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30
630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차민성 대리가 한쪽 손에 은색 알루미늄 가방을 하나 들고 부사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김인철이 힐끗 가방을 쳐다보고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입을 열었다.
“그거야?”
“네.”
앞으로 다가온 차민성 대리는 알루미늄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고는 뚜껑을 열어 안에 든 내용물을 보여 줬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꽉 들어찬 5만 원짜리 지폐 뭉치, 그리고 그 위에는 노란 서류 봉투가 함께 놓여 있었다.
김인철이 한쪽 손을 뻗어서 서류 봉투를 열어 보자 1억 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 열다섯 장이 나왔다.
CD는 은행이나 증권사에서 발행한 예금 증서로 타인한테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어 현금화가 용이한 데다 무기명이라 주고받는 사람이 드러나지 않아 불법적인 거래에 자주 이용됐다.
“전부 다 해서 20억입니다.”
양도성예금증서를 다시 서류 봉투에 집어넣은 김인철은 가방 뚜껑을 닫으면서 말했다.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입단속은 확실히 시켰겠지?”
“몇 번을 깨끗하게 세탁기를 돌린 거니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고했어.”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어느 정도 회사에 적응하자 김인철은 일부러 하청 업체에 주는 대금을 부풀려 지급했다가 다시 차명 계좌로 몰래 돌려받는 방법으로 적지 않은 액수의 비자금을 자신의 주머니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차민성 대리가 가져온 돈은 태일기획에서 발주한 옥외광고판을 전국에 설치하는 업자들한테서 거둬들인 거였다.
“흥. 잔돈푼이나 뜯고 있으려니 영 체면이 안 서는군.”
건들거리면서 말한 김인철이 문득 화제를 바꿨다.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지?”
그러자 차민성 대리가 슬쩍 눈치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최근 들어 정유를 맡고 있는 김문관 사장님하고 만남이 잦은 걸로 볼 때 아무래도 태일물산 최세원 대표는 그쪽으로 줄을 선 것 같습니다.”
대번에 표정이 일그러진 김인철은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책상을 세게 내려치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최세원 이 자식이!”
아버지뻘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최세원 대표가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욕설이 입에서 바로 튀어나왔다.
태일물산에 있을 때부터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던 사이였기에 더욱더 반감이 컸다.
김종원 회장의 나이가 고령인 데다 아들들이 경영 일선으로 하나둘 나서며 두각을 나타내자, 태일그룹 주요 임원들 사이에서 누가 후계자가 될지를 두고 줄서기가 시작됐다.
원래는 장남이자 건설사 경영을 맡고 있는 김성균이 가장 앞서 나갔지만, 얼마 전에 한번 삐끗한 이후로 잠깐 주춤하는 사이에 둘째인 김문관이 틈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치고 나오는 상황이었다.
특히나 정제 마진 상승으로 인한 정유 업계 호황 덕분에 무려 1조 원이 넘는 흑자를 기록하자 그룹 안팎에서 김문관의 인지도가 크게 상승했다.
이렇게 두 형들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크게 앞서 나가고 있는 것과 달리, 김인철은 거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주가조작이라는 좋지 않은 일로 검찰 조사를 받은 것도 문제였지만, 그룹 임원들을 돌아서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귀국 후에 주요 계열사가 아닌 한직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이걸 그룹 임원들은 김종원 회장이 후계자 경쟁에서 김인철을 완전히 배재시켜 버린 걸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고 내심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태일물산까지 둘째 형한테 넘어갈 상황이 되자,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히 날 이런 식으로 무시해!”
가슴을 크게 들썩이면서 치솟는 화를 토해 내자 차민성 대리가 서둘러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부사장님, 조금만 침착하시고…….”
“내가 지금 가만히 있게 생겼나!”
만약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찢어발겨 버릴 것처럼 흉흉한 기색이 감돌았다.
아무리 재벌가의 일원이라도 그룹을 이어받지 못한다면 그 순간 끈 떨어진 연鳶 신세가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반응은 당연한 거였다.
“지금은 은인자중하시면서 힘을 기르실 때입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 좋은 기회가 올 겁니다.”
“당장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나게 생겼는데 그런 한가한 말이 나와!”
부사장실 밖까지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고함을 내지르자 차민성 대리는 괜히 화를 더 돋울까 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러다가 아버지가 덜컥 두 형들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하기라도 한다면 나만 닭 쫓던 개 꼴이 되는 거라고!”
하나둘 등을 돌리는 그룹 임원들에 대한 분노도 있었지만, 이대로 완전히 도태되어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김인철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김인철은 눈을 매섭게 번들거리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오늘 밤 강남에 있는 오피스텔로 노형석을 불러.”
뜻밖의 지시에 차민성 대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국정원하고 얽힌 일이 있어서 그쪽은 당분간 이용을 하지 않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알고 있어.”
“그런데 노 사장은 왜…….”
자꾸만 토를 다는 게 신경에 거슬린 김인철이 혀를 차면서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잔말 말고 하라는 대로 해!”
안 그래도 속에서 열이 뻗쳐 죽겠는데 부하랍시고 있는 것마저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하니, 기껏 조금이나마 가라앉힌 화가 다시 끓어오르는 듯했다.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잔뜩 날이 선 반응에 차민성 대리는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더 할 말이 없으면 그만 나가 봐.”
짜증 가득한 얼굴로 한쪽 팔을 내젓자 차민성 대리는 표정을 살짝 굳힌 채 머리를 숙였다가 바로 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강남역 바로 앞에 위치한 최고급 오피스텔인 로열 팰리스 최상층에 김인철이 소유한 펜트하우스가 있었다.
웬만한 아파트보다 큰 면적에 24시간 상주하는 경비와 고급스러운 로비 그리고 안내 데스크까지 있어 오피스텔이 아니라 호텔 같은 느낌을 줬다.
실내 역시 대단했는데 해외에서 수입해 온 자재와 마감재로 공사를 하고, 천장이 5미터로 아주 높을 뿐만 아니라 전면 통창을 통해 강남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풍경을 자랑했다.
매매 가격만 20억이 넘는 고가의 오피스텔이었지만 김인철은 여기서 지내지 않고 가끔씩 휴식을 취하거나 오늘처럼 사적인 일을 처리할 때만 이곳을 이용했다.
늦은 밤 물소 가죽으로 만든 소파에 앉아 혼자 위스키를 마시고 있을 때 벨 소리가 울렸다.
현관 인터폰을 집어 든 김인철은 모니터에 뜬 얼굴을 확인하곤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 줬다.
잠시 뒤 노타이 정장을 한 노형석이 안으로 들어와서는 소파에 있는 김인철을 보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다는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김인철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턱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거기 앉아.”
“예.”
라이터를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인 김인철은 하얀 연기를 내뱉으면서 소파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에 눈치가 빠른 노형석은 뭔가 큰일이 있다는 걸 직감하곤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김인철이 고개를 들고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을 하나 해 줬으면 하는데, 할 수 있겠어?”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하는 모습에 김인철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안주머니에서 사진을 하나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죽여 버리거나 두 번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어 놓도록 해.”
아무 생각없이 사진을 집어 들어서 확인하던 노형석은 누군지 알아차리고는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이, 이분은!”
사진에 찍혀 있는 인물은 바로 김인철의 둘째 형이자 태일정유 사장인 김문관이었다.
“시끄러워지지 않도록 깔끔하게 사고로 꾸밀 수 있겠지?”
온통 사색이 된 얼굴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김인철이 미간을 찡그렸다.
“왜 말이 없어?”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일그룹 3세한테 위해危害를 가하는 일이었기에 까딱 잘못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별거 아니야. 그냥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만 하면 돼.”
“그렇지만…….”
계속 주저하자 김인철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돈은 두둑이 챙겨 줄 테니까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내뱉듯이 토해 낸 그의 눈빛이 마치 독사처럼 싸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만약 노형석이 거절했다간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실천에 옮기지 않았더라도 김인철이 자기 형을 죽이려고 했다는 걸 아는 사람을 가만 놔둘리 없지 않은가.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면 노형석 역시 손에 피를 묻히고 공범자가 되는 선택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노형석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예. ……알겠습니다.”
마치 바닥을 긁는 것처럼 갈라지는 목소리에 스스로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김인철은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흥, 하고 비웃듯이 입가를 끌어 올리곤 소파 팔걸이를 탁 내리쳤다.
어차피 그럴 거면서 뭐 하러 질질 끄냐는 신경질이 포함되어 있는 몸짓이었다.
어느새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를 크리스털 재떨이에 비벼서 끄고는 김인철이 턱짓으로 바닥에 놓여 있는 보스턴백을 가리켰다.
“착수금이야. 일을 다 끝내면 큰 거 두 장을 챙겨 줄 테니까 한동안 외국에 나가 있도록 해.”
큰 거 두 장이라면 20억이었다.
쉽게 만져 볼 수 없는 거액에 노형석의 얼굴이 탐욕으로 가득 찼다.
그런 거액이라면 목숨을 걸어 볼만 했다.
어차피 일을 벌이면 더 이상 한국에서 살기 어려울 테니 돈을 챙겨서 외국에 나가 남은 인생을 호화롭게 살면 되는 거였다.
결심을 굳힌 노형석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고는 앞에 있는 김인철을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까지 처리해야 되는 겁니까?”
“빠를수록 좋아.”
“준비가 되면 다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흔적을 남겨서는 안돼.”
“사고사로 깔끔하게 처리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좋아. 믿어 보도록 하지.”
이야기가 다 끝나자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노형석은 돈이 들어 있는 보스턴백을 챙겨 들고는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며 넓은 오피스텔 안에 다시 혼자 남게 되자 김인철은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독한 위스키를 한 입에 털어 넣고 술잔을 깨 버릴 듯이 세게 내려놓은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태일그룹은 내 거야. 그 누구한테도 절대 양보할 수 없어.”
붉게 충혈된 김인철의 눈동자에서 잔혹한 광기와 집착이 일렁거렸다.
형들에게 뒤처졌다는 불안감, 그리고 후계자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 버릴 수도 있다는 초조함에 결국 김인철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됐다.