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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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시 사귀는 티를 내지 않고 소속사 대표로서 그녀를 대했다.
“연기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순순히 고개를 숙인 소현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래도 아직 오늘 찍어야 할 장면이 많은데 고생했다는 말을 듣기에는 좀 이르지 않나요?”
“하하, 그런가.”
서로의 웃음기 가득한 시선과 마주하자 두 사람 사이에서 온화한 분위기가 번졌다.
“그런데 두 분이서 같이 촬영장에 오시다니 드문 일이네요. 정 이사님은 간간이 얼굴도 뵈었지만 대표님은 오랜만인 것 같아요.”
옆에서 은신영이 묻자 그가 소현에게 줄곧 고정되어 있던 눈동자를 떼어 예의 바른 미소를 지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동안 여기저기 좀 다닐 일이 있어서…….”
“바쁘시기도 해라.”
“그런데 응원차 들르신 거면 손이 너무 가벼우신 거 아녜요?”
“어머,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소현이가 먼저 해 주네.”
“언니, 척하면 착이죠.”
원래부터 붙임성 있는 은신영과 단번에 컷을 끝내서 기분이 좋은 소현이 나란히 말로 공격을 해 대니 혁권으로선 당해 낼 방도가 없었다.
“알았어. 빈손으로 온 내가 죄인이로군.”
혁권은 정동식 이사와 함께 눈을 마주쳐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아직 오전 중이고 하니 간식으로 가볍게 토스트하고 커피 정도면 될까.”
“충분해요!”
열띤 반응에 나름 만족해하면서 혁권은 어깨 뒤쪽으로 손가락을 까딱 흔들어 백성균을 불렀다.
귓가에 뭔가를 속닥이자 백성균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물러났다.
“오셨습니까?”
계속되는 촬영에 피곤해 보였지만 시청률이 잘 나오고 있어서인지 정현태 PD가 웃는 얼굴로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고생하십니다. 방영 일정이 갑자기 앞당겨져서 많이 힘들지요.”
그러자 한쪽 손에 대본을 돌돌 말아서 들고 있던 정현태 PD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촬영이 조금 빡빡하지만 원래 이 바닥에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니 괜찮습니다. 그래도 제작사인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에서 지원을 잘해 주셔서 큰 문제없이 촬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나중에 고생한 스태프들 모두 보너스를 확실히 챙겨 드릴 테니 마지막 회까지 지금처럼만 해 주십시오.”
“그 말씀을 들으니까 힘이 마구 나는 것 같습니다.”
넉살 좋은 대답에 혁권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이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밤낮없이 진행되는 촬영으로 인해 다들 조금 지쳐 보이기는 해도 걱정과 달리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것이 내심 안도하며 그가 말했다.
“다른 건 해 줄 것이 없고 배라도 든든하게 채우고 일을 하라고 간식거리를 좀 준비했으니 잠깐 쉬면서 먹도록 하십시오.”
“간식거리를요?”
“네. 토스트하고 따뜻한 음료를 주문해 놨으니 곧 가지고 올 겁니다.”
“뭘 그런 걸 다…….”
“지금처럼 시청률을 많이 나오게 해 달라는 뇌물로 주는 겁니다.”
“아이고, 이거 괜히 부담스러운데요.”
정현태 피디가 엄살을 떠는 척을 하자 주변 사람들이 다들 큰일 났다면서 짓궂게 놀려 대었다.
이에 안 그래도 안 좋은 자세 탓에 구부정한 어깨가 더 아래로 축 늘어지니 그게 더 우스워서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급히 주문한 토스트와 음료가 박스에 담겨서 배달되자 조연출이 큰소리로 외쳤다.
“제작사 대표님이 간식거리를 사 오셨으니까. 다들 이리로 와서 받아 가세요!”
그러자 스튜디오 안에 있던 스태프와 연기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크게 기뻐했다.
“와아!”
“잘 먹겠습니다.”
“대표님, 최곱니다!”
안 그래도 아침 일찍 나와 촬영을 하느라 조금 출출하던 참이었기에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한마디씩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줄을 서서 토스트와 음료를 양손에 하나씩 챙겨 드는 스태프들의 모습을 보며 혁권이 말했다.
“다들 이렇게 좋아들 하는 걸 보니 앞으로 자주 먹을거리를 준비해서 응원을 와야 되겠군요.”
“그래 주시면 저희야 좋지요.”
간식거리라고 해도 인원수가 많은 데다 좋은 걸로 주문을 해서 꽤 많은 돈이 나왔지만, 혁권한테는 그리 부담스러운 액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스태프들을 위로하는 것도 있었지만 대표인 자신이 이렇게 한 번씩 나와서 베풀어 주면 소현을 비롯한 소속 배우들의 기를 세워 줄 수 있었다.
물론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가 드라마 제작사였기에 소속 배우들이 눈치나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배우들 간에 약간의 기 싸움 같은 것이 존재했다.
이렇게 소속사에서 자주 얼굴을 보이며 인심을 쓰면 스태프들한테 체면도 서고 은연중에 이것저것 배려를 해 주게 되어 있었다.
커피가 든 테이크아웃컵을 한 손에 쥔 혁권은 마음 같아서는 소현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기에 애써 참고는 은신영한테 시선을 주면서 물었다.
“촬영을 하면서 뭐 불편한 건 없어요?”
“현장 분위기도 좋고 회사에서 알아서 잘 챙겨 줘서 너무 편하게 연기를 하고 있어요.”
“신영 씨가 우리 회사 배우들 중에서는 제일 연기 경험이 많고 선배니까 다른 후배들을 많이 챙겨 주도록 해요.”
힐끗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소현을 쳐다본 은신영은 가느다란 눈썹을 반달 모양으로 휘면서 대답했다.
“알아서들 잘하지만 대표님 말씀대로 할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고마워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조금 민망스러웠지만 이렇게라도 조금이나마 소현을 챙겨 주고 싶은게 그의 마음이었다.
두 사람 말고도 촬영장에 나와 있는 다른 배우와 중요 스태프 들을 만나 인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5분 뒤에 촬영을 다시 시작하니까 모두 스탠바이 해 주세요!”
조연출이 크게 외치자 간식을 먹으면서 약간 풀어져 있던 스태프들이 다시 긴장감을 곤두세우고는 각자 맡은 자리로 갔다.
“그럼 저희도 이만 가 볼게요.”
“그래요.”
소현은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촬영이 지지부진할 때는 1분이 1시간처럼 흐를 때도 많은데, 어떻게 혁권과 만날 때만 이렇게 빠르게 휙 지나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품으며 소현은 애써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은신영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서기 전에 메이크업을 수정하기 위해서 걸음을 옮겼다.
혁권 역시 조금 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도 많은데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자신 때문에 이 많은 배우와 스태프 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열심히 하라는 말만 건네고 뒤로 물러섰다.
잠시 뒤 촬영이 재개되자 혁권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쪽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 5분쯤 서 있었을까, 하킴이 옆으로 다가와서는 귓속말을 했다.
“보스, 자말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자말이?”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먼저 연락하지 않는 성정을 아는 혁권은 그 말을 듣곤 바로 스튜디오 바깥으로 빠져나와 한적한 복도 구석에서 하킴한테 건네받은 위성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나야.”
-보스, 방금 전 소식이 하나 들어왔는데 아덴에서 정부군과 STC 간에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STC는 남부평의회를 가리키는 약어로 바로 만수르 회장과 UAE가 지원하는 예멘 분리 주의 세력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는 하디 대통령하고 그동안 공공연하게 갈등을 드러냈지만 직접 무력 충돌을 벌이는 건 처음이었기에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침음을 내뱉었다.
“으음.”
-시내 곳곳에서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STC가 아덴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를 점령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부 청사를 점령했다고?”
-그렇습니다.
“그럼 빈다게르 총리는 어떻게 됐어?”
우방국에 지원을 요청한다는 명목으로 사우디아라비에서 계속 체류 중인 하디 대통령을 대신해 빈다게르 총리가 임시수도인 아덴을 관리하고 있었다.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이미 교전 중에 사망했다는 말도 있고, 일부는 청사를 탈출해서 하디 대통령을 따라 지원국인 사우디아라비아로 도피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습니다.
“정부군을 지휘해야 될 빈다게르 총리의 행방이 확인되지 않을 정도라면 아덴의 통제권이 남부평의회 쪽으로 넘어갔다는 뜻이나 마찬가지겠군.”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정보로 볼 때, 저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BBC 현지 특파원의 보도에 의하면 UAE 전투기 몇 대가 날아와 정부군 기지를 폭격해 이번 공격을 도왔다고 합니다.
1990년대까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서구 언론들 가운데 BBC가 거의 유일하게 현지 특파원을 상주시키면서 예멘 내전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BBC 보도가 나왔다면 확실한 정보라고 봐야 했다.
미간을 찡그린 혁권은 손에 든 위성전화기를 고쳐 쥐면서 말했다.
“폭격까지 했다면 사전에 UAE 정부하고 이야기가 다 된 상태에서 일을 벌였다는 거군.”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으음.”
자신한테 일을 맡길 때부터 UAE 정부와 에미리트 왕실이 예멘 내전에 깊숙이 개입하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갑자기 이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아랍 세계의 맹주盟主라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의도적으로 일정한 선을 넘지는 않았는데, 이번 일은 그걸 깨 버리는 거였다.
그것도 UAE 정부가 공군기까지 동원해서 직접 폭격을 했다는 건 하디 대통령을 지원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체면을 깔아뭉개고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응은 어때?”
-아직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지만 지금까지 예멘 내전에 인적물적 자원을 엄청나게 투자한 걸 생각하면, 이번 일을 그냥 두고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이대로 물러선다면 이란과의 패권 다툼에서 주도권을 내주게 될 뿐만 아니라 새롭게 부상한 신흥 강자인 UAE한테마저 밀리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예멘 내전으로 인해 천문학적인 손해를 봤으면서도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제 예멘 내전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서 UAE까지 가담한 중동 강자들의 대리전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만수르 회장이 자신한테 의뢰한 일들은 후티 반군을 상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부군, 아니 하디 대통령 뒤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맞서기 위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짐작이 맞다면 만수르 회장의 술수에 제대로 말려든 거였기에 씁쓸한 얼굴로 입맛을 다신 혁권은, 이번 일이 미칠 영향을 신중하게 따져 보고는 자말한테 지시를 내렸다.
“다른 물품들은 아직 어려울 테고 탄약을 비롯한 군수물자들은 바로 준비할 수 있나?”
-창고에 쌓여 있으니 언제든지 선적이 가능합니다.
자말의 대답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최대한 빨리 화물선에 실어서 예멘으로 보내도록 해. 전투가 벌어졌다면 군수품이 제일 필요할 거야.”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물품들도 가능한 서둘러서 준비를 끝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혁권은 약간 굳은 얼굴로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정 이사한테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돌아간다고 해.”
“옛.”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인 스튜디오를 쳐다본 혁권은 이내 몸을 돌려 부하들과 함께 방송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