것일 테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은지 썩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나가 있는 동안 좀 반성은 했느냐?”
“예.”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고 돌다리도 다시 두드려 보는 신중함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조용히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김인철을 보면서 김종원 회장이 말을 이었다.
“네 어미의 말도 있고 이번에는 젊은 치기에 잘해 보려고 하다가 실수한 것이라 여기고 넘어가겠지만, 또다시 날 실망시키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두 번 다시 이 집에 발을 들여 놓을 생각은 하지 않아야 될 게야.”
친아버지였지만 김종원 회장이 얼마나 냉혹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는 김인철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얼른 대답했다.
“다시는 실망시켜 드리는 일이 없을 겁니다.”
“그 말을 한번 믿어 보도록 하지. 자리를 만들어 뒀으니까 며칠 푹 쉬고 회사로 출근하도록 해라.”
눈을 반짝이면서 고개를 든 김인철이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태일물산으로 가는 겁니까?”
큰 실수를 범하기 전까지 이사로 있으면서 은연중에 태일물산은 김인철의 몫이라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있었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이어진 김종원 회장의 말에 기대는 산산조각 나 버렸다.
“그 사고를 쳐 놓고 다시 태일물산으로 돌아간다면 직원은 물론이고 주주들이 뭐라고 하겠냐? 태일기획 부사장으로 가도록 해.”
“……!”
마지막 말에 김인철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에 올려 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사보다 부사장이 높은 직책이었기에 얼핏 보면 영전榮轉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그룹사에서 발주해 주는 광고를 전담해서 취급하는 태일기획은 규모에서 태일물산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연매출액 역시 7조 원 이상인 태일물산하고 달리 고작 4~5천억에 불과했다.
이것도 매출의 대부분이 그룹사 광고였고 외부 수주는 전체의 10%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룹의 지원이 없으면 유지가 안 되는 계열사라는 거였다.
큰 실수를 한번 했다지만 그래도 오너가의 일원인데 이런 계열사로 내려보내는 건 유배나 마찬가지였다.
이럴 거면 그냥 외국에 살도록 내버려 둘 것이지 왜 불러들였냐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김인철은 화를 꾹 눌러 참았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듯 외국을 전전하면서 후계자 자리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리는 것보단 어떻게든 그룹에 붙어 있는게 훨씬 나았다.
생각을 정리한 김인철은 애써 담담한 얼굴로 아버지인 김종원 회장을 바라보면서 입을 뗐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서운한 기색을 보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순순히 말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김종원 회장은 눈에서 이채를 띠었다.
“외국에 나가서 허송세월만 보내고 온 건 아니구나.”
“…….”
“거기서 차근차근 실적을 쌓으면 다시 본사나 다른 계열사로 옮겨 줄 테니까 열심히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밖에 네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만 나가 봐라.”
“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김종원 회장은 문이 닫히자,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조금은 정신을 차린 것 같아서 다행이군.”
방송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혁권은 위성 전화기로 우크라이나에 가 있는 함단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총 4,500만 달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럼 대당 얼마지?”
-소모성 부품 일부와 전차포탄 200발을 포함한 가격이니까 전차 한 대당 44만 달러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우크르스페츠엑스포르트Ukrspetsexport사에서 제시한 전차가 신형 Oplot-M이라고 그랬지?”
-예. 마침 자국군용으로 제작해 보관 중인 예비 전차가 있어서 돈만 주면 언제든지 9대를 전부 넘겨줄 수 있다고 합니다.
설명을 들은 혁권은 위성 전화기를 한쪽 귀에 댄 채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조금 부족하기는 해도 나름 3.5세대로 분류되는 전차인 걸 감안하면 그리 나쁜 가격은 아닌 것 같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Oplot-M은 러시아제 T-80U전차의 최신 계량형이었기에 이란에서 제공된 대전차무기를 다수 보유한 반군을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전차를 원하는 만수르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훈련장을 임대하는 건 이야기를 해 봤나?”
-전차를 구매한다면 생산 공장 인근에 위치한 우크라이나 군 훈련장을 쓸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거 잘됐군.”
잠시 머릿속으로 계약 조건을 따져 본 혁권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계약을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전차병을 구하는 일이 남았군.”
-그것도 쉽게 해결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이야?”
-루마니아에 있는 코자레바 중장한테 넌지시 운을 띄웠는데, 100만 달러만 주면 필요한 인원을 정비병까지 딸려서 보내 주겠다고 합니다.
“설마 자국군 병사를 용병으로 파견하겠다는 거야?”
미간을 좁히면서 묻자 함단이 바로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아무리 코자레바 중장이라도 마음대로 그런 일을 했다가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뭐야?”
-원하는 인원만큼 군에서 제대를 시켜 보내 주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신분상 자유의 몸이니 딱히 문제 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군.”
루마니아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생각한다면 매달 3~4천 달러만 준다고 해도 용병이 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설 터였다.
직전까지 군에 있었기에 훈련 상태도 괜찮을 거고 무엇보다 같은 나라 출신이기에 전차병들끼리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을 테니 혁권 입장에서도 괜찮은 제안이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그렇게 해 보도록 해.”
함단의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자 얼마 안 있어 차가 멈추는 느낌이 났다.
하킴이 열어 준 차 문 사이로 혁권이 내리자 방송국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동식 이사가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수고하네.”
혁권은 커다란 방송국 건물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업계에 관련된 인물들이 많으니 직원 명찰을 단 사람들 말고도 드나드는 발걸음이 왕성해 제법 북적거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로비가 워낙 넓은 덕에 커피숍의 테이블이 거진 다 찼어도 오히려 쾌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지금 촬영 중인가?”
“예. 오늘은 새벽부터 스튜디오에 나와서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고생이 많군. 나중에 커피라도 한 잔씩 돌려야겠어.”
“하하, 이미 다들 카페인에 반쯤 취해 있을 텐데요.”
정동식 이사가 가벼운 웃음을 흘리면서 혁권을 세트장이 있는 방송국 안쪽으로 인도했다.
이미 방문증을 받아 놓았기에 경비원이 지키고 있는 출입문 앞에서 카드를 찍고 바로 들어가자 거기서부터는 훨씬 사람의 인적이 적었다.
촬영 소품과 자재 들이 군데군데 놓인 복도를 지나 A-3이라고 적힌 스튜디오로 들어가자, 드라마에 나오는 장소를 똑같이 만든 촬영 세트가 여러 개 나란히 붙어서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촬영이 진행 중인지 세트 한 곳에 조명이 환하게 켜진 채 스태프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혁권은 일행과 함께 조용히 다가가 스태프들 뒤에서 촬영 현장을 살펴봤다.
마침 극중에서 대립하는 관계로 나오는 소현과 여주인공인 은신영이 회사 사무실로 꾸며진 세트에서 연기를 하고 있었다.
“실장님은요?”
“아, 지금 잠깐 외출하셨는데…….”
상사의 약혼녀로 소문이 자자한 소현을 처음 본 은신영이 약간 주눅 든 얼굴로 답했다.
“그래요? 그럼 여기서 기다려야겠네.”
마치 제 집인 양 들어와서 책상 앞에 앉아 버리는 소현의 태도에 은신영이 입을 벌렸다.
“그러지 마시고 바깥에 있는 회의실로 가시는 게…….”
아무리 그래도 약혼녀이지 회사 관계자도 아닌데 주인 없는 사무실에서 떡하니 있겠다는 게 그녀의 상식으론 이해가 안 되었다.
“저기요, 나 누군지 몰라요?”
“실장님 약혼녀 되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네. 여태껏 잘만 드나들었는데 그쪽이 뭐라고 이래라저래라 해요?”
부유한 생활 환경 덕분에 어딜 가든 모난 소리 한 번 들어 본 적 없는 소현이 어이없다는 듯 오히려 톡 쏘아붙였다.
그러자 기세에 눌린 은신영이 눈치를 보면서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됐고요, 그냥 나가 봐요. 아, 실장님 오시면 나 있다는 소리 하지 말고. 놀래켜 주고 싶거든.”
그러면서 손바닥만 한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내 화장을 체크하던 소현은 아직도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 서 있는 은신영에게 짜증스러운 눈짓을 보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은신영이 머리를 숙이고 인사했지만 소현은 이미 안중에도 없는 듯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그렇게 문을 닫고 나온 은신영이 큰일날 뻔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슬쩍 입술을 비죽거렸다.
“세상에서 제일 잘나신 분 납셨네. 어쩜 둘 다 저렇게 끼리끼리 논담.”
첫 만남 때의 안 좋았던 기억이 떠오른 은신영이 진저리를 치고 돌아섰다.
“좋아, 컷-!”
“수고하셨습니다!”
감독의 컷 사인이 울리자마자 소현이 제일 먼저 일어나서 스태프들과 은신영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다.
“잠깐 조명 위치 좀 바꾸고 다시 촬영에 들어갈게요!”
조연출의 외침에 은신영과 함께 사무실 세트장 밖으로 나오던 소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한쪽에 서 있는 혁권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대표님!”
주위에 사람들이 많았기에 오빠라고 부리지 않고 공식적인 호칭을 사용한 소현은 반가운 얼굴로 혁권한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